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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노동자대투쟁 _민주노조를 세워 낸 학출, 최봉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7. 23. 14:37

1987년 노동자대투쟁 _민주노조를 세워 낸 학출, 최봉영

 

글·유경순 youkslifehanmail.net

 

1987년 7, 8, 9월 노동자들의 투쟁이 울산에서부터 시작해서 남부 지역을 휩쓸더니 중부지역을 거쳐 서울까지 들불처럼 번져갔다. 투쟁의 요구는 임금인상과 근로조건개선을 비롯해서 인간다운 대우, 민주노조인정 등이었다. 경제개발과 근대화의 미명으로 25년 동안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기계처럼 감내하도록 강요해온 시간을 뒤집으려는 듯 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연발생적인 힘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일부 사업장에서는 노동운동가들이 힘을 보태고 있었다. 특히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위원장인 단병호를 배출한 창동지역의 동아건설에서도 1987년 노조결성과정에 학생운동출신 노동운동가(이하‘학출’) 최봉영이 큰 힘을 보태고 있었다.

동광운수의 노동조합 활동
최봉영은 1973년 고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념 서클에 참여해 학생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1975년과 1980년 학내 시위를 주도하여 두 번의 구속을 당한다. 이후 그는 노동운동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1982년 택시기사로 취업해 1년 6개월의 고된 노동경험을 했다. 그 뒤 그는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1984년 동광운수로 옮겨 활동했다. 이 회사에는 어용노조가 있었는데, 그는 1985년 노조위원장 선거에 참여하면서 노조활동의 계기를 마련한다. 그가 밀었던 후보가 노조위원장이 되면서 그는 부위원장이 되었다.

“운전을 1년 반 했으니 초짜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내가 다른 구역의 택시회사에 들어갔어요. 슬슬 사람들을 만나고 모임을 갖기 시작하죠. 나는 그 사람들하고 술 먹고 어울리는 거는 잘해서 사람들하고 굉장히 친했죠. 그런데 거기에 어용노조가 있어요. 그때 위원장 선거가 있어 기회가 온 거 같아 고민하는데 위원장이 되고 싶은 친구가 하나 있어. 이 친구가 나를 찾아와요. 회사의 고참이 나를 찍어서‘저놈이 널 도와주면 될 거다, 사람들하고 많이 알고 지내니까’라는 말을 듣고. 와서‘한번 해보자’고 그러길래‘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겠소?’그랬더니‘내가 회사 상대로 끝까지 싸우겠다. 절대 배신하는 일이 없다.’이거지. 그래서 당선되면 내가 부위원장 하는 걸로 하고 했지. 나도 노조에서 직책을 가져야 되겠더라고. 그래 이 사람이 아주 간신히 몇 표 차로 당선이 됐어요. 내가 부위원장 했지”

이 때 최봉영은 신분이 노출되었지만 노조간부여서 회사가 쉽게 해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노조 소식지 만들기, 대자보 쓰기 등을 시도하면서 노조를 변화시키려 시도한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엉뚱한 놈이 갑자기 노조위원장이 됐거든, 그니까 캐기 시작한 거지. 경찰에 신원 조회하니 내가 나왔잖아. 날 몰아내려고 했는데 내가 노조 부위원장이기 때문에 쉽지 않으니까 회사에서도 신중히 접근하더라고. 나도 좀 망을 보다가. 그때 노사협의를 하는데 처음으로 내가 포문을 열기 시작한 거지. 그리고 내가 위원장도 선동하면서‘노조 소식지를 냅시다’라고 한 거야. 그래가지고 박노해 시도 갖다 실어놓고. 허허. 회사에서 완전히 발칵 뒤집힌 거지.‘어, 빨갱이 새끼 하나 들어왔다’이거지. 노동자들한테 박노해 시가 잘 먹혀요.‘새벽에 쓴 소주를 마신다’이런 건 택시 운전사들에겐 자기 일이거든. 새벽에 2시, 3시에 끝나고 와서 쓴 소주 마시니까 똑같지. 그때 한 사람이 새벽일 나가다가 사고 나서 두 눈을 다쳐 실명했어요. 그래 내가 수술비 지원을 하자는 대자보를 붙였어, 기사들이 생전 처음 보는 거야. 회사는 무지 싫어하는 거야. 데모하자는 거보다 그런 게 더 나쁜 거야, 왜냐면 사람들 마음을 여는 거니까. 그때부터 회사가 노골적으로 날 싫어하더라고”

최봉영을 쫓아낼 궁리를 하던 회사는 마침내 방법을 찾았다. 그는 위원장의 임명으로 부위원장이 되었는데, 노조규약으로는 대의원대회에서 통과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회사는 최봉영의 부위원장 자격에 시비를 걸었다. 대의원회의 결과, 부위원장직 박탈로 결정이 나자 회사는 바로 그를 해고시켰다. 그는 출근투쟁을 했지만 결국 동광운수를 정리한다.

