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이야기/민주화운동이야기(노동운동사) (15)
함께쓰는 민주주의
어디에나 일 잘하는 막내들이 있다. 글 이경은 / kayklee@empas.com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구가협(구속자가족협의회)의 탄생 1974년 4월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인혁당재건위(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만으로 1,034명이 검거되어 183명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계 23명 중 8명이 사형을,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를 각각 선고받았다. 이 사건에서 변호사 강신옥은 "피고인석에서 그들과 같이 재판을 받고 싶은 심정"이라는 요지로 변론을 하다가 세계 사법사상 처음으로 변론 중인 변호사가 법정에서 구속되는 사례를 남겼다.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사건이 발표되고, 밤 10시를 기해 공포한 긴급조치 4호는..
전태일의 흔적 따라, 길을 걷다.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밤새 내린 비로 고속도로는 젖어있었다. 전태일! 그가 살았던 흔적을 따라 나선 오월, 비에 젖은 신록은 연둣빛으로 고왔다. 전태일기념재단의 12인승 승합차에 가득 끼어 앉은 전태일의 후예들은, 노동자의 자긍으로 부활한 선배가 나고 자란 땅을 밟는다는 사실에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박계현 사무총장도 호흡을 조절하며 비오는 고속도로를 달렸을 것이다. 서울을 벗어나면서부터는 다행히 비는 잦아들기 시작했고, 대구에 도착했을 때는 걷기 좋은 날씨였다. 전태일이 태어난 동산동 311번지 일대는 은행나무가 들어 찬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공원입구에는 ‘바르게 살자’ 라는 표지석이 버티고 있었다. ‘바르게’ 사는 ..
놓지 않는 ‘생각’, 노동이 빛나는 꿈 - 원풍노조 손선례 씨 -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나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집의 일꾼이었어요. 열여덟 살까지 내 등에는 동생들이 번갈아 업혀있었고 빨래, 청소, 아버지 리어카 잡아주고 밭일에 나뭇단 정리……” 손선례(1959년생)의 일은 끝이 없었다. 오재미니, 고무줄놀이니, 그런 건 하나도 못했다. 늘 등에 애가 업혀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고 싶어 잠시 아기를 내려놓고 뛰었더니 그새 애가 흙이랑 뭘 집어 먹고 캑캑 거려 들쳐 업고 뛰어야 했다. 아버지의 아들 욕심에 딸이 여섯, 막내로 아들 하나가 나올 때 까지 줄줄이 여섯 동생이 그녀의 등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매일 욕하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었다. 공책이 다 떨어져 가면 심장이 벌렁..
한국사회의 ‘꼽추’들, 종탑위에 오르다. - 재능교육 노동자, 오수영, 여민희씨 -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미워 미워 미워……” 카카오톡 화면에는 열다섯 번의 ‘미워’와 화난표정 이모티콘이 떴다. 엄마에게 그렇게 카톡을 날린 후 아홉 살 아들은 엉엉 울었다고 했다. 오수영 씨는 설 명절을 며칠 앞둔 지난 2월6일 아침, 편지 한 통을 적어두고 집을 나섰다. 회사와의 싸움을 시작한 지 1875일째 되는 날이었다. 철벽같이 버티고 서서 꿈쩍을 하지 않는 싸움에 돌파구를 찾아야했다. 재능교육본사와 정면으로 마주 서 있는 혜화동성당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온 몸의 기를 끌어 모아 다짐했다. 이겨야 해.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가족들의 양해를 구하고 종탑으로 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삶의 지침이 된 ‘나 이제 주인 되어’ 글_장남수/ jnsoo711@hanmail.net “엄마의 삶은 불꽃같았다. 엄마의 흔적을 되짚어 가다보면 열기가 느껴진다.” 고 이옥순 씨 (원풍노조 총무, 서울노동운동연합 부위원장 등)의 딸 권다정(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2)은 그 온기로 엄마 없는 어린 날을 견뎠고 건강한 대학생이 되어있다. 통일혁명당 사건 장기수 출신(권낙기 씨)인 아버지와 노동운동가였던 엄마의 삶은 딸 다정에게 어떤 줄기를 형성했을까. 엄마가 남긴 것은? 내가 막 열 살이 되던 2001년 2월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후 성당에서 기도하는 시간 외에도 해를 보고도 달을 보고도 늘 기도했고, 마지막에는 꼭 ‘엄마’를 부르면서 마무리했다. 엄마는 나에게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광장무대에 선 70년대 민주노조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 신화의 허구- 글_ 장남수/ jinsoo711@hanmail.net 나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7남매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가지고 있던 땅을 모두 친일파에게 빼앗겼고 이후 자식들에게 한평생 미안해하셨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주인집 언니를 따라 평화시장으로 갔다. 7번 미싱사는 나에게 “시다 해봤니” 물었고 나는 “네, 해봤어요.” 라고 거짓말을 하고 취직이 되었다. 내 나이 13살에 나는 ‘공순이’가 되었다. (청계피복 노조 신순애, 57세) 열세 살 ‘공순이’는 이제 쉰일곱 살 황혼기가 되어 40년도 넘은 그날을 되짚고 있다. 연기자들이 마임으로 그의 삶을 재현하는 무대 위로 신순애 씨의 자분자분한 음성과..
