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노동운동 (8)
함께쓰는 민주주의
노동운동이 바탕 된 ‘소통가족’ 글 장남수 (원풍노조, 등 집필) “대학 다닐 때 학생회활동을 하면서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시위현장의 분위기가 치열해지고 전경들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무서움이 밀려오더라고요. 나는 이렇게 무서운데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경찰서에 끌려 다녔던 엄마는 어땠을까? 살면서 순간순간 엄마 아빠의 젊은 날을 상상하게 돼요.” 청계노조 최현진(조사통계부장) 조미자(대의원)씨의 딸 최하나(28세, 직장인) 양은 엄마 아빠의 노동운동경력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동생까지 네 식구가 사회를 보는 시선이 닮아 있고 공감 영역이 같은 ‘소통 가족’이다. - 부모의 노동운동 내용은 언제 알게 되었을까? 어릴 때는 몰랐어요, 고등학교 때던가 옛날 앨범에서 엄마 아빠의 청년시절 사진을 보는데..
노동자 노래의 시작을 알린 글 이은진/ 신나는 문화학교 대표 지금은 써먹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지만, 한때 ‘걸어 다니는 노래책’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던 저는, 얼마 전에도 한 수련회에서 밤새 노래가사를 불러줘야 했습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40대들은 7080의 노래들과 민중가요를 부르고 싶어 했고, 현실을 살아낸 시간만큼 기억이 흐릿해져버려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답답해하는 이들에게 노래방 기계대신 노래가사를 불러주는 일은 투덜거리면서도 즐거운 일입니다. 누구나 그런 시간이 되면 다시 불러보고 싶은 노래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격동적인 한국현대사의 한복판을 살아낸 이들에게 노래는 무슨 역할을 했고, 개인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어있을까요?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사를 다 읊조리진 못하더라도 노래..
울산 현대 노동자 87년 7.8월 대투쟁의 현장을 찾아서 김순천 남목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 아직 겨울의 찬기가 가시지 않은 약간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희미한 오후의 햇살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남목은 남쪽의 말목장이란 뜻이다. 예전에 이곳에 말목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중심과 변두리를 가르는 상징적인 고개였다. 1987년 7.8월 현대 노동자들 수만 명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함께 이 남목 고개를 넘었다. 이 고개를 넘어 시내로 향하면 자신들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일요일 오후여서인지 현대중공업은 조용했다. 평일에는 2만 5천 여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조선, 해양, 프랜트, 엔진기계, 전기․전자 시스템, 건설장비로 나뉘어 일을 하고 있다. 남목 고개를 넘으면 현대 자동차가 나온..
1987년 노동자대투쟁 _민주노조를 세워 낸 학출, 최봉영 글·유경순 youkslifehanmail.net 1987년 7, 8, 9월 노동자들의 투쟁이 울산에서부터 시작해서 남부 지역을 휩쓸더니 중부지역을 거쳐 서울까지 들불처럼 번져갔다. 투쟁의 요구는 임금인상과 근로조건개선을 비롯해서 인간다운 대우, 민주노조인정 등이었다. 경제개발과 근대화의 미명으로 25년 동안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기계처럼 감내하도록 강요해온 시간을 뒤집으려는 듯 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연발생적인 힘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일부 사업장에서는 노동운동가들이 힘을 보태고 있었다. 특히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위원장인 단병호를 배출한 창동지역의 동아건설에서도 1987년 노조결성과정에 학생운동출신 노동운동가(이하‘..
노동운동의 한길에서 5.18 광주를 당당하게 지킨 [정향자] “여러분 귀청을 찢는 저 총소리가 들립니까? (……)살인집단 공수부대가 도청을 사수하는 우리를 죽이겠다고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몇 시간 후 (……)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살아서는 두 번 다시 얼굴을 못 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려워 마십시오! 광주 시민이 우리를 기억할 겁니다. 우리의 죽음이 곧 살아 있는 역사로 기록될 겁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과의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열사가 뿜어낸 포효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는 5·18민중항쟁(5·18)은 피의 진압에 의해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5·18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으로 살아 움직였다. 생..
노동운동의 큰 일꾼, 권종대 2 한 농민의 초상 권종대에 관한 두 번째 글을 쓰기도 전에 그의 임종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쩌면 예견된 죽음이기도 하련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장이라도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쟁쟁하게 울려 퍼질 저 살아 펄펄 뛰는 목소리는 그럼 이제 과거에 속한 것이란 말인가. 그는 자신의 생명이 오직 산소 호흡기를 의지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자식들을 불러 모았다. “그동안 너희들 고생이 많았다. 이 세상에서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여한도 없고 마음도 편하다. 남은 일은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그만 끝내자.” 권종대는 자기 손으로 직접 산소 호흡기를 떼어 냈다. “아버지!” 깜짝 놀란 자식들이 침상으로 달려들면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그는 울부짖는 가족들..
노동운동의 큰 일꾼, 권종대 1 1960년대 초,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관어대 앞들에 한 떼의 청년들이 모를 심으며 뭔가를 신명나게 읊조리고 있다. 들에서 흔히 불리는 노동요나 잡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4·19 혁명의 열기를 무력으로 잠재운 박정희 정권이 대대적으로 재건국민운동 바람을 일으키던 때였으니, 글 모르는 농촌 청년들이 ‘가 자에 기역 하면 각’하고 한글 깨치는 소린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사상계 선언 외우며 모를 심고 자유와 평등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근대적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봉건사회에서 직접 제국주의 식민지사회로 이행한 우리 역사는 세계사의 조류와 격리된 채 36년간 암흑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말살의 역사요, 자기모독의 역사요, 노예적 굴종의 역사였다….’로 시작되..
노동해방의 바윗물 김금수(金錦守) 2 『발이 저리냐?』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정보부 사람들이 한 말이었다. 「한국노총」에 들어가는 골칫거리를 놓고 『밥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하고 운을 떠봤더니, 되묻던 말이었다. 그때에 마흔 줄에 접어든 김금수가 한 대답이 이러하였다. 『발만 저린 게 아니라 온몸이 다 저리다. 당신들이 하는 살인적 고문 앞에서 발 안저릴 사람이 있겠느냐?』 수많은 선배와 동무와 후배들이 죽어나오고 병신 되어 나오는 정보부 수사관들 앞에서 그런 당찬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강철같은 믿음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암장」때 읽었던 레닌의 말이 그 믿음의 뿌리였다. 『인민해방투쟁은 기본계급을 그 밑뿌리로 한 대중토대가 있어야 한다. 기회주의자들의 집단인 어용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