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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전태일의 흔적 따라, 길을 걷다.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밤새 내린 비로 고속도로는 젖어있었다. 전태일! 그가 살았던 흔적을 따라 나선 오월, 비에 젖은 신록은 연둣빛으로 고왔다. 전태일기념재단의 12인승 승합차에 가득 끼어 앉은 전태일의 후예들은, 노동자의 자긍으로 부활한 선배가 나고 자란 땅을 밟는다는 사실에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박계현 사무총장도 호흡을 조절하며 비오는 고속도로를 달렸을 것이다. 서울을 벗어나면서부터는 다행히 비는 잦아들기 시작했고, 대구에 도착했을 때는 걷기 좋은 날씨였다. 전태일이 태어난 동산동 311번지 일대는 은행나무가 들어 찬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공원입구에는 ‘바르게 살자’ 라는 표지석이 버티고 있었다. ‘바르게’ 사는 ..
다시 외쳐야 할 ‘돌멩이’ 『어느 돌멩이의 외침』저자, 유동우 씨 이야기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유동우, 그는 어릴 때 동화 같은 꿈을 꾸었다.고즈넉한 낙도에서 어민들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거나 천진하고 투박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꿈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는 가난은 현실을 깨닫게 했고 일찌감치 그 꿈은 접어야했다. 열일곱 살 부터는 도시의 공장을 전전하며 ‘모가지가 열 두 개라도 모자랄’ 요꼬쟁이(봉제공정의 높은 노동 강도를 노동자들이 한탄하여 스스로를 부르던 말)가 되었고 꿈은 성직자로 바뀌었다. 정규교육을 이수하지 못하더라도 믿음만 있으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꼬쟁이의 삶은 고달팠고 영양실조와 폐결핵, 지독한 가난, 전망..
인권을 살리는 치유, 국가폭력 피해자 치유프로그램 글_장남수 jnsoo711@hanmail.net “여기, 사람이 있다!”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망루에서 외치던 사람은 그러나 끝내,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검은 연기와 함께 시커멓게 무너져 내리는 건물 잔해처럼 철거민들의 삶은 무너졌다. 죽고 끌려가고 울부짖는 현장에서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체 따라 울다 천막귀퉁이에서 웅크리고 잠들었다. 용산참사 피해자 지원활동을 하던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빈민사목 팀의 눈에 이 아이들이 박혔다. 천막에서 자고, 밥 먹고, 등교하고, 천막으로 돌아와 이해할 수없는 험한 상황을 매일 목격하는 이 아이들의 마음상태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인권의학연구소(이사장 함세웅 신부)의 국가폭력피해자 치유프로그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삶의 지침이 된 ‘나 이제 주인 되어’ 글_장남수/ jnsoo711@hanmail.net “엄마의 삶은 불꽃같았다. 엄마의 흔적을 되짚어 가다보면 열기가 느껴진다.” 고 이옥순 씨 (원풍노조 총무, 서울노동운동연합 부위원장 등)의 딸 권다정(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2)은 그 온기로 엄마 없는 어린 날을 견뎠고 건강한 대학생이 되어있다. 통일혁명당 사건 장기수 출신(권낙기 씨)인 아버지와 노동운동가였던 엄마의 삶은 딸 다정에게 어떤 줄기를 형성했을까. 엄마가 남긴 것은? 내가 막 열 살이 되던 2001년 2월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후 성당에서 기도하는 시간 외에도 해를 보고도 달을 보고도 늘 기도했고, 마지막에는 꼭 ‘엄마’를 부르면서 마무리했다. 엄마는 나에게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광장무대에 선 70년대 민주노조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 신화의 허구- 글_ 장남수/ jinsoo711@hanmail.net 나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7남매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가지고 있던 땅을 모두 친일파에게 빼앗겼고 이후 자식들에게 한평생 미안해하셨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주인집 언니를 따라 평화시장으로 갔다. 7번 미싱사는 나에게 “시다 해봤니” 물었고 나는 “네, 해봤어요.” 라고 거짓말을 하고 취직이 되었다. 내 나이 13살에 나는 ‘공순이’가 되었다. (청계피복 노조 신순애, 57세) 열세 살 ‘공순이’는 이제 쉰일곱 살 황혼기가 되어 40년도 넘은 그날을 되짚고 있다. 연기자들이 마임으로 그의 삶을 재현하는 무대 위로 신순애 씨의 자분자분한 음성과..