“전설속의 누님” 순댓국집 임선호 씨 글 장남수/ jinsoo711@hanmail.net 올해로 꼭 30년, 해마다 9월이면 ‘그날’을 떠올리며 전국에서 한 공간 안으로 모여드는 여성들이 있다. 제주, 강릉, 광주, 대구, 멀든 가깝든 만사를 제쳐놓고 바람난 처녀처럼 달려가는 그곳, ‘원풍동지’모임이다. 그 모임에 30년 동안 단 한해도 결석하지 않은 임선호(53세)씨를 만나기 위해 조치원의 ‘무봉리 순댓국’으로 찾아갔다. 25년 경력의 순댓국 뽀얀 국물에 직접 담근다는 맛깔스런 김치 걸쳐 먹으니 환절기 감기가 뚝 떨어져나가는 듯 했다. 임선호 씨는 1975년 열여섯 살에 원풍모방에 입사했다. 양성공 교육을 받으면서부터 언니들에게 노동조합이야기를 들었고 자신이 입사하자마자 유니언숍 제도에 의해 조합원이 ..
이소선어머니, 1주기 추도식 글 장남수_원풍노조, 등 지난해는 특히 민주화운동의 전선에서 큰 역할을 하셨던 귀한 어른들 중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이 이견 없이 호칭했던 ‘어머니’도 떠나셨다. 그리고 벌써 1년이 되었다. 1년 동안도 많은 노동자들이 죽고, 터지고, 깨지고 상처받았다. 어머니의 부재로 상처는 더 쓰리고 쓸쓸했다. 9월 3일 오전 11시, 마석 모란공원에는 400여 명의 추모객이 모였다.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준비한 대형버스를 타고 온 민주인사들, 전태일의 친구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관계자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그리고 얼마 전 회사가 고용한 용역에 의해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안산의 SJM노동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그들의 티셔츠 ..
‘버티는 삶’ 투쟁 2,000일, 콜트 · 콜텍 노동자들 글 장남수_원풍노조, 등 집필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마친 콜트악기 노동조합 방종운 위원장의 부인 이쌍심(56세)씨의 눈은 피로에 젖어 있었다. 간병인 일을 한지 벌써 8년. 24시간 맞교대를 하고 나오면 잠을 자야 하는데 여름에는 방이 더워 잠들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대충 집안일을 하며 낮 시간을 버틴 후 저녁을 먹고 이른 잠을 청한다. 남편 회사가 ‘위장 폐업’을 한지 딱 2,000일이 지났다. 3천만 원의 융자 빚이 남아있는 작은 빌라는 자칫하면 넘어갈 지경에 있고, 대학을 간신히 졸업한 두 자녀의 학자금 대출도 1천만 원 이상 남아있다. 사람들이 “그런 대학도 있었어?” 라고 말하는 대학을 졸업한 스물아홉 살 아들은 한 달에 실 수령액 ..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깃발이었던 대우조선노조 백순환 글 장남수 (원풍노조, 등 집필) “참으로 긴 굴종과 침묵이었다. 인간이기를 거부당한 사람들의 기계적인 행진이었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그렇게 긴 세월 이어져 온 체념과 절망, 그 아득한 무기력……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부여잡은 삶의 집념은 뇌성벽력과도 같이 우리 삶을 강타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기계일 수 없었다. 노동자! 그 찬란하게 빛나는 이름 앞에서.” - 92년, 대우조선노동조합 발행 사진 자료집에서 1987년 그 뜨겁던 여름에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해’ 잠시 기계를 끄고 깃발을 들었다. ‘노동조합결성’ ‘기본급 12만원 인상하라’ ‘김우중은 각성하라’……깃발들 사이로 ‘전태일 열사정신을 계승하자’도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