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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100으로 싸우다 그런 거야.”-청계노조 신광용, 김선주 씨의 아들 ‘동주’이야기 1 본문

민주화운동이야기/민주화운동이야기(노동운동사)

“1대 100으로 싸우다 그런 거야.”-청계노조 신광용, 김선주 씨의 아들 ‘동주’이야기 1

기념사업회 2012. 3. 9. 12:35

     “1대 100으로 싸우다 그런 거야.”

  - 청계노조 신광용, 김선주 씨의 아들 ‘동주’이야기 1

 

글 장남수 (원풍노조, <빼앗긴 일터> 등 집필 http://namsoo.tistory.com)

 

청계노조 간부였던 신광용, 김선주 씨의 아들 신동주(24세,ㅅ대학 언론홍보학과 휴학중)씨를 만났다. 그에게 부모들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담겨있을까?

사실 ‘청계노조’ 하면 떠오르는 명단 속에 김선주 씨를 포함시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대개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람, 징역을 살거나 명망이 높아진 사람들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줄을 받쳤던 뒷줄의 사람들, 뒤를 지켜내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역사의 순간들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청계노조에서 김선주 씨들이 없었다면 청계노조의 맥은 다른 줄기와 다른 모양으로 서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김선주 씨는 청계노조의 사건 사건마다 묵묵히 헌신했던 사람들 중 한사람이다. 그러나 김선주 씨 이야기는 이 장에서 잠시 접자. 아버지는 일선에서, 어머니는 뒷줄에서, 끌고 밀며 청계노조를 받쳐오는 동안 그의 아들 동주는 무엇을 생각하며 자랐는지 궁금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동주의 꿈

그 상처가 눈에 들어온 게 초등학교 때쯤이었을까? 목욕탕의 뿌연 김 서림 속에서 상처는 선명히 보였다. 배에도 손에도 흉하게 줄을 낸 상처들이 의아했다.

“아빠, 이거 왜 그래?” 놀란 동주에게 아빠는 별 거 아니라는 듯 툭 던졌다.
"
1대 100으로 싸우다 그런 거야.”

나중에 우연히 누나를 통해 아빠가 노동운동을 하셨고 그 과정이 꽤 위험(?)하고 치열한 것이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살이 되어 굳어진 아빠 몸의 상처를 다시 보며 생각했다. 혹시 고문을 당하신건가?

어릴 때 아빠는 집이 딸려있는 공장을 차려 대기업에 옷을 납품하는 하청 일을 했다. 집과 일하는 공장이 붙어 있으니 늘 미싱 소리를 들으며 자랄 수밖에 없었다.
공장 사람들과 같이 점심 먹던 기억, 집에 놀러온 친구들에게 미싱이 돌아가는 공장을 보여주며 놀던 기억이 있다. 그땐 ‘유복’했다. 좋아하는 책을 많이 사주셨던 엄마는 어느 날 병원에 가기로 한 동주가 서점에 들어가 책에 빠져 있는 바람에 찾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고 하셨다. 아빠공장이 광명, 인천 등으로 옮겨 다니게 되면서 아빠가 새벽까지 공장에서 일하시면 한밤중에 누나랑 엄마랑 셋이서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가던 기억도 아련하다.

 

- 동주는 어릴 때 무슨 꿈을 꾸었을까?

막연히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늘 미싱을 보고 자라서 기계에 대한 관심이 컸다. 어릴 적 읽던 책 속의 과학자들이 멋있어 보였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그 꿈은 계속되었을까?

조금씩 바뀌었다. 중학교 때 아빠사업이 매우 어려워졌다. IMF사태가 터지면서 상황이 좋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하청업체였던 아빠가게에서 디자인한 옷이 아빠 잘못이 아니었는데 다 덤터기 쓰는 일도 일어났다.

“그날은 하필이면 중학교 입학식 날이었어요. 입학식을 하고보니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여러 명 같은 중학교에 배정되어서 기쁜 마음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와서 놀고 있었죠. 딩동하고 벨소리가 들리길래 문을 열어주니까, 사람들이 들이닥쳐 압류딱지를 붙이는 거예요. 겁도 났었지만, 친구들 앞에서 그런 상황을 맞으니 그게 어린 마음에 참 상처가 됐어요. 결국 아파트를 팔고 이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점점 더 이상한 집으로 옮겨가는 거예요. 그래서였는지 고등학교 때까지는 항상 불만스러운 시기였어요. 그때였죠, ‘정치인이 되어 좀 바꾸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한민국청소년의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그 꿈이 미약하게나마 지금까지 계속 되어서 정치 컨설턴트가 되어 공정하고 공평한 정치를 구상하겠는 생각으로 발전했던 것 같아요.”

- 그런데 그 꿈을 접었구나.

고 3때는 의대를 가려고 했다가 떨어져 재수를 했고 결국 자유전공학부가 있는 대학에서 언론홍보학부를 선택했다.

