목록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99)
함께쓰는 민주주의
고려대생 피습사건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갔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마산 의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국회 앞에서는 물리적 진압이 없었다. 평화적 시위를 마친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청계천 4가를 지났다.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갑자기 무기를 든 한 무리의 청년들이 나타나 학생들에게 돌진했다. 경찰의 지시를 받은 반공 청년단원들이었다. 정치깡패들의 무차별 테러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길바닥에 쓰러졌다. 흡사 숨이 끊어진 듯 보이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이 사건은 동아일보 1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는 테러를 당한 학생 중 한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오보였다. 한 학생이 생사를 오가는 중태에 빠지긴..
저항과 투쟁의 무대 광장은 민주주의와 운명을 함께 해왔다. 해방 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1960년 4.19 혁명.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된 그 날의 광장 은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 의사당 앞이었다. 대학생들은 의사당 앞에 모여‘부정선거 다시 하라! 민주주의 수호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국회 의사당을 거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하자 경찰은 이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 때 광장은 피로 얼룩졌다. 1970년대는 광장이 사라진 시대였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긴급조치를 앞세워 국민의입에 재갈을 물리고 폭력으로 손발을 묶었다. 시위와 집회는 저지선이 따로 없었고, 대학생들은 학교정문 밖 진출을 꿈도 꾸지 못했다. 사복경찰은 강의실에도..
장충동 족발집 거리의 분도회관 서울 사람이 아니라도 장충동이라는 지명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배달 야식 메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족발. 많은 업체들이 ‘장충동’ 원조 경쟁을 벌이며 서울 전 지역은 물론이고 전국에 점포망을 형성해 놓은 덕분이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사거리에서 장충체육관을 뒤로하고 서북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족발집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북한 음식인 족발이 장충동의 상징이 된 것은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충동의 족발집은 대부분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원로 인사였던 문익환, 백기완, 계훈제 선생의 고향도 이북이어서 단골로 드나드는 집이 몇 군데 있었다고 한다. 1985년에 결성된 민통련은 분..
주민을 섬기는 교회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 2동 7288-11. 태평로 삼거리에서 북쪽 방향으로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다가 시청 정문 앞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오십 걸음 정도 들어가면 길 옆 낮은 땅 아래로 성남 주민교회가 나타난다. 시민의 고단한 삶 위에 끊임없이 군림하기 위해 위엄과 권위의 모습으로 날로 몸집을 불려가며 위용을 떨치는 관공서. 그 담벼락 아래로 낮게 자리한 주민교회의 첨탑은 그러나 높지 않고 십자가 또한 주변의 여느 교회의 것처럼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외국인 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 이라는 간판과 ‘지역 아동센터’ 안내문이 바깥 벽에 큼직하게 붙어 있어서 쉽게 그 정체를 알 수 있게 한다. 주민교회의 역사는 1973년, 이 땅이 오랜 시간 군부 독재에 얼어가고 민중이 가난과 ..
여의도 공원 가는 아침, 바람이 불고 날이 몹시 추웠다. 아름다운 단풍에서 급격히 진갈색으로 사라지는 낙엽들이 여기저기 바람에 휩쓸리고 있었다. 여의도 공원은 쓸쓸했다. 예전에 그곳은 ‘여의도 광장’이었다. 끝이 아득했던 넓디넓은 공간이었다. 거기서 친구들이랑 자전거도 타고 그 옆 한강 갈대밭에서 사진도 찍었다. 대규모 공연이 벌어지는 곳이었고 몇 백만 명이 모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 할 수 있는 넉넉한 모임과 소통의 공간이었다. 지난 1999년 정부는 그 넓은 공간에 나무를 심어버렸다. 서울 1천 5백만 명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지방에 올라와 호소하던 사람들의 공간을 막아버린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나무들을 비집고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여의도 광장에 나무를 심어 숲으..
