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김기선 (17)
함께쓰는 민주주의
IMF 10년이 남긴 것 지난 11월 21일은 김영삼 정권이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신한국당 후예인 한나라당이 창당된 날이기도 했다. 대선을 앞두고 ‘잃어버린 10년’ 타령에만 골몰하는 저들의 모습에선 ‘갱제’ 살리기는 고사하고 쪽박마저 깨버린 지난날에 대한 겸허한 반성도, 자기성찰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여권의 반격도 꼴사납긴 마찬가지다. 지난 10년은 독재와 부패의 고리를 끊어낸 ‘되찾은 10년’이었다는 그들의 주장 속에는, 민주화의 과실을 맛볼 겨를도 없이 IMF라는 철퇴를 맞아 신자유주의의 거센 풍랑에 휩쓸린 국민들에 대한 관심도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 사단법인 한국투명성기구 김거성(49세) 회장은 10년 전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국가..
장애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장애인이 없는 나라’다. 거리에서 장애인 만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버스나 전철, 기차역이나 공항처럼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서도 장애인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은 정녕 장애인이 없는 나라인가? 한국의 장애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인구의 10%에 달하는 400만 장애인이 가긴 어디로 갔겠는가. 한국의 거리에서 장애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어디론가 ‘갔기’ 때문이 아니라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만한 곳이 아니다. 휠체어를 타고 문 밖을 나서면 육교와 지하도가 길을 막아선다. 전철역사에 설치된 휠체어 리프트는 툭하면 고장이요 걸핏하면 사고라 ‘살인기계’라는 오명을 안은 지 오래다. 몇 킬로미..
‘오디세우스’의 귀환 1993년 5월, 윤한봉이 귀국했을 때 공항에 몰려든 기자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5·18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 35일 동안의 밀항, 한국인 정치 망명객 1호, 재미동포를 대상으로 한 ‘민족학교’와 ‘재미한국청년연합’ 활동…….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역정은 실로 같은 데서나 소개될 법한 것이었고, 거기에 그의 망명과 미국 생활에 얽힌 전설 같은 일화들이 보태지면서 사람들의 눈과 귀는 12년 만에 귀환한 이 ‘오디세우스’에게 쏠렸다. 다른 많은 운동권 인사들처럼, 이후 그의 행보가 5·18민중항쟁기념 행사장의 상석을 차지하고,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악수 퍼레이드를 벌이고, 대화와 타협과 상생의 21세기를 강조하는 강연으로 이어졌다면 어쩌면 그를 ..
역사의 피조물 ‘민청학련사건’이니 ‘3·1민주구국선언’ 같은 대형 시국 사건들은 이우정이란 이름 석 자를 재야인사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고 기관원들의 감시와 협박에 시달리는 일은 어느덧 그의 일상이 되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여성 노동자들, 철거민들, 동아·조선투위, 원폭 피해자들, 재일동포들, 양심수 가족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 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담담히 그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아직 손을 내밀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계속해서 ‘나를 이용하세요.’라고 외쳤다. 1970~80년대의 크고 작은 시국사건에 연루되고, 잡혀갔다 풀려나오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형성된 그의 이미지는 과격하고 격렬한 ‘민주 투사’ 그것..
301호실의 기억 왜 자꾸만 기도가 하늘에서 쏟아질까 이 작은 방에 쓰리고 아픈 눈물에 젖은 기도들이 뼈 마디 마디 울리는 기도들이 하늘로 되돌려주는 기도들이 늦봄 문익환이 1975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전국연합회 회보에 기고한 이 시의 제목은 「삼백일 호실」. 긴급조치란 망령이 멀쩡한 이들의 손발을 묶던 시절, ‘눈물에 젖은 기도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301호 여신도회 사무실이 바로 그곳이다. 단 한 번도 역사의 조명을 받아본 적 없는 이 작은 방은 훗날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인권위원회 사무실을 개방하여 자신의 소임을 물려받기까지 쓰리고 아픈 기도들을 하늘에 되돌려주는 종전의 일과를 되풀이했다. 남산부활절연합예배사건, 민청학련사건, 3·1민주구국선언사건 등 1..