“전설속의 누님” 순댓국집 임선호 씨 글 장남수/ jinsoo711@hanmail.net 올해로 꼭 30년, 해마다 9월이면 ‘그날’을 떠올리며 전국에서 한 공간 안으로 모여드는 여성들이 있다. 제주, 강릉, 광주, 대구, 멀든 가깝든 만사를 제쳐놓고 바람난 처녀처럼 달려가는 그곳, ‘원풍동지’모임이다. 그 모임에 30년 동안 단 한해도 결석하지 않은 임선호(53세)씨를 만나기 위해 조치원의 ‘무봉리 순댓국’으로 찾아갔다. 25년 경력의 순댓국 뽀얀 국물에 직접 담근다는 맛깔스런 김치 걸쳐 먹으니 환절기 감기가 뚝 떨어져나가는 듯 했다. 임선호 씨는 1975년 열여섯 살에 원풍모방에 입사했다. 양성공 교육을 받으면서부터 언니들에게 노동조합이야기를 들었고 자신이 입사하자마자 유니언숍 제도에 의해 조합원이 ..
이소선어머니, 1주기 추도식 글 장남수_원풍노조, 등 지난해는 특히 민주화운동의 전선에서 큰 역할을 하셨던 귀한 어른들 중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이 이견 없이 호칭했던 ‘어머니’도 떠나셨다. 그리고 벌써 1년이 되었다. 1년 동안도 많은 노동자들이 죽고, 터지고, 깨지고 상처받았다. 어머니의 부재로 상처는 더 쓰리고 쓸쓸했다. 9월 3일 오전 11시, 마석 모란공원에는 400여 명의 추모객이 모였다.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준비한 대형버스를 타고 온 민주인사들, 전태일의 친구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관계자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그리고 얼마 전 회사가 고용한 용역에 의해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안산의 SJM노동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그들의 티셔츠 ..
‘버티는 삶’ 투쟁 2,000일, 콜트 · 콜텍 노동자들 글 장남수_원풍노조, 등 집필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마친 콜트악기 노동조합 방종운 위원장의 부인 이쌍심(56세)씨의 눈은 피로에 젖어 있었다. 간병인 일을 한지 벌써 8년. 24시간 맞교대를 하고 나오면 잠을 자야 하는데 여름에는 방이 더워 잠들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대충 집안일을 하며 낮 시간을 버틴 후 저녁을 먹고 이른 잠을 청한다. 남편 회사가 ‘위장 폐업’을 한지 딱 2,000일이 지났다. 3천만 원의 융자 빚이 남아있는 작은 빌라는 자칫하면 넘어갈 지경에 있고, 대학을 간신히 졸업한 두 자녀의 학자금 대출도 1천만 원 이상 남아있다. 사람들이 “그런 대학도 있었어?” 라고 말하는 대학을 졸업한 스물아홉 살 아들은 한 달에 실 수령액 ..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깃발이었던 대우조선노조 백순환 글 장남수 (원풍노조, 등 집필) “참으로 긴 굴종과 침묵이었다. 인간이기를 거부당한 사람들의 기계적인 행진이었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그렇게 긴 세월 이어져 온 체념과 절망, 그 아득한 무기력……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부여잡은 삶의 집념은 뇌성벽력과도 같이 우리 삶을 강타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기계일 수 없었다. 노동자! 그 찬란하게 빛나는 이름 앞에서.” - 92년, 대우조선노동조합 발행 사진 자료집에서 1987년 그 뜨겁던 여름에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해’ 잠시 기계를 끄고 깃발을 들었다. ‘노동조합결성’ ‘기본급 12만원 인상하라’ ‘김우중은 각성하라’……깃발들 사이로 ‘전태일 열사정신을 계승하자’도 펄럭였다..
노동운동이 바탕 된 ‘소통가족’ 글 장남수 (원풍노조, 등 집필) “대학 다닐 때 학생회활동을 하면서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시위현장의 분위기가 치열해지고 전경들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무서움이 밀려오더라고요. 나는 이렇게 무서운데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경찰서에 끌려 다녔던 엄마는 어땠을까? 살면서 순간순간 엄마 아빠의 젊은 날을 상상하게 돼요.” 청계노조 최현진(조사통계부장) 조미자(대의원)씨의 딸 최하나(28세, 직장인) 양은 엄마 아빠의 노동운동경력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동생까지 네 식구가 사회를 보는 시선이 닮아 있고 공감 영역이 같은 ‘소통 가족’이다. - 부모의 노동운동 내용은 언제 알게 되었을까? 어릴 때는 몰랐어요, 고등학교 때던가 옛날 앨범에서 엄마 아빠의 청년시절 사진을 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