오래도록 눈에 익은 세 가지 풍경 인사동 초입에 자리한 탑골공원은 189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근대식 공원이다. 장장 11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셈이다. 당시 공원으로서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서울 시민들에게 휴식처로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담장과 고풍스런 출입문이 안팎을 확연히 구분 짓고 있어서인지 그곳을 공원으로 이용하는 시민들은 많지 않다. 그곳에는 오래도록 눈에 익은 풍경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매일 출퇴근 도장을 찍듯 애용하는 노인들이고, 둘째는 1980~90년대 집회 시작과 마무리를 선언하는 장소이자 가두시위의 정해진 코스로 이용했던 시위대이고, 셋째는 매주 목요일 낮 2시만 되면 나타나는 어머니들이다. 이것은 탑골공원이 서울 한복판에 있어 접근하기가 수월하고 유동인..
새로운 망령의 목록 망령. 어느 시대건 혐오스럽고 치욕스런 역사의 잔재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 아직 안 죽었소.’ 하며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망령의 대표적인 목록에 드는 것이 친일파, 신사참배, 박정희, 국가보안법 등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단죄하고 청산하지 못한 후세대의 죄도 무시 못 할 것이라 시대착오적인 망령의 출현에도 실효성 있는 해법이 없어 무기력할 뿐이다. 진보적 비판 세력의 목소리만 분기탱천할 뿐 보수화의 급물살을 타고 전력 질주하는 한국 사회를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즈음, 그 망령의 목록에 새로 오른 것이 있으니, 참으로 생뚱맞기 그지없는 단어, ‘전두환’이다. 광주 학살의 발포 명령자를 속 시원하게 밝히지는 못했으나, 그 주범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고, 1980년 ..
전국적으로 국지성 호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던 길 내내 장대비가 물대포로 쏘아대듯 퍼붓다가 잦아들었다가 말끔하게 개었다가 다시 기습적으로 퍼붓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나 봉화로 접어들자 더 이상 변덕스런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 시간에도 강원도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해마다 물난리로 생지옥을 겪는 강원도와 접경지대를 이루는 지역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봉화의 날씨는 천연덕스러웠다. 도 경계선이 언제 어떻게 그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땅의 생김새가 그것을 구분 짓는 첫 번째 조건임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땅의 생김새에 따라 하늘이 변하고 땅과 하늘의 궁합이 빚어내는 조화와 변덕 속에서 식생이 결정된다. 그리하여 사람의 삶과 앎이 스스로 그러하게 되니 지역색이야말로 자연에 ..
인천 지역에 지하철이 생긴 줄 몰랐다. 계양에서 동막까지 가는 노선인데 그 중간에 갈산역이 있었다. 갈산역 3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부평 대우자동차 건물이 보인다. 그 크기만 30만 평이나 된다. 프레스, 차체, 조립 공장 등에서 8천 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마티즈, 라세티, 토스카를 생산하고 있다. 회사 건물 벽에는 제법 멋있는 타일로 된 아이들의 그림이 수십 개 붙어 있다. 1985년 4월 16일, 이곳이 해방 후 처음으로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전두환도 뒷골이 당기는 충격을 받았다 한다. 총 8명의 노동자들이 구속된 대우자동차 파업사건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 한 분기점을 이루었다. 1970년대 주로 섬유산업 등 여성중심의 노동운동을 남성중심으로, 그것도 대규모 중공..
인사동 한 모퉁이에 둥지를 틀다 평일 낮인데도 인사동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서울 관광의 필수 코스답게 많은 외국인들과 한국의 젊은 남녀들이 가게마다 기웃거리며 한국의 전통문화를 눈요기하고 있었다. 대형 관광상품 가게와 스타벅스와 같은 외국기업이 들어서서 예스러운 정취나 소박하고 정감 어린 멋을 더 이상 찾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젊은 세대와 외국인들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비하면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인사동만한 곳이 없긴 하다. 또한 인사동은 화랑이 많기로도 유명하고, 오랫동안 예술인들이 만남의 장소로도 애용해 왔다. 그러한 장소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절을 꼽는다면 단연 1980년대다. 군부독재정권이라는 공동의 적을 향해 예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공통의 문제 의식을 가지고 대화하고 토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