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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묵언의 시위 현장이었던 국립4.19민주묘역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12. 10:44
 
고려대생 피습사건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갔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마산 의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국회 앞에서는 물리적 진압이 없었다. 평화적 시위를 마친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청계천 4가를 지났다.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갑자기 무기를 든 한 무리의 청년들이 나타나 학생들에게 돌진했다. 경찰의 지시를 받은 반공 청년단원들이었다. 정치깡패들의 무차별 테러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길바닥에 쓰러졌다.

흡사 숨이 끊어진 듯 보이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이 사건은 동아일보 1면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기사는 테러를 당한 학생 중 한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오보였다. 한 학생이 생사를 오가는 중태에 빠지긴 했으나, 천만다행 으로 회생했다. 고려대 80학번인 홍기원(48세) 씨는 이것을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오보’라고 평가한다.

 3.15마산의거를 시작으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 로 일어났고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던 무렵 고대생 피습사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에 불을 당긴 격이었다. 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4.19혁명이 도래한다.


안암동에서 수유리까지 이어진 묵언의 시위
 
해마다 4월 18일이 되면 고려대에서 4.19묘지까지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1969년부터 개최한 행사는 올해로 39회째를 맞는다. 지금에 와서야 그 상징적 의미가 많이 퇴색되고 참여 학생 수도 줄고 말 그대로‘달리기 대회’가 되었지만 4.18에 대한 고려대 학생들의 자부심은 매우 컸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정권의 부정과 불의에 맞선 시위는 고등학생들 몫이었다. 대구 2.28학생의거도 3.15마산의거도 고등학생들이 주축이었다.
 
 
언론 통제가 심했던 1980년대와는 달리 당시에는 언론이 살아 있었다.‘ 미국 물’을 먹은 이승만은 자유주의를 신봉했으므로 어쨌거나 언론은 통제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고등학생들도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50년대부터 고등학생들은 정부가 주관하는 반공집회에 자주 동원된 터라 시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 반면 대학에 가기 어렵던 시절 대학생들은 특권층 의식이 강했던 때라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학교 밖으로 나가 시위를 처음 벌인 것이 바로 4월 18일이었다. 동생들이 더 먼저 더 분연히 일어나 항거하다 무참히 쓰러져 가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피습사건 역시 대학생들에 대한 최초의 테러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고려대에서는 4.19혁명을 기념하는 행사는 따로 열지 않고 4.18을 위한 행사에 집중한다. 4월 18일이 되기 전 일주일을‘4.18주간’으로 정하고 강연회, 세미나 등도 열린다.
 
 
'4.18마라톤 대회’는 안암동에 위치한 고려대에서 출발해 수유리 4.19묘지를 반환점으로 하여 다시 고려대로 돌아오는 총 16킬로미터 구간을 달리는 대회다. 지금은 출발점이 고려대 정문으로 바뀌었는데 당시에는 대운동장이 출발점이었다. 누가 빨리 달리고 누가 먼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 다 함께 움직이고 다 함께 돌아오는 일이 중요했다. 선배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마라톤이라는 외형을 빌려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1980년대 초에는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살벌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구호조차 외칠 수 없었다고 한다.

