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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이 바탕 된 ‘소통가족’ 본문

민주화운동이야기/민주화운동이야기(노동운동사)

노동운동이 바탕 된 ‘소통가족’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6. 12. 17:55

노동운동이 바탕 된 ‘소통가족’


글 장남수 (원풍노조, <빼앗긴 일터> 등 집필)



“대학 다닐 때 학생회활동을 하면서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시위현장의 분위기가 치열해지고 전경들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무서움이 밀려오더라고요. 나는 이렇게 무서운데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경찰서에 끌려 다녔던 엄마는 어땠을까? 살면서 순간순간 엄마 아빠의 젊은 날을 상상하게 돼요.”

청계노조 최현진(조사통계부장) 조미자(대의원)씨의 딸 최하나(28세, 직장인) 양은 엄마 아빠의 노동운동경력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동생까지 네 식구가 사회를 보는 시선이 닮아 있고 공감 영역이 같은 ‘소통 가족’이다.

- 부모의 노동운동 내용은 언제 알게 되었을까?

어릴 때는 몰랐어요, 고등학교 때던가 옛날 앨범에서 엄마 아빠의 청년시절 사진을 보는데 엄마가 이야기해 주시더라고요. 전태일 이야기를 시작으로 청계노조에서 함께 운동했던 분들이라며 이분은 누구, 이분은 누구 하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들려 주셨고요. 엄마아빠도 어린 시절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기분이 묘했어요. 엄마가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셨기 때문에 자부심도 느꼈고요. 대학 다닐 때 학생회 활동을 했던 것도 그 영향일지도 모르겠어요.

- 지금도 신당동에서 부모님이 의류제작 사업을 하시는데 청계노조 분들을 뵙기도 하는지?

다른 친구들은 엄마친구 잘 모르는데 저는 자주 뵈어요. 공장에 오시면 엄마가 소개해 주시고 같이 밥도 먹고 해서 친척 같은 느낌을 받아요. 어릴 때, 청계노조의 엄마친구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어린이대공원에 가신 적이 있어요. 그때 저를 포함하여 아이들 열 명이 떼로 몰려 놀다가 한꺼번에 실종(?)되어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지요. 자주 만나서 놀았던 것 같아요. 지난 해 이소선 어머니 장례식장에도 갔고요. 생전에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친할머니 같았는데 뵙지 못한 아쉬움을 마지막 길에서 사진으로만 뵈었네요. 아, 그날 장례식장에서 대학 때 학생회 활동했던 선배를 만났어요. 그 선배는 멀리 경기도에서 문상 왔다가 저를 보고 ‘아, 그래, 네가 그때 청계노조에 대해서 말했었지’ 라고 하더군요. 제가 대학 때 청계노조 이야기를 하고 다녔더라고요.



- 지금 직업에는 만족 하는가?

어릴 때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의사라는 직업이 좋아도 보였지만 사람을 치료하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공부할 때는 형편도 어려웠고 현실적인 이유들로 평범한 직장에 취업을 했어요. 회계 관련 업무인데 적성에 맞는 것 같기도 해요.

- 아빠가 노동조합의 조사통계부장으로 일하실 때 매우 꼼꼼하고 완벽하게 일하셨다던데 역시 ‘피는 못 속인다?’

실은 아빠가 조사통계부장을 하셨다는 것은 방금 알았는데 저도 깜짝 놀랐어요. (웃음) 국어, 일본어, 한문 등 언어공부를 계속하고 있는데 외국인노동자들이나 다문화가정의 자녀들과 함께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 직장의 환경은 어떤지?

내가 학생이던 나이에 부모님은 공장에서 일하셨고 노동운동으로 사회를 많이 변화시켰다고 생각해요. 부모님들 덕분에 많이 좋아진 거지요. 그럼에도 근로계약서를 일 년에 한 번씩 재계약하는 문제도 있고(비정규직은 아닌데), 퇴근시간 이외에도 늦도록 일하는 경우나 휴일에도 일해야 하는 적이 있지만 연봉제라는 이유로 수당이 전혀 지급되지 않는 등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이 많아요.

이 대목에서 조미자 씨가 거들었다.