한국의 ‘마더 존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연방군을 동원해 노동자들의 인권을 무지막지하게 짓밟았던 미국에는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파업현장을 누비며 특유의 독설로 자본가들의 비도덕성을 맹비난하고 투쟁심을 일깨웠던 마더 존스가 있었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예였던 그이는 1867년 남편과 자녀를 황열병으로 잃은 뒤 노동자와 미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 마더 존스는 ‘내 주소는 내 신발과 같아요. 어디든지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는 곳에 있으니까요.’라는 자신의 말대로 살았다. 그리고 한국에는 어머니 이소선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피 흘리고 끌려가고 죽임 당했던 7, 80년대 한국의 고난과 투쟁의 현장에는 반드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수수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화장기 없는 민낯의 이 열혈 여..
며칠째, 전태일의 영정을 안고 몸부림치는 그이의 사진을 보고 있다. 이제 막 사십대가 된 젊은 이소선. 그는 슬퍼한다기보다는 아파하고 있다. 물리적인 통증을 거의 온몸으로 호소하고 있다. 혹시 그는 스물두 살의 전태일을 낳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담대해지세요, 어머니…….’ 자기 몸에 불을 낸 아들은 그렇게 말했다. ‘오! 어머니/ 당신 속엔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 시인 박노해는 또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아들은 어머니를 낳고 영별의 순간, 이소선의 내부에서는 자식과의 영별을 담대하고 의연하게 맞이하는 어머니와 자애로운 미소 속에 ‘적’을 감춘 어머니가 한판의 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아들을 낳고 아들이 어머니를 낳(김남주, 『고난의 길』)’는 그 싸움은 가진 ..
김진균이 다시 서울대 강단에 서게 된 것은 1984년 9월. 이 무렵, 그가 학교와 학계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과거의 ‘관운장’이 아니었다. 5·18민중항쟁 직후의 서명 투쟁으로 해직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존재에 도덕적 우위와 무게감을 더해 주었고, 당대의 내로라하는 진보 학술운동가들이 망라해 있는 산업사회연구회(산사연)가 그의 뒤를 받쳐 주고 있었다. 운동이 격화되는 85년에서 8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그는 자연스럽게 운동권 학생들의 대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산사연은 그의 사회학과 제자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학회 성격의 조직으로, 사회학 외에도 역사학, 철학, 정치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진보적 연구자들이 상당한 규모로 결집해 있었다. 산사연의 등장으로 보수적인 ..
가짐없는 큰 자유, 제정구 2 나무가 아무리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싶어도 이 세상 어딘가의 흙 위에 설 자리가 없다면 나무는 존재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사람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자기 영역, 즉 사람으로서의 제자리를 만들고 누리기 이전에 땅위에 먼저 서야 하고 설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주거다. …… 땅이 좁을수록 주거의 크기는 엄격히 제한되어야만 약자의 몫이 있게 된다. 요약하면 나의 몫을 누리는 것이 정의요, 그의 몫을 두는 것이 연대의식이다. 그러므로 나의 몫과 함께 그의 몫이 동시에 있는 것이 평화다.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을 위한 제언」, 제정구, 1988) 사람의 자리 제정구에게 집이란 삶의 총체적인 자리요, 인간으로서 정당하게 누려야 할 ‘몫’이었다. 주거가 ‘있..
가짐없는 큰 자유, 제정구 1 88올림픽을 앞두고 이른바 ‘올림픽 철거’가 한창이던 1986년 여름, 성동경찰서 앞에서는 조금 색다른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빈민운동의 대부’ 제정구가 경찰서에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철거민들이 즉석에서 벌인 ‘제정구 구출 시위’였다. 당시 제정구는 하왕십리 철거민들 앞에서 반정부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상계동 철거민 회장이 시위대를 향해 외쳤다. “우리 지도자 제정구 선생이 진짜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했습니까?” 시위대는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안 했습니다.”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안 했는데 왜 우리 제정구 선생을 잡아갔습니까? 혹시 ‘전두환은 개자식’이라고 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우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