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이야기/내가 만난 70년대 (19)
함께쓰는 민주주의
죽은 언론의 사회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글·송기역 songazzinaver.com 2008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정동익은 오래 전 자신이 몸 담았던 동아일보사 앞에 서 있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동아일보는 쓰레기다!”라며 야유를 보냈다. 한때 국민들이 가장 사랑했던 신문 동아일보는 젊은 시절 그와 동료 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자유 언론’이 아니었다. 그는 차마 더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36년 전의 일이다. 1975년 3월 17일.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기까지 그는 입사7년차의 동아일보 기자였다.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 동아일보사 안에는 시노트 신부와 87명의 사원들이 2층(공무국), 3층(편집국), 4층(방송국)에서 5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이중 2층에 있는 23명의 기..
아름다운투정 - 가톨릭노동청년회 글·송기역 songazzinaver.com 『요셉 조성만 평전』을 탈고할 무렵, 박순희(아녜스)를 만났다. 사람들은 그 이를‘선한 싸움꾼’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만난 곳은 향린교회 목회실이었 다. 향린교회에서 판넬골목을 지나 백여 미터 오르면 그이가 숱하게 드나들 었던 명동성당이 있다. 박순희는 매일 명동성당에 들른다. 성당에 가면 추위 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각을 하는 문정현 신부가 있다. 그이는 문정현 신부와 함께 침묵과 기도로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서 죽어가는 생명들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의 만남은 70년대에 인권변호사로 거듭난 이돈명 변호사의 선종으로 하 루 연기되었다. 만나자마자 박순희는‘커다란 동지를 또 한 명 잃었다’고 애석 해했다. 우리의 대화는 이..
모든 것은 한 편의 글에서 시작되었다 -고려대학교 서클 한맥 글·송기역 songazzi@naver.com문제가 된 글은 한맥 6호에 실린, 광주대단지 실태를 고발한 르포르타주 「광주는 죽지 않았다」이다. 80년 5월의 광주가 아니다. 김영곤과 함상근 등 고려대 서클 한맥 회원들은 경기도 광주에 찾아가 한 편의 글을 쓴다. 광주에서 그들이 들은 것은 한 여성의 죽음이었다. 쫓겨난 철거민들의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임산부가 분만한 아기를 삶아 가족의 아사를 면할 수밖에 없었다는 놀라운 참상이 바로 다른 곳이 아닌 광주단지에서 일어났다. 뉴스메이커 556호에서 한맥 회원 조상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청계천 주변의 인쇄공이었던 한 가장이 아내가 허기에 지쳐 ..
미완의 과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해방 60년 [윤미향] 해방 60년을 맞은 올해도 어김없이 8월이 찾아왔다. 동양에서 60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인지 예년과 다르게 많은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기억해야 하는 여러 사건들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위안부) 문제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벌써 670여 회를 거듭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에서의 ‘수요시위’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통한의 세월을 상징하고 있다.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열어온 ‘수요시위’에는 매번 50여 명이 참석하고 있다. 내외국인 참가자가 계속 바뀌는 ‘수요시위’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내외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위안부 범죄를 국내외에 알..
개정 국적법과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 [홍세화] 얼마 전 국적법 개정을 둘러싸고 나라 전체가 어수선했고, 일방적이었지만 논의도 뜨거웠다. 법안을 발의했던 한나라당의 홍준표 의원은 대표적인 보수 정치인으로, 그의 지지층은 한쪽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이 법안 발의를 통해 전국의 모든 지역과 계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단연 돋보이는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개정 국적법의 핵심은 ‘직계존속이 외국에 영주할 목적으로 출국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국에서 출생한 자는 병역 의무를 치렀거나 면제 처분을 받은 때, 제2 국민역에 편입된 때 등에 한해 국적이탈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즉 원정 출산자의 자녀 뿐 아니라 외교관, 상사 주재원, 유학생 자녀들의 병역 면제를 목적으로 한 국적 포기가 사실상 ..
도시산업선교위원회(산선)은 산업사회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한 화해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활동해 왔다. 산선은 ‘공장을 중심으로 하는 전도활동’과 ‘노동하는 목회자 프로그램’을 통하여 노동자와 함께 노동함으로써 그들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질서를 익히고 교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여 산업사회와 교회가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공장에서 노동을 함께한 후 공장을 교회로 삼아 수시로 드나들며 노동자들과 대화하여 협력자로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각 공장 노동자들 중 교회에 나가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평신도 활동을 전개하여 이들을 위한 교육과 그룹 활동, 평신도 지도자 훈련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엔지니어와 중간 관리자의 모임을 꾸리기도 하였다. 특히 1964년 이후에는 각..
인권운동의 현장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박래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서 평등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행동해야만 한다.(세계 인권선언 제1조) 프랑스혁명 선언에서 유래하여 1948년 세계 인권선언에 의해 세계적으로 승인되고 공표된 위 주장은 인간의 자유와 권리의 보편성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엄숙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 형성을 향한 기나긴 투쟁의 역사에서 인류가 이룩한 중요한 이정표이자 고귀한 업적들 중 하나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며 존엄함에서나 권리에서나 평등하기에, 이런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은 인종, 성, 종교적 혹은 정치적 입장, 사회적 출신이나 재산 그리고 기타 지위 등의..
10월 26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주 특별한 날이다. 이 날은 70년 간격을 두고 세기의 저격사건이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두 사건 모두 명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당대 최고 권력자를 권총으로 살해한 역사적 ‘거사(擧事)’였다. 1909년 10월 26일은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반침략 거사의 날’이었고, 1979년 10월 26은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반독재 거사의 날’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의미심장하다. 두 사건은 거사의 본질과 방법이 거의 같다. 둘 다 ‘주권회복을 위한 거사’였는데, 안중근의 경우 일본의 침략에 맞선 ‘국가주권 회복을 위한 거사’였다면, 김재규의 경우는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맞선 ‘국민주권 회복을 위한 거사’였다. 처단 대상을 당대 최고..
노동운동의 한길에서 5.18 광주를 당당하게 지킨 [정향자] “여러분 귀청을 찢는 저 총소리가 들립니까? (……)살인집단 공수부대가 도청을 사수하는 우리를 죽이겠다고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몇 시간 후 (……)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살아서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못 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려워 마십시오! 광주 시민이 우리를 기억할 겁니다. 우리의 죽음이 곧 살아 있는 역사로 기록될 겁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과의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열사가 뿜어낸 포효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는 5·18민중항쟁(5·18)은 피의 진압에 의해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5·18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으로 살아 움직였다. 생..
1974년에 한국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1973년 8월 이른바 김대중납치사건으로 국내외 여론이 크게 자극되어 반 유신운동이 활발해졌다. 급기야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를 공포했으며, 같은 해 4월에는 조작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180명 가운데 인혁당 계 23명 중 8명에게 사형이, 민청학련 주모자 급에게는 무기징역이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는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연일 보도되는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 해외동포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조국의 민주화를 돕고자 하였다. 그중에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고통받는 수난자들과 더불어 그 가족이 겪어야 할 생활고에 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