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문익환 (5)
함께쓰는 민주주의
늦봄 문익환과 봄길 박용길의 길을가다 : 통일의 집,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한빛교회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늦봄이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 후 프린스턴 대학으로 돌아가 신학 석사 학위를 받고 맡은 자리가 한신대 교수였다. 봄길 박용길 역시 이곳 사택에서 오래 살았고 한신 부인회를 조직해서 장학사업, 빈민구제, 탁아소 운영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다. 이어질 민주화 운동의 ‘예행연습’이 된 셈이다. 슬하의 3남 1녀 역시 이곳에서 성장했다. 김용옥 교수가 너무나 아름답다고《노자와 21세기》에 찬사까지 남긴 수유리 계곡은 지금 복개되었고 ‘ㄴ’자 형의 강의동도 철거되고 새로 지어져 옛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옛 강의동은 늦봄의 영결식 때 걸게 그림이 걸려 있었던 건물이어서 더..
도쿄의 늦봄 문익환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이 나라가 한국 역사 특히 현대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한국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역사에도 적지 않은 무대를 제공한 나라이기도 하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진 곳도 도쿄가 아닌가! 하지만 1994년 1월 18일 세상을 떠난 문익환 목사만큼 일본에 많은 흔적을 남긴 민주인사도 드물다. 문익환 목사와 도쿄의 첫 인연은 1938년에 도쿄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사실 학교보다 유학 온 신학생들이 모임인 관동조선신학생회가 그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평생의 반려 박용길을 그 모임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다. [마루노우치 빌딩가] 문익환 목사와 도쿄와의 두 번째 인연은 한국전쟁..
통일의 거목, 늦봄 문익환 1 북한 핵실험이 몰고 온 파장에 세계가 들끓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당장에 핵폭탄이라도 맞은 듯이 분기충천 앞 다퉈 한반도로 달려와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 이행을 위해 우리에게 노골적인 압박을 가하고,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동참과 남북 경협사업의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민족의 안정과 평화와는 거리가 먼 위험한 선택을 그들은 서슴없이 강요한다. 1천 번의 핵실험을 한 나라와 호시탐탐 군사대국 핵무장의 기회를 노리는 세계 제일의 경제국이 합작해내는 위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어디 그뿐인가. 나라 안이 온통 싸움판 형국이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정치적 이해와 냉전의 찌꺼기들이 되살아나 서로 부딪치고 있다. 금강산 관광사업과 개성공단사업을 퍼주기로 몰아 그간의 남북..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의 한 길에서 시대를 이끌어 온 [이승환] 고 문익환 목사님이 정부의 허가 없이 방북을 결심했던 1989년 즈음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시의 일부이다. 이렇듯 북한을 방문하는 일이 잠꼬대같이 들리던 그리고 이를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남북간의 완고한 대결과 냉전체제는 불과 4년 전 6·15공동선언 이후에 결정적으로 이완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제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적인 교류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 시대정신을 먼저 호흡하고 온갖 어려움을 헤치며 이를 우리 사회의 도도한 흐름으로 만들어 온 사람들이 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에서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승환(46) 씨도 그들 중 한 사람이다. 그를..
통일의 거목, 늦봄 문익환 2 이 글은 2003년 에 실렸던 글입니다 20세기는 레닌이 예견했듯이 전쟁과 혁명의 폭력의 세기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세계는 냉정하게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져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식민지 쟁탈전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사이의 체제전쟁, 제국주의에 대한 식민지의 민족해방전쟁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미국과 소비에트연방으로 대표되는 두 진영은 막대한 힘으로 이 세기를 지배했다. 그들은 부지런히 세계를 이념에 따라 찢어 가졌고, 진영의 유지를 위해 반목과 충돌을 원격 조정하기도 하고 손수 전쟁을 이끌었다. 대한민국은 그러한 힘들이 각축한 몇 안 되는 시범 국가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20세기는 일본제국의 침탈로부터 시작되어 겨레의 분단으로 이어지는 특이한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