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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인문학 책 읽기 운동으로 새로운 문화를 제시하는 '인서점' 국내 최초의 사회과학 서점 아랫녘에는 단풍이 한창이라는데 서울 한복판 건국대학교 후문으로 가는 길가에 소나무들은 단풍의 절정과 상관없이 일 년 내내 그 모습 그대로 인 듯하다. ‘국내 최초의 사회과학 서점’이 이곳 가로수 길에 있다는데 왠지 소나무와 비슷한 느낌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人), 그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 씨앗이 잘 자라도록 거름을 주는 일, 그래서 인서점이라고 지었습니다.” 인서점의 오랜 주인, 아니 처음부터 주인이었던 심범섭(65세) 씨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저씨마냥 사람 좋은 얼굴로 필자를 맞는다. 인터뷰 시작 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한반도 지도 모양을 본떠 만든 통일놀이 탁자인데..
한껏 퍼붓지도 못하는 장마 같지 않은 장마철 날씨는 ‘덥다’란 표현이 맞지 않다.‘ 후텁지근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서울 시청광장에 형형색색 깃발들이 눈에 들어온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라는 미묘한 역사적 시기 시청광장의 모습은 그래서 더 아이러니하다. 그런 시청광장의 모습 속에서 무려 50여 년 전 소설 의 주인공인 이명훈이 떠올랐다. 소설 속 이명준이 혼란스러워하던 ‘광장’과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저‘광장’을 비유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런지, 이제 그만 저 틀을 벗어나서 화해할 순 없을까. 취재 약속이 돼 있는‘평화3000’으로가는 택시 안에서 잠깐 동안 스친 생각들 때문에 약간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념을 넘어선 인도적 지원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한 건 사실이에요. 북한에서 공식..
IMF 10년이 남긴 것 지난 11월 21일은 김영삼 정권이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신한국당 후예인 한나라당이 창당된 날이기도 했다. 대선을 앞두고 ‘잃어버린 10년’ 타령에만 골몰하는 저들의 모습에선 ‘갱제’ 살리기는 고사하고 쪽박마저 깨버린 지난날에 대한 겸허한 반성도, 자기성찰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여권의 반격도 꼴사납긴 마찬가지다. 지난 10년은 독재와 부패의 고리를 끊어낸 ‘되찾은 10년’이었다는 그들의 주장 속에는, 민주화의 과실을 맛볼 겨를도 없이 IMF라는 철퇴를 맞아 신자유주의의 거센 풍랑에 휩쓸린 국민들에 대한 관심도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 사단법인 한국투명성기구 김거성(49세) 회장은 10년 전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국가..
2007년 늦가을 저녁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대통령의 말대로 가져간 보따리가 부족할 만큼 여러 부문에 걸쳐 성과를 냈다. 한반도 정전체제 종식과 평화체제 전환을 위해 남북한과 미국 등 3~4개국 정상들이 한반도에 모여서 종전선언을 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내용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위한 경협확대 등의 10개항으로 구성된 10·4 남북정상 ‘남북관계 발전·평화번영 공동선언’은 예상을 뛰어넘는 합의 내용을 담았다. 이는 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남북공동평화번영의 실질적 협력과 실천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요즘은 어느 때보다 민족과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누구를 미래의 지도자로 ..
민족의 화해와 공존 가뭄은 지구촌의 가난한 나라들을 헐벗게 하고 지진과 홍수는 때를 가리지 않고 대륙의 곳곳을 파괴하고 있다. 북극의 만년설이 하루에 백만 톤씩 녹아내려 바닷물 수위가 높아지고 그로인해 만년 만에 깨어난 땅속의 박테리아가 살아나 내뿜는 프레온 가스는 지구의 기온을 급격히 상승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재해를 반복시켜 끝내는 지구의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학자들은 경고한다. 얼마 전 비교적 소형 태풍인 ‘나리’가 제주와 전남 고흥 등을 빠져나가면서 우리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연간 강수량의 삼분의 일이 단 며칠 사이에 내려 그 피해 규모도 엄청나 사망·실종자가 수십 명이며 재산 피해만도 150억원이 넘었다. 그러나 그 뒤의 수해복구 상황을 지켜보면 우리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
세계인으로 산다는 것 “「베트남 신부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고발당한 현수막” 어느 일간 신문의 1면 머리기사 가운데 하나다. 요즘 도시를 벗어난 한적한 도로나 시골길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펼침막 광고내용. 선전 문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는 언제부턴가 아주 자연스럽게 외국에서 신부를 수입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있었나 보다. 수입된 신부들은 자주 도망을 갔고 그로인해 그들을 데려온 한국 신랑들이 손해를 본 모양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그런 위험이 없는 믿을만한 나라의 신부를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것이리라. 이 정도면 글로벌 시대의 세계시민이 가져본 퍽 인간적인 뜻풀이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때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6월 14일, 나는 『희망세상』의 취재를..
