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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이야기/민주화운동이야기(노동운동사)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깃발이었던 대우조선노조 백순환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7. 16. 16:26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깃발이었던 대우조선노조 백순환

글 장남수 (원풍노조, <빼앗긴 일터> 등 집필)



“참으로 긴 굴종과 침묵이었다. 인간이기를 거부당한 사람들의 기계적인 행진이었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그렇게 긴 세월 이어져 온 체념과 절망, 그 아득한 무기력……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부여잡은 삶의 집념은 뇌성벽력과도 같이 우리 삶을 강타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기계일 수 없었다.
노동자! 그 찬란하게 빛나는 이름 앞에서.”
- 92년, 대우조선노동조합 발행 사진 자료집에서



1987년 그 뜨겁던 여름에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해’ 잠시 기계를 끄고 깃발을 들었다. ‘노동조합결성’ ‘기본급 12만원 인상하라’ ‘김우중은 각성하라’……깃발들 사이로 ‘전태일 열사정신을 계승하자’도 펄럭였다.

대우조선이 위치한 옥포와 장승포일대의 주택가 창문이 열리고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도 함께 펄럭였다. 그리고 쏟아지는 최루탄 연기 속에 스물한 살 노동자 이석규가 쓰러졌다. 그의 장례식을 치르고자 참석했던 이소선 어머니를 비롯한 민주인사들이 ‘제3자 개입’이라는 죄(?)명으로 야산으로 쫓기거나 구속되었다.

당시 스물여덟의 노동자 백순환(53세)은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늙은 노동자’가 되어 여전히 그 현장에서 노동하고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25주년이 되는 여름, 옥포에서 그를 만났다.

고 이석규 열사를 추모하며 시위농성투쟁을 벌이는 목포대우조선소 노동자들(1987)



25년이 지난 지금 대우조선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무엇을 이루었으며 혹 잃어버린 그 무엇도 있을까?

우선, 대우조선 노동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그때는 2년을 잘 못 버텼는데…… 87년 이전에는, 방위산업체에 대한 임시특례법에 따라 5년 근무하면 군 면제가 되는 기간만 견디려던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대우조선 ‘정규직 노동자’가 꿈이 된 젊은이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더불어 87년 노동자투쟁은 노동자들의 정치 경제적 조건만 올린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제적 토대를 강화시켰다. 대우조선의 경우만 해도 87년 전까지 집 전화기를 가진 경우도 많지 않았다. 나도 5만원짜리 셋방에 살았다. 투쟁을 통해 절대로 올려주면 안 될 것 같았던 임금이 올라가면서 내수의 바탕이 되었고 집안에 금성, 아남 등의 전자제품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부터는 자동차산업의 내수시장 기반이 되었다. 경차로 시작해 조금씩 배기량이 커진 차로 바뀌어왔다. 건설 경기가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증권시장도 성장했다. 87년 노동자투쟁을 평가하는 논자들은 일반적으로 당시 노동자 투쟁이 만들어낸 경제적 의미를 잘 해석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즘 현장에서 나이 든 노동자들이 젊은 친구들한테 ‘너희들 행복한 줄 알아라.’ 라는 말을 한다. 무엇보다 결혼하기 좋은 조건이 된 것이다. 87년 전에는 거짓말하기 싫어서 선을 안 봤다. 현장 용접사나 취부사라고 말만하면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사무직 직원만 선호했다. 이제는 대우조선 정규직이라고 하면 두말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잃은 것이 왜 없겠는가, 무엇보다 사람 냄새가 사라졌다.
‘텍사코 쟈켓’(텍사코라는 석유회사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바다에서 유전을 발견하면 220 미터짜리의 대형구조물 네 개를 세우는데 그 형태를 칭하는 것) 이라는 고난도의 작업을 하던 기억이 많이 난다. 밤새 그 작업을 하고 아침에 헤어질 때 막걸리 나누며 서로 툭툭 어깨 치며 격려했다. 족구도 많이 하고 끈끈했던 기억이 이제는 아련하다. 지금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말을 별로 안한다. 휴식 때나 퇴근길에 전부 각자 핸드폰 들고 있다. 그때는 일을 해도 어울려서 분담해야 가능했는데 지금은 아쉬운 게 없으니까.

이석규씨 운구차량 모습(1987)


 그러나 그것은 정규직의 경우이고 대우조선 안에서도 비정규직은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현재 정규직은 1만3천여 명, 비정규직은 1만7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비정규직이 더 많아진 것이다. 87년 이전에는 외주,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노동 강도는 좀 셌지만 돈을 더 받았다. 그 예로 입사동기가 백 삼십 명인데 협력업체로 간 경우가 많았으니까.

