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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어머니, 1주기 추도식 본문

민주화운동이야기/민주화운동이야기(노동운동사)

이소선어머니, 1주기 추도식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9. 7. 16:55

이소선어머니, 1주기 추도식

글 장남수_원풍노조, <빼앗긴 일터> 등



지난해는 특히 민주화운동의 전선에서 큰 역할을 하셨던 귀한 어른들 중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이 이견 없이 호칭했던 ‘어머니’도 떠나셨다. 그리고 벌써 1년이 되었다. 1년 동안도 많은 노동자들이 죽고, 터지고, 깨지고 상처받았다. 어머니의 부재로 상처는 더 쓰리고 쓸쓸했다.



9월 3일 오전 11시, 마석 모란공원에는 400여 명의 추모객이 모였다.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준비한 대형버스를 타고 온 민주인사들, 전태일의 친구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관계자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그리고 얼마 전 회사가 고용한 용역에 의해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안산의 SJM노동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그들의 티셔츠 등판에는 ‘SJM 용역깡패 투입, 노동자 테러 기업권력의 횡포 이대로는 안 됩니다. 용역깡패 사주한 기업주를 처벌하라’ 라는 글과 얼굴에 두 줄기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노동자의 얼굴이 스캔 되어 있었다. 한편 참석자들 중에는 뉴스를 통해 자주 보는 여당의 인사들도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얼굴색으로 어머니 묘소 앞에 섰다.



많은 분들이 두루 ‘안배’되어 추도사를 하고 골고루 줄 서서 참배를 했다. 전태일의 친구에서 이소선 어머니의 아들이 되었던 분들을 대표하여 추도사를 한 최종인(청계노조)씨는 “태일이 너는 스물 둘 청년인데 니 친구들은 환갑이 넘었다. 며 깔깔 웃으시던” 일화를 추억하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이제는 국회의원이 된 전순옥 씨는 “어머니가 항상 같이 가자고 하셨던 더 낮은 곳, 보고 싶어 하셨던 노동자가 대우받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 이 땅에 아직 도착하지 못한 오빠의 편지, 잊지 않겠다.”고 했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어머니가 정성스레 지어주신 밥으로 자식들이 자라고 꿈을 이루듯, 민주노총은 전태일 정신을 따라 어머니 이소선의 정신을 새기고 투쟁 하겠다.”고 말했다. 한국노총도, 전태일기념재단이사장도, 모두 모두 ‘어머니의 뜻’을 ‘이어 받겠다.’고 어머니의 묘소 앞에서 다짐했다.



추모사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선 장기표 씨가 백기완 선생으로부터 “장기표는 가만히 있어!”라는 호통을 당하기도 했고, 참배를 하려고 나서던 김문수 씨에게 “무슨 낯으로 여기를 오느냐”고 일부 참석자들이 막아서면서 잠시 소요가 일어 전순옥 씨가 말리는 풍경도 벌어졌다. 이재오 씨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지만 김문수 씨는 그 와중에도 끝까지 참배를 하고 도시락을 먹는 곳까지 와서 한 바퀴 돌며 악수하는 ‘정치적’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복잡한 풍경이었지만 어머니는 하얗게 웃고만 계셨다. 이 모든 언어를, 이 모든 사람들의 표정과, 이 모든 행위들을 액자 안에서만 바라보고 계셨다.

전태일 동지의 추도식 날은 항상 추웠다. 아무리 두툼하게 입고가도 늘 발이 얼어 동동거렸다. 어머니는 힘겨운 몸과 마음을(해마다 아들이 죽은 11월이 되면 어머니는 앓으셨다) 곧추세우고 먹을거리를 준비하셨다. 항상 돼지고기와 떡을 맞추셨다. 배추김치는 창동 집에서 담으셨다. 검정콩이 박힌 백설기를 식지 않게 시간 맞춰 챙기셨고, 일일이 비닐봉지에 한 덩어리씩 넣어 참석한 분들과 나누셨다. 떡 상자를 열면 퍼져 나오던 구수한 냄새에 몸이 따뜻해졌고……