그때 그 거리 한복판에 나타난 넥타이 부대 - 남을우 야만의 시간 이십 년 전 오늘은 대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에 의해 살해된 사건으로 국민의 분노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광주학살, 고문치사 등 살인도 서슴지 않는 야만적인 정권에 대한 분노가 국민들의 가슴속에 끝없이 들끓었다. 무자비한 탄압에 움츠러들었던 민주화 열기가 다시 고조되었고, 이번에는 너나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거리에 뛰쳐나왔다. 인도와 차도를 메운 시위대가 거대한 물결처럼 움직였다. 땅 위에서는 최루탄과 방패와 곤봉이 함성과 엉켰고, 공중에선 박수와 꽃가루와 염원이 하늘을 뒤덮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진압경찰과 체포조 백골단이 피에 굶주린 이리떼처럼 학생들을 뒤쫓았다. 그러나 시민들은 쫓기는 학생들을..
‘오디세우스’의 귀환 1993년 5월, 윤한봉이 귀국했을 때 공항에 몰려든 기자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5·18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35일 동안의 밀항, 한국인 정치 망명객 1호, 재미동포를 대상으로 한 ‘민족학교’와 ‘재미한국청년연합’ 활동…….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역정은 실로 같은 데서나 소개될 법한 것이었고, 거기에 그의 망명과 미국 생활에 얽힌 전설 같은 일화들이 보태지면서 사람들의 눈과 귀는 12년 만에 귀환한 이 ‘오디세우스’에게 쏠렸다. 다른 많은 운동권 인사들처럼, 이후 그의 행보가 5·18민중항쟁기념 행사장의 상석을 차지하고,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악수 퍼레이드를 벌이고, 대화와 타협과 상생의 21세기를 강조하는 강연으로 이어졌다면 어쩌면 그를 ..
서울 용산역은 고속철도(KTX)가 생긴 이후 서울역과 맞먹는 번잡함이 생겼다. 열차 노선에 따라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것과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것이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력에 써 있는 숫자가 아직은 겨울바람을 느낄 때가 아닌데 KTX 여승무원들이 250일 넘도록 파업을 하고 생활하는 한국철도공사 노조 사무실로 가는 용산역 뒷길은 눈물이 날 정도로 바람이 매섭다. 담을 넘지 못하는 그 두어 평 남짓한 컨테이너 박스에 민세원(34) KTX 열차승무지부장이 전기장판을 깔고 앉은 자리에서 누군가와 쉼 없이 통화중이다. 통화 도중 수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있기 무섭게 핸드폰 벨이 또 울린다. 지난 9월 노동부의 불법 파견 재조사 결과가 ‘100% 합법은 아니지만 종합해보면 적법파견’이라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
초가을 비 굿은 날의 연속이라……. 토요일 낮 경기도 의정부 예술의 전당 광장에는 오페라 공연과 브레히트의 연극 공연, 모차르트를 위한 클래식 공연 등의 커다란 대형현수막 속에 요란하지 않은 작은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띈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위한, 그것도 의정부라는 지역에서 소수자들을 위한 문화제를 한다고 하니 선뜻 그 내용에 심적 동감이 갔다. 악기를 짊어 메고 가는 장애인의 모습도 보이고 민속의상을 입은 외국인 여성노동자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1년에 한 번, 이제 겨우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치루는 문화제인데 속절없게도 비가 내린다. 스스로 소수자가 되어 “비가 계속 와도 모든 행사는 실내에서 예정대로 진행할 겁니다. 문화제에 참석하는 이분들은 오늘을 위해 1년을 기다린 분들이거든요.” 행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