“하나가 일하는 직장이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괜찮은 곳이지만 내 눈에는 부당한 것이 많아서 때때로 분통이 터져요. 퇴근하고 온 하나랑 막 회사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성토를 하곤 해요. 그나마 딸의 사정을 이해하고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이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도 하지요. 내가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눌 수 없는 이야기들이잖아요. 밤 열두시에라도 맛있는 음식 만들어 먹으며 가족끼리 할 이야기가 많아요.”

하나 양도 엄마를 거들었다.

“뉴스 보다가도 동생이랑 식구 넷이서 같이 흥분해요. 우리 집은 선거 날 투표 안하면 역적이 되요.(웃음)”

조미자 씨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요즘 우리는 정보가 늦으니까 딸들이 인터넷으로 후보에 대한 정보를 종합해서 인물 평가를 하고 넷이서 토론을 벌여요. 지난해 을지로를 지나가는데 반값등록금쟁취 투쟁을 하던 학생이 경찰에게 쫓겨 화단으로 뛰어들다가 끌려가는 것을 보았어요. 저런 일은 어른인 우리가 해야 하고, 우리가 아이들이 편히 공부하도록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아이들이 저렇게 고통 받는구나 싶어 마음이 내내 아프더라고요.”

- 정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최근 통합진보당 문제는 어떻게 느꼈는지?

저도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던 적이 있거든요. 답답하죠. 언론의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이럴 수가 있나 싶어요. 배신감도 느끼고 정치 환멸도 커지고…… 엄마가, ‘가서 뒤집어 엎어버려!’ 하고 소리치더라고요.

- 하나 네의 가정 내 민주주의는 잘 이루어지고 있을까?

어릴 때는 비민주적이라고 느낀 적도 꽤 있는데요, 그래도 크게 강압적이지는 않았어요. 엄마는 말도 함부로 안하셨거든요. 강제로 뭘 시킨 적도 없고. 우리 가정이 국가화 된다면 좋은 국가일거예요.

- 혹시 종교는? 있다면 선택한 이유는?

부모님이 기독교이니까 자연스럽게 기독교신앙을 가지게 되었네요. 신앙을 가지면서 얻게 되는 장점은 친화력과 긍정적인 사고라고 생각해요. 아직 결혼을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결혼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과 하려고 해요. 그리고 내가 엄마아빠의 삶을 본으로 살아왔듯이 나도 본이 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조미자 씨는 하나 양이 소위 ‘사춘기’도 없이 자라주었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때에도 부모가 힘들게 일하는 걸 오히려 안쓰러워하며 화장대 위에 ‘엄마 아빠, 힘내세요, 나중에 효도할게요.’ 라고 편지를 올려놓기도 했다고. 결혼 후 아이들 키우느라 사회적인 활동은 못하지만 늘 청계노조 사람들과 인연을 지속하며 사는 것이 힘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도 잘 자라 준 것 같아 고맙다고. 그들 부부가 일하는 공장 안에는 켜켜이 쌓인 옷감들 옆에 큰 양파자루가 두개나 있었다. 웬 양파를 이렇게 많이? 알고 보니 조미자 씨는 공장에서 일하는 중간 중간에도 식구들을 위해 양파즙을 만들고 장아찌를 담고 한밤중에도 감자탕을 끓이는 등 일중독이라고 느낄 만큼 부지런했다. 결혼 후 한 번도 손에서 일을 놓은 적이 없고 심지어 아이를 낳은 직후에도 일을 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대개 그렇긴 하지만 청계노조에서 일한 분들을 만나면서 한결같은 공통점을 발견했다. 거의 하나같이 억척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산다는 것.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투쟁을 하든, 거의 목숨 걸다시피 한다. 때때로 그 많은 내용을 소화해내는 그들을 보며 ‘다른 건 두고라도 체력이 되요?’ 라고 물은 적이 여러 번 있다. 오늘 또 다시 반복한 질문은 그 답을 찾았다. 자리를 함께 했던 청계노조의 이숙희 씨가 말했다.

“한사람의 목숨과 바꾼 노조잖아요. 전태일의 죽음을 뿌리로 두고 시작한 노조라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죽음에 비하겠느냐 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친구의 목숨을 딛고 노조를 꾸린 선배들이 그렇게 본을 보였고 후배들도 그게 당연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일상생활도 치열성이 체화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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