묵언의 시위를 벌이며 4.19묘지까지 간 학생들은 혁명기념탑과 묘역 앞에서 참배를 하고 다시 조용히 학교까지 돌아와야 했다. 그럼에도 마라톤 대회에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당시 많은 선배들이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을 당해 학교 밖으로 쫓겨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남은 후배들에게는 스스로의 결속력을 다지면서 새내기들을 추동해낼 만한 계기가 절실히 필요했고 마라톤 대회는 누구나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단합의 장이 되었다. 공대 재료공학과에 입학한 홍기원 씨도 마라톤 대회를 통해 대한민국의 시대적_정치적 격랑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학년이었으니까 의미도 모르고 그냥 뛰었죠. 그땐 운동권도 아니었고 일반 학생으로 참여했는데 전교생이 거의 다 참여했고 학교에서 가장 큰 행사로 알려져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뛰게 되었죠.”
그는 그 이후 전두환 정권이 집권하면서 휴교령이 내려지고 그 항의시위에 참가한 것이 직접적
인 계기가 되어 학생운동에 몸을 담게 되었다. 많은 고려대 학생들이 홍기원 씨처럼 4.18마라톤
대회를 시작으로 역사적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4.18마라톤 대회’는 안암동에 위치한 고려대에서 출발해 수유리 4.19묘지를 반환점으로 하여 다시 고려대로 돌아오는 총 16킬로미터 구간을 달리는 대회다. 지금은 출발점이 고려대 정문으로 바뀌었는데 당시에는 대운동장이 출발점이었다. 누가 빨리 달리고 누가 먼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 다 함께 움직이고 다 함께 돌아오는 일이 중요했다. 선배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마라톤이라는 외형을 빌려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민주와 자유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선배들이 잠든 곳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자리한 4.19묘지는 1963년도에 준공되었다. 그 후 1993년에 성역화 사업 으로 새롭게 단장되었고 1997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되었으며 2006년에‘국립4.19묘지’에서‘국립4.19민주묘지’로 개칭되었다.
지하철 4호선 수유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길가에 세워진 돌기둥들을 만난다. 높이가 서로 다른 돌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뻗은 모습의 그 조형물은 독재와 부정의 시대 상황을 뚫고 솟아나온 의연한 기상을 형상화한‘민주의 뿌리’이다. 거기서부터 4.19묘지가 시작되는 셈이다. 조형물을 끼고 옆으로 난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면 정문이 보인다.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는 못한다. 하지만 수유리 주민들에게는 햇빛 좋은 날 산책 코스이자 쉼터로 애용되고 있는 듯했다. 취재를 간 날에도 묘역 앞쪽에 마련된 다목적 광장과 휴게 광장에서 유모차를 끌고나온 엄마들과 아장걸음을 걷는 아이들이 노닐고 있었으며 벤치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다리쉼을 하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4.19공원’으로도 통하는 이 구역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성역 공간과 시민 이용 공간을 구분하는 상징문을 통과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웅장한 기상을 표출하듯 사람을 압도하며 하늘로 치솟은 대형 돌기둥들에 시선이 붙박인 채 걷게 된다. 누가 제어하지 않아도 말소리를 줄이고 발걸음을 늦추며 경건해지게끔 하는‘4월학생혁명기념탑’이다. 그 돌기둥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당시의 참여 학생들을 형상화한 조형물로 어떤 폭풍우에도 쓰러지지 않겠다는 강고한 의지와 동시에 민주와 자유를 염원하는 간절함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 4.18마라톤의 목적지는 바로 이 기념탑이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결승점에 닿는 것이었지만 기념탑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 향을 피우고 참배를 하는 일이 마라톤 대회의 의미를 되살리는 행위였던 것이다.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에는 마라톤 대회의 양상이 달라진다. 가두시위를 하듯 깃발을 들고 행진을 하는가 하면 구호도 외치고 운동가도 불렀고 경찰들과 실랑이도 벌였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거리에 몰려나와 한 목소리를 높이며 시민 대중들에게 군부독재의 부당함을 알렸다. 그리고 4.19묘지 참배 후 성명서를 낭독하면서 정권을 직접적으로 규탄하기도 했다.

“1984년 그 해 아픈 기억이 있어요. 3.7사건이라고 하는데 그때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던 친구들이 거북이 마라톤 대회를 계획했어요.
뛰는 게 아니라 걷는 마라톤이죠. 시민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군부정권의 실체를 알리기 위해서였는데 그 계획이 탄로나버렸어요. 그중 한 친구가 군에 강제징집을 당했고 100일 만에 의문사 했어요.

대부분의 군 의문사가 그렇듯 친구 역시 군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재조사를 했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미완의 혁명, 미완의 민주주의, 다시금 살아 돌아온 박정희 의 그림자, 홍기원 씨의 이야기는 그렇게 쓸쓸하게 내게 건너왔다.
 
‘서울의 봄’끝자락에서 치른 장례대행진
 
 
마라톤 대회 이외에 4.19묘지가 시위 장소로 이용되었던 것은‘5.16장례대행진’때였다. 1980 년 그 짧았던‘서울의 봄’시절, 학생들은 거리로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나가자는 쪽은 신군부의 힘이 더 공고화되기 전에 먼저 치고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나가지 말자는 쪽은 그것이 신군부에게 빌미를 제공해 오히려 이용당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다 5 월 13일 밤에 연세대와 성균관대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면서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다음날 전국의 대학교에서 일제히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5월 15일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역에 집결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날 오후, 군이 투입되고 있다는 제보가 총학생회장단에 전달되면서 상황은 돌변한다. 효창운동장과 잠실운 동장 부근에 군인들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가 집결해 있다는 것이었다. 회장단은 심야에 군부대와 충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시위를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다수의 학생들이 그 자리를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지도부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서울역 회군’ 이었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서울역 앞 집회를 끝으로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고려대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 그렇게 끝낼 수는 없다며 다음날 어떤 식으로든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논의 끝에 결정한 것이‘5.16장례대행진’이었다. 3백여 명의 학생들이 5월 16일을 맞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을 상징하는 관을 들고 4.19묘지까지 행진을 했다. 그 운구는 역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부세력에 대한 퍼포먼스이기도 했다. 어떤 저지도 당하지 않고 무사히 4.19 묘지까지 갔다. 묘지에 도착한 운구 행렬은 기념탑 앞에서 제문을 읽는 등 장례행사를 치렀다. 그리고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그날이‘서울의 봄’이 끝나기 바로 전날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었던 것이다. 다음날 밤, 이화여대 강당에서 전국 총학생회장단이 향후 대책을 논의하는 그 시간에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발표를 내리고야 만다.
물론 그 이후에도‘4.18마라톤 대회’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여전히 5월 축제, 고연 전과 함께 고려대에서 가장 큰 한 해 행사로 치러지긴 하지만 준비하는 학생회나 참여하는 학생들 이나 자신들이 뛰는 그 길이, 반환점이 되는 그 묘지가 선배들에게는 어떤 의미였는지 한국 현대 사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곱씹어보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글/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9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민족문학작가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와『푸른 손들의 꽃밭』이 있다.

사진/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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