청계식구들은 음식을 날랐는데 어머니는 혹여 한사람이라도 건너뛸까 걱정되어 여기저기 살피셨다. 어머니가 숙희야, 여기 김치 떨어졌다, 혜숙아, 여기 고기 떨어졌다. 부르고 다니시던 모습이 어제인 듯 선연하다.…… ‘전쟁 같은 노동’의 현장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어머니는 늘 밥을 먹이려하셨다. 어머니의 밥은 이념도 정치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사장도, 노동자도,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배운 자도, 못 배운 자도, 밥 앞에서 차별받아서는 안 되는 것, 어머니의 투쟁은 밥그릇이었다.
- 이숙희, 『이소선어머니 1주기 추모토론회』 -전태일 재단




아들의 추도식 때마다 40년 동안 밥을 챙겼던 어머니의 묘소 옆에서 청계노조 사람들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청계식구들은 나중에 식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준비한 300개의 도시락이 부족해서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국장은 큰소리로 외쳤고, 결국 청계노조식구들은 장소를 정리한 후 국수나 순대국으로 늦은 점심을 챙겼다.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날은 더웠다. 그럼에도 청계노조 사람들은 긴 옷에 겉옷까지 걸친 분들이 많았다. 늘 추웠던 전태일 추도식의 기억 때문에 이날도 습관적으로 따뜻한 옷을 챙겨 입었다고 했다. 지난 해, 많은 비와 태풍을 기가 막히게 피한 날에 이소선 어머니는 운명하셨고 장례기간도 내내 맑았다. 기일인 올해 9월3일도 여전히 날이 좋았다. 어머니의 추도식과 저녁의 문화제까지 잘 마친 다음 날, 서울에는 많은 비가 쏟아졌다.



추도식 날 저녁에는 ‘전태일 다리’에서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1주기 추모음악회’ 가 열렸다. 유가족협의회의 배은심 여사(이한열의 어머니)는 전태일 동상 앞에 세워진 마이크를 입에 댄 이소선 어머니의 사진을 가리켰다. “입술이 갈라지고 터져있는 어머니의 저 사진처럼 우리는 한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어머니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저 갈라진 입술이 보여주고 있다.”



이소선 어머니의 둘째아들 전태삼 씨는 “이 길은 어머니가 40년을 훑고 다녔던 길이다. 형의 동상이 서 있는 이 자리에 우리 모두를 함께 하게 한 사연을 어찌 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여기서 도봉산 아래 집에까지 형과 함께 걸어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는 늘 동구마루에서 기다리고 서 계셨다. 부엌에는 19공탄이 타고 있었는데 냄비 위에는 늘 맑은 물이 끓고 있었다. 퉁퉁 불은 수제비를 먹이지 않으려고 어머니는 물만 끓이며 왔다갔다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전태일 다리의 좁은 공간 옆으로는 도시미관을 위해 설치해 둔 화분들이 많았고 평화시장의 중요한 유통 수단인 오토바이도 많아 여간 좁은 게 아니었다. 시민들은 그 좁은 공간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입버릇처럼, ‘노동자가 하나가 되어야한다’던 이소선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소속의 노동자들이 함께 결성한 <이소선 합창단>이 무대에 섰다. 화음을 맞춘 합창이 후텁지근한 청계천자락으로 퍼져나갔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노래패들의 노래 ‘쇳밥’도 어우러져 들었다. 지금은 무대를 박탈당하고 거리의 노래패가 된 국립오페라합창단지부의 노래도 전태일 동상 앞에서 하나의 화음이 되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들, 공장에 가서 일하고 싶은 노동자들, 무대에서 노래하고 싶은 노동자들, 전태일의 친구들, 그의 후배들이 이소선어머니를 기리며 목소리를 합했다.

 스티로폼을 깔고 앉은 사람들 속에는 네다섯 살 되었을 법한 여자아이도 생글생글 웃으며 몸을 흔들었다. 이소선어머니의 아들딸들이 전태일의 동상 앞에서 ‘노동’과 ‘평등’과 ‘해방’을 노래하는 틈 사이로 오늘의 생업을 위한 ‘노동’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다녔다.


그렇게 이소선 어머니의 1주기를 맞은 날, ‘전태일 다리’ 위로 청계천의 하루는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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