지금 비정규직 문제는 가장 마음을 무겁게 하는 문제임에 틀림없고 어떻게든 간극을 좁혀나가야 한다. 지도부가 현명하게 해야 하는데 이를테면 단체협상 때 정규직은 복지수준을 조금 높이면서 비정규직의 임금을 올린다든가, 정규직이 성과급을 일정량 양보해서 비정규직으로 돌린다든가 해야 하는데 쉬운 문제는 아니다. 휴가, 명절선물, 성과급 100프로 동일지급 등을 단체협상 안건으로 내기도 하고 유인물 등을 통해 교육은 계속 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지금까지 운동하면서 가장 자부심을 느낀 경우는?

당연히 노동조합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노조위원장도 맡았고 금속노조간부로 파견되어 일도 했고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여 일하는 25년 동안 그 무엇도 혼자 결정한 적이 없다. 늘 토론을 통해 중지를 모아 결정했다. 대우조선 노동자가 되어 일한 삶이 자랑스럽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안 가길(못 간 것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적응력이 빠르니까 학생운동 하느라 매일 데모했을수도 있지만 대우조선 노동자로서 느끼고 실천한 내용만큼 삶을 진지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국제시장의 직물점포에 취직을 했는데 교과서에서 배운 데로 하다가 잘렸다. 손님한테 거짓말하면 안 되잖아, 사장이 자꾸 속이는데 말 안하면 비겁한 것 같아서……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얘기 여러 번 들었지만 계속 그러니까 그만두라더라.

공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가?

아, 얼마 전 방통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인생의 한 굽이를 돌아 만학도로 하게 된 공부는 매우 유익했다. 많은 정리가 되더라.

혹 종교는?

87년 노동조합결성당시에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도망 다니면서도 수녀원에서 신세를 졌고 최은석, 최재춘 동지 등도 가톨릭 신자였기에 그때 영세를 받았다. 그 후 정신없이 살았고 서울 금속노조에 파견되어 부위원장, 금속산업연맹 부위원장 등을 하며 9년을 일한 후 2005년 거제현장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내가 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많이 했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 할까, 그리고 25년 만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나는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 민중과 부대끼며 평등하게 산 예수의 인간적(?) 삶에 감화를 많이 받았다.

금속연맹에서 기억에 남는 일은?

금속산별추진위원장을 맡아 지금의 금속노조를 만드는 씨앗 역할을 했다. 당시 외국에서 보기에도 한국에서 산별은 쉽지 않겠다는 말을 했었는데 가능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작 대우조선노조는 금속노조로 전환하지 못했다. 세 번이나 투표에 부쳐졌지만 세 번 다 3분의 2를 득하지 못했다.

파견근무관계로 가족들과 떨어진 기간도 많은데 가정에서는 어떤가?

90년 1월에 결혼한 후 8월에 노조위원장을 맡았고 그 해에 구속이 되었다. 아내가 강릉교도소까지 면회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요즘 빨래하고 청소하고 잘 한다. 우리마누라는 열흘이 돼도 절대 빨래 안 갠다.(웃음) 내가 걷어서 다 갠다. 음식물쓰레기 버리고, 애들 옷 늘어 논 것도 다 치우고, 잔소리하는 것도 내 몫이다. 미안하니까.

아들이 어릴 때 아빠 뭐하느냐고 누가 물으면 “금속 연맹한다.”고 말은 하더라만 내가 살아 온 삶을 자식들이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대화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고 그게 늘 아쉽다. 내가 추구해온 것은 귀한 가치인데 자식이 그걸 알아줬으면 싶은데 설명하기가 어렵다.


백순환 씨의 인상은 마치 하회탈 같다. 선한 얼굴이다. 그러나 그의 심지가 얼마나 굳고 강인한지는 그가 살아 온 인생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자식들에게 말하고 싶은 자신의 삶과 가치는 어느 만큼의 무게일까. 지면이 짧아 안타깝다. 필자는 그에게 글을 쓰라고 권했다. 몸으로 살아 온 삶을 이제 글로 다 적어 내라고. 필자는 약속을 촉구하며 잔을 들었고 그는 말없이 잔을 부딪쳤지만 언젠가 그의 이야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질문도 답변도 축약한 채 인터뷰를 접었다. 조선경기의 추락으로 근심이 내재한 옥포 밤바다에서 석유시추선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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