“회사 공격이 어떻게 들어 오냐면 나한테 들어오지 않고 위원장한테 들어가고 대의원들한테 들어가는 거야. 회사는 내가 부위원장 자격이 안 된다고 시비를 걸어. 노조규약에 대의원회의에서 통과를 시켜야 되는데‘대의원회의 없이 내가 부위원장이 됐다’이거야. 위원장 임명으로. 그래서‘다시 대의원회의를 통과해라’회사에서 요구하고 대의원회의에서‘이걸 추인을 할 거냐, 말거냐?’가지고 싸움이 된 거야. 결국 내가 동의를 못 받은 거야. 그러나 회사는‘자격이 없는 놈이 노조를 선동했다. 조합원들을 선동했다’이렇게 된 거 같애. 그 다음날 바로 해고 됐어. 차를 안주더라고. 그래서 내가‘왜 차를 안 주냐?’고 대판 싸우고. 다들 뭐 안타깝지. 같이 싸우자니 힘이 없고, 허허, 자기들도 먹고 살아야 되는데 그걸 어떡해. 친목회도 있었지만 나를 따라올 수가 없지. 그래 점심 교대시간에 내가 유인물 배포하고 ‘나는 여러분들 미워하지 않는다’어쩌고 하고 나왔지. 힘이 열세인데 어쩔 수 없죠.”

1987년 8월, 동아건설에 세운 민주노조
최봉영이 다시 찾아간 곳은 같은 지역의 동아건설이었다. 1987년 2월 쉽게 입사했지만 노동강도를 견디는 것이 문제였다. 동아건설은 노동강도가 너무 세서 많은 노동자들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동이 심한 곳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한 달 일했으나 허리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차츰 노동에 익숙해지고 기술을 익히거나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인간관계를 넓혀나갔다. 그러던 1987년 7월 즈음 단병호가 최봉영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와 함께 노조결성을 할 것을 제안한다. 단병호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은 이미 3~4월경부터 물밑으로 노조결성 준비를 하고 있다가 6월 항쟁으로 사회분위기가 다소 열리자 노조결성을 하려는 것이었다. 최봉영은 제안을 받아들여 노조결성을 같이 한다. 결국 1987년 8월 동아 창동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고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87년 6·29선언 있고 정권이 수세에 몰릴 때 노동문제에 대해서 조금 유화적으로 나온다고. 노동자들도 재빨리 눈치를 채요.‘이때다!’하고. 여기는 4월 달 부터 노조를 설립하기 위해 움직임이 있었는데 단병호가 중심이고. 근데 노동자들이 벌써 알잖아? 내가 술 먹고 회사문제를 슬쩍 슬쩍 얘기하고 그러니까‘최 모라는 사람 빨리 얘기를 해보라’고 했던 거야. 그라니까 단병호가 정보를 듣고 나를 찾아와서 제안하지. 그때부터 노조를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운영을 할 것인지를 같이 고민해. 그래 일사천리로 노조가 설립되고, 단병호가 위원장이 됐지. 단 위원장이‘우리도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이렇게 선언을 하고 딱 앞장서서 가는 거지. 나는 그때 기획실장을 했고. 그리고 파업해서 이기고.”

회사는 노조를 주도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조사를 했고, 최봉영의 신분이 드러났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힘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전국적으로도 민주노조운동이 활발하던 때라 회사는 일방적으로 최봉영을 해고 시킬 수 없었다. 결국 회사는 위원장을 흔들어 그를 해고시키려 했으나, 위원장과 조합원들은 그의 신분을 알고도 지지했기 때문에 실패한다.

“그때도 회사가 나를 주목해 조사해보니까‘저놈이 아주 빨갱이다’이런 거지. 그때는 워낙 분위기가 좋으니 내쫓고 싶어도 잠시 주춤하다가 언젠가 단 위원장한테 나 모르게 협상이 들어온 거야. ‘쟤를 자를 테니까 조용히 있을 수 없냐?’근데 단 위원장이 자기 소신도 그렇고 내가 또 필요하지. 날 자를 순 없지. 조합원들도‘학출이 하나 믿을만한 놈이 여기 들어와 있다’이렇게 알려지면서 나를 자르면 단 위원장이 대신 욕을 먹지. 여하튼 단 위원장이 단호하게‘안 된다. 그 사람 자르면 무조건 파업이야.’이러니 회사에서도 물러섰지.”

파업의 승리와 민주노조를 건설한 뒤 현장의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관리자들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현장분위기를 주도하면서 관리자들이 오히려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1988년 최봉영은 사무국장이 되어 노조 활동의 중심에서 조직을 정비한다. 이어 1989년 임금문제를 둘러싸고 노조는 세 번째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권이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이념공세와 폭력적 탄압을 가하면서 탄압국면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사무국장이 됐고 조직을 좀 정비하고. 그리고 89년 세 번째 파업을 해요, 임금문제로 노사협의를 몇 번 하다가 결렬 되가지고. 1989년 들어 정부쪽에서 탄압공세가 들어오거든. 그러니 회사도 판단이 있으니까 협상에서 안 물러서고‘노조 깬다’이런 식으로 나와. 우리도‘할 수 없다. 파업이다’그래서 파업을 했죠. 한 달 정도 버티는데 그때 수배령이 내리기 시작한 거죠.‘전국에 있는 노조간부, 사업장에 침투한‘위장취업자들을 솎아 낸다’공안 차원에서. 나도 수배되어서 노조간부회의에서‘이 파업은 성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이렇게 봐가지고‘나만이라도 빠져나가서 뒤에 다시 힘을 도모하자’고 결정되죠.”