“사실 정치인의 꿈을 꾸기에는 염치가 없기도 했지요.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네 살 위인 누나가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누나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해서 집안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어버렸거든요. 누나도 청춘이 있고 꿈이 있었을 텐데 일만 했으니까요. 재수할 때 누나가게 같이 봐주다가 나는 공부하러 가려고 “누나 빨리 좀 와라” 했더니 그날 누나가 짜증이 좀 났는지 “너는 공부하고, 여기서 일하는 나는 대체 뭐야?” 라고 말하는데 그때,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요. 당시 아빠는 중국에서 기반을 잡으려고 시작하는 중이라 누나한테 돈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셨고 누나가 혼자 종일 가게 보면서 돈을 버느라 애쓰는 걸 보며 너무 안타까웠거든요. 나를 위해 누나가 많은 헌신을 했어요. 식구들이 모두 조그만 누나어깨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참 미안할 때가 많았죠. 그래서 이제는 누나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동주의 누나 평화는 지금 중국에서 아빠와 함께 의류사업을 하고 있다. 아빠 눈에는 ‘옷 같지도 않은 디자인’이라고 말하지만 누나의 젊은 감각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실제로 집안 사업의 중심축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동주의 꿈도 바뀌었다. ‘사업가가 되어보자.’

- 아무것도 마음에 걸리는 게 없다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동주는 좀 많이 망설이더니, 정말 아무런 방해도 없다면 아마 ‘정치컨설턴트’가 되기 위해 공부했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 자락에 남아있는 미련 같은 것일까,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시장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일까, 동주에겐 옷 만드는 일도 이제는 싫지 않은 일이 되었다.

“우리 가족의 숙명인 것 같아요. 미싱과 함께 젊은 시절을 보냈던 부모님에게서 태어났잖아요. 옷 만들어서, 옷 팔아서 번 돈으로 지금까지 큰 걸요. 저는 그런 옷을 보고 있으면... 참 밉다가도 고맙고, 고맙다가도 너무 밉네요.”

- 혹시 모델로 삼고 싶은 역할이 있을까?

박원순의 <아름다운재단>같은 ‘사회적 기업’ 형태를 생각하고 있다.

어느 가난한 나라를 여행하던 길에 아이들이 맨발로 다니는 것을 보고 소비자가 자신의 신발 한 켤레를 구입할 때마다 한 켤레를 그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생각했던 블레이크 마이코스키의 ‘TOMS슈즈’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경영아이디어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아이디어’를 받은 것도 혜택이니 받은 만큼 돌려주자는 발상이 신선했고 시스템이 좋았다. 사업이 잘되면 이렇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업모델을 반드시 만들고 싶다.

- 지금 동주 나이 때 부모님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아 그래요, 문득 궁금했던 적이 있었어요.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염하는 걸 본 다음이었어요. 제 주변 사람들, 가족들이 살면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 때부터 엄마에게 이것저것 여쭤봤죠. ‘엄마, 그때 도대체 뭐 먹고 살았어?’ ‘글쎄 뭐 떡볶이, 라면…… 이런 거 먹었지?’ 엄마의 대답은 궁색했어요. 가슴이 아팠죠.”

누구나 어릴 때 꿈을 꾼다. 배운 사람 자식이나 못 배운 사람 자식이나, 자본가의 자식이나 노동자의 자식이나 모두 ‘공평하게’ 꿈꿀 ‘자유’를 지닌다. 그러나 그 꿈의 방향도 ‘자유’롭지는 않다. 바닥에 서 있는 이들과, 이미 100층 계단에 서 있는 이들과의 ‘1대 100 싸움’은 공정할 수도 정당할 수도 없다. 억압받는 꿈은 나래를 접거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얼마 전 한 일간지의 보도에 의하면, 초등학교 아이들의 꿈이 사회계층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초등학생 정도만 되어도 아이들은 감각적으로 자신의 조건을 파악하게 되고 알맞은(?) 정도의 꿈으로 맞춤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우리사회에서 그 말은 순전히 바닥을 떠받칠 노동력의 원활한 재생산을 위한 ‘언술’일 뿐이라는 것, 삼척동자도 안다.

 

80년대 한국사회의 ‘혁명’을 위해 ‘위장취업’한 대학생, 지식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한시적으로 공장노동자가 되어 ‘경제주의’, ‘조합주의’를 극복하고 깃발을 들고 ‘정치투쟁’의 전선으로 나오라고 ‘지도’했다. 70년대, 민주노동조합을 잘 지키고 확산하면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있고 나아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신념으로 공장 기계 앞을 사수했던 ‘민주노조’들의 운동방식은 ‘마땅히’ 비판받았다. 문제는 그렇게 전선으로 나온 노동자들은 박살이 났고(물론 이래도 저래도 박살나던 때였다) 전선으로 불러냈던 지식인들이 하다못해 학원 강사라도 하고 번역이라도 해서 먹고살던 때, 징역살고 해고된 노동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 후 출발이 달랐던 사람들은 ‘위장취업’도 투옥도 화려한 이력이 되어, ‘386’ ‘486세대’라 칭해지며 민주화의 상징이 되고 정치를 주도하는 지도계층이 되었는데, 그때 그 노동자들은 남궁옥분의 노랫말처럼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는지 소식조차 없다.
이렇듯 우리사회에서 꾸는 꿈은 누구에게나 같은 날개가 주어지지 않는다. 존 레논이 노래하고 마틴 루터킹이 절규했던 그 꿈을 공유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우리의 아들 동주는 어떨까?

어느새 동주는 엄마 아빠가 청계천의 좁은 다락방에서 재단을 하고 미싱을 하고 또 투쟁을 하던 그 나이 때만큼 왔다.
그리고 2주후 동주는 중국으로 간다. 왜 중국일까? (이야기는 다음 달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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