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기념관/역사기념관_해외 (20)
함께쓰는 민주주의
미술관, 현대 건축의 진정한 챔피언 진화하는 미술관들 글·구본준 bonbonhani.co.kr 미술관이 현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로 떠올라 건축의 풍향계 역할을 하게 된 이유는 새로운 시도와 파격을 실험하기 가장 좋은 장르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처음 등장한 이래 거의 100년 동안 ‘하얀 상자’를 벗어나지 않았다.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 자체가 그대로 건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미술관들은 이전 미술관 건축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미술작품을 보관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작품 같은 기능을 하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관 건축을 시도한 것이다. 건축에서 새로운 스타일이나 사조의 등장을 가장 먼저, 가장 대표적으로 시험하는 건물들은 십중팔구 미술관들이 됐다. 특히 건물 외관의..
비극에서 피어난 놀라운 건축들 글·구본준 bonbonhani.co.kr 1941년 11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작은 도시 코번트리를 방문했다. 주변을 돌아보는 처칠의 얼굴은 침통 그 자체였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1월14일 밤 독일군의 공습으로 코번트리의 자랑이자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히던 성 마이클 성당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11세기에 지어져 900년 넘게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던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의 위용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고, 벽과 탑 일부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전쟁이란 초 비상상태에서 나라를 이끌던 처칠이 직접 파괴 현장을 찾아갔을 정도로 성 마이클 성당의 붕괴는 당시 영국에 큰 충격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5년이 더 지나 성당이 파괴된 지 9년이 흐른 1950년, ..
영광과 상처가 공존하는 곳, 앵발리드와 군사박물관 박신의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질문 프랑스 파리에 소재한 군사박물관(Musee de l'Armee)은 일반적으로 앵발리드(Invalide)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앵발리드 내에 군사박물관이 있는 셈이다. 군사박물관은 군대와 전쟁에 관련한 컬렉션과 자료들을 모아 근대에 들어서 기반시설로 만들어낸 것이고, 앵발리드는 루이 14세 이래 군사기관의 형태로 이어져 온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박물관 자리는 바로 군사문화와 역사가 남아있는 장소로 지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기념관이 위치하는 데는 역사적 장소(site)를 입지조건으로 한다는 원칙이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나왔다는 군사학..
슬픈 현대사를 담고 있는 타이페이 2·28기념관 박강배 (사)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연구실장 타이완 현대사의 슬픔은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시작된다. 청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뒤 타이완은 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해방 후에도 독립은 이뤄지지 않았다. 또 이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옮겨온 국민당 정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일제 50년 식민통치 동안 타이완은 작은 일본으로 살았고, 해방 직후부터 국민당 통치기간 50년은 북벌통일론에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타이완의 독립이냐 통일이냐’,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대륙의 중국 정부와 타이완 정부, 그리고 타이완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얻어진 ‘차이나 타이페이’라는 국제적 부호에는 타이완의 슬픈 역사가 담겨있..
되돌아 반성케 하고 힘을 주는 남경대학살기념관 박강배 (재)5·18기념재단 사업부장 1946년 5월, 도교, 극동국제군사법정, 제2차 세계대전 전범재판소에 증인으로 출석한 미국인 존 그레스피 머기 목사가 일본군들이 중국 평민들을 대상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증언하고 있다. 이 재판은 적어도 2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었음을 밝히었고 남경학살 직접 책임자 마츠이 세네키등 전범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남경대학살 사건은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6주 동안 일본군들이 남경에서 중국인을 비열하고 잔인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학살당한 숫자는 약 3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집단총살, 일본도(刀)로 목베기, 총검으로 찔러 죽이기, 불태워 죽이기, 집단 생매장,..
군의 논리와 민의 논리 일본의 전쟁기념관과 평화기념관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 교수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는 엄청나게 많은 기념관이 있다. 따라서 그 기념관들을 모두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여러 곳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도 많지 않다. 필자도 단지 몇 군데 밖에 보지 못했다. 따라서 이 소개는 매우 제한적인 부분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념관들이 과연 어떤 목적에서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일반 대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동시에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초점은 각 나라의 역사적 경험에 따라 다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 내의 어떤 세력이 어떤 방향으로 역사적 기억의 방향을 이끌고 가고 하는가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진다. 일본의 기념관 중에서 우..
미국 국립기록관리청과 포드 · 카터 대통령기록관 이상민 (정부기록보존소 전문위원) 미국에서 공공 역사기록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것은 1936년 수도 워싱턴DC에 국립기록보존소(National Archives)가 설립된 후이다. 국립기록보존소는 그때까지 각 부처에 방치되어 있던 연방기록을 수집하여 수도 워싱톤DC에 건립된 국립기록보존소 건물(현재 Archives I)에 보존하기 시작했다. 1945년에는 최초의 연방기록물센터(Federal Records Center)가 설립되었다. 연방기록물센터는 연방정부의 비활용 기록물을 초기 단계에서 폐기하는 역할과 영구보존 연방기록을 국립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 Records Administration)으로 이관하는 중간 수집 거점으로서 설..
기념관이 갖는 가장 큰 어려움이라면, 바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게 만드는가에 있다. 대개 기념관은 여러 자료들을 동원하여 그 기억을 만들어주지만, 자료만으로는 역사적 상상력을 증폭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료란 과거의 기억이고 증언이지만, 그것으로 역사적 체험을 대체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 역사를 직접 살아보지 않은 후대들에게 기억을 살려내면서 역사적 인식으로 전환하기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후손들은 역사적 체험이 아닌 자료로 역사를 그려가야 하는데, 그 자체가 매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역사란 정확한 기록과 자료를 통해 가능하다지만, 그래서라도 여전히 기념관은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역사적 체험에 준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바로 기념관이 처한 난관인 것이다.그런 ..
이야기 형식으로 기억을 들려주는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 독일 영화 한 편이 최근 독일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9월에 개봉하여 개봉 5주 만에 독일에서 341만여 명이 관람한 이라는 영화는 히틀러의 쉰여섯 번째 생일인 1945년 4월 20일부터 열흘 뒤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그가 자살하기까지의 마지막 삶을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되는 이유는 독재자로서의 히틀러 모습보다 그의 인간적인 측면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는 데 있다. 왜소하고 측은한 이 독재자의 모습은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지 모르나 역사적인 과오를 감정적으로 덮어버리려는 위험한 시도로 비춰지고 있다. ‘신나치주의’를 표방하는 극우정당들인 국가민주당(NPD)과 독일국민연합(DVU)이 지방의회에서 약진하며 기세를 올리는..
파리 죠루즈 퐁피두센터 프랭크 맥코트 가족은, “자유의 여신상에 헬로’라고 인사하는 대신에, ‘굿바이’ 하고 손을 흔들며” 뉴욕 항을 떠나는 배에 몸을 싣고 있었다. 부루클린에서 태어난 프랭크는 이제 겨우 네 살, 그의 부모는 아이리쉬 이민세대였다. 대공황이 휩쓸던 1930년대, 뉴욕 슬럼가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아일랜드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세월이 흐른다. 갖은 고초 끝에 청년으로 성장한 프랭크는 풍운의 꿈을 안고 다시 뉴욕 행 증기선 호의 갑판 위에 서 있다. 드디어 희망의 횃불을 높이 쳐든 자유의 여신상이 점점 가까워온다. 이 이야기는 가난한 아이리쉬 가톨릭이었던 작가 프랭크 맥코트(Frank McCourt)의 자전적 성장 소설로, 1997년 퓰리처 문학상을 수상한 ‘안젤라의 재(Angela’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