이어 그는 도피생활을 하다가 8개월 즈음 더 이상의 도피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노조간부들과 의논하여 현장으로 들어가 조합원들을 만나고, 그 자리에서 구속되기로 했다.

“그래 내가 빠져나가 도망 다녔지. 그러면서 조합원들 계속 만나고 기죽지 말라고 소식지 뿌리고. 결국 8개월 도망 다니다가 나도 지치자 주위 사람들하고 의논해서 정리하는 걸로 해가지고 내가 89년 10월, 그날 굉장히 추웠어요. 공장에 들어가 가지고 다 모아놓고 전경들은 나 잡으러 다 왔고. 내가 나가고 반대파가 생겨 우리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거의 소수파로 몰렸어요. 그때 나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노조사무실 앞에 다 모였지. 거기다가 나를 반대하는 사람까지 모인거야. 서로 옥신각신 하다가 반대파들이 고춧가루 뿌리고 나한테도 막 뿌리더라고. 거기서 경찰이 들어와 나를 잡아끄는 거를 조합원들이 울고 나도 울고 그러니깐, 기회를 주더라고. 그래서‘지금은 패배하는 것 같지만 또 기회가 올 거다. 억세게 살아남아서 나중에 보자’그런 얘기 하고 연행 되가지고 5개월 징역 살고 집행유예로 나왔죠”

노동운동이 그의 삶에 남긴 것들
1990년 석방되어 나오니 그는 해고된 상태였고, 이후 회사가 폐업을 하면서 그는 다시 돌아갈 현장이 없었다. 거기에 동광운수와 동아건설의 정리과정에서 본 노동자들의 모습 역시 그에게는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그즈음 사회주의권의 붕괴 소식은 더 큰 충격이었다. 결국 그는 가슴 깊이 믿고 있던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지향이 흔들리면서 노동운동을 정리한다.
“90년 3월에 출소해보니 해고됐잖아요? 그래 단체규약에‘노조간부는 노조의 동의 없이 해고 못 한다’가 있어서 해고무효소송을 냈는데 1심, 2심 모두 졌지. 그러다가 회사가 없어졌어. 거기에 내가 노동자들한테 두 번 들려나왔잖아요? 동광에서도 내가 노동자들한테 들려나온 거거든. 그리고 동아에서도 내가 들려 나온 거지, 뭐. 끝까지 싸우고 같이 지켜야 되는데. 그게 마음의 짐이 좀 된다고. 이걸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그래도 난 노동자들을 미워해본 적은 없어, 여튼 그 즈음 내 생각의 전환이 오기 시작한 거지, 그때 사회주의권 붕괴되는 거 보고. 내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흠모하고 있던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문제가 역사적으로 끝난 건지 결론이 난건지, 하튼 자본주의가 압도를 한 건지. 그때는‘이거는 내가 계속 추구해야 될 가치는 아니다’이렇게 본거지.”

그는 복잡한 사고와 정리되지 않는 감성에 대해 한 선배와 논의 하던 중 그 선배의 권유로 민중당의 서울시의원 후보로 나선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낙선했고 민중당도 파산한다. 민중당 활동을 끝으로 그는 가정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생활인으로 돌아갔다. 10여 년의 노동운동에서 그는 무엇을 배웠을까.

“나름대로 여러 시도를 해봤는데, 난 우연찮게 그래도 완전히 박살나지 않고 조금 해봤잖아요. 나는 유명해지지도 않았고 국회의원이 되지도 않았고 무슨 이론가도 아니지만, 난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나간 시절의 경험에서 내가 얻은 거는 사람을 보는 눈이 조금 솔직해졌다고 그럴까, 사람들을 보는 눈이 좀 깊어졌다고나 할까. 물론 아직도 멀었지만. 허허.”

특히 그는 두 번이나 학출이라는‘신분’때문에 가해진 회사의 탄압에 맞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노동자들에 대해 어떻게 정리했을까. 구술을 하는 중에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동광운수에서 만난 노동자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노동운동의 경험으로 사람을 보는 눈이 깊어진 탓일까. 대부분의 노동운동가들이 현장을 떠나면 노동자들과의 관계도 멀어지거나 단절되는 것에 비해, 그는 동광운수와 동아건설에서 만난 노동자들을 지금껏 계속 만나고 있다. 이런 그의 모습이 그 대답이 아닐까.


글·유경순 | 역사학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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