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민주주의
광장무대에 선 70년대 민주노조 본문
광장무대에 선 70년대 민주노조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 신화의 허구-
글_ 장남수/ jinsoo711@hanmail.net
나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7남매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가지고 있던 땅을 모두 친일파에게 빼앗겼고 이후 자식들에게 한평생 미안해하셨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주인집 언니를 따라 평화시장으로 갔다. 7번 미싱사는 나에게 “시다 해봤니” 물었고 나는 “네, 해봤어요.” 라고 거짓말을 하고 취직이 되었다. 내 나이 13살에 나는 ‘공순이’가 되었다. (청계피복 노조 신순애, 57세)
열세 살 ‘공순이’는 이제 쉰일곱 살 황혼기가 되어 40년도 넘은 그날을 되짚고 있다. 연기자들이 마임으로 그의 삶을 재현하는 무대 위로 신순애 씨의 자분자분한 음성과 노래 가락이 깔렸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신순애 씨는 다락방에서 허리도 펴지 못한 채 시다 일을 했고, 재단사와 미싱사는 빨리 하라고 재촉했다. 무대 위의 연기자들은 신순애 씨의 독백을 몸으로 옮겨, 옷감을 자르고 재봉질을 하고, 페달을 밟고, 생리중인데 화장실도 못가 배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열세 살의 시다는 노동조합을 알게 되고 ‘못난이’공순이에서 ‘당당한 노동자’ 가 되어갔다.
이어 동일방직 노동조합 지부장이었던 이총각 씨와 YH노동조합 지부장이었던 최순영 씨가 단상위로 올라갔다. 최순영 씨가 말했다.
노조 만들 때는 기숙사 이불속에서 불 꺼놓고 가입서 받았는데 그걸 브래지어에 숨겨서 밖으로 빼왔어요. 그때 회사에서 회유책을 엄청 썼지요. 하청공장 차려주겠다, 동생 학비도 대주겠다, 시집갈 밑천도 주겠다, 그걸 다 막아냈죠.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되었는데 그때는 그것만 해도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마이크를 넘겨받은 이총각 씨의 목소리 톤이 점점 커졌다.
1972년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지부장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용 집행부를 잃은 회사는 극단적으로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측에 매수된 남성 노동자들은 수시로 노동조합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폭력을 휘두르고 갖가지 방법으로 노조활동을 방해하고 나섰습니다. 여성 집행부는 그 이후 노동조합 본연의 활동보다는 노동조합을 사수하기 위해 길고 긴 투쟁의 가시밭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똥물을 뒤집어썼던 1978년 노동조합 탄압사건이 재현되고, 쓰러져 울고 있는 2012년의 ‘노동자’를 이총각 씨가 부둥켜안았다. YH의 1979년 신민당사 농성장면도 재현되었다. 무대에는 여성노동자들의 외침과 노랫소리가 섞여 허공을 갈랐다.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그러나 1979년 8월 11일, 스무 살 꽃다운 처녀 김경숙은 신민당사에 진입한 경찰에 의해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최순영 씨가 말했다.
그때 우리가 모이기만 하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요? “야, 유신정권이 언제 무너지겠냐, 박정희가 언제 무너지겠냐, 지만이가 육사 갔는데, 우리 살아생전에 유신이 무너지는 걸 보게 될까, 이랬어요. 그래도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내 자식들을 위해서라도”라고 했지요.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 독재는 총탄에 무너졌고 노동자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 꿈은 회오리치던 봄날의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박정희 시대의 망령이 꿈틀댄다. 박정희 시대의 어두움을 가리고 망령을 되살려 다시 옛 시절의 권력을 꿈꾸는 이들의 논리 중심에는 ‘경제성장’이 있다. 경제성장을 박정희가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 ‘경제성장’에는 허리 휘어지고 골병들고 흰머리가 성성해진 신순애, 이총각, 최순영들은 존재조차 거론되지 않는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역사든 간에 바르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원칙은 두고라도 그‘성장’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10월 20일, ‘유신잔재청산과 역사 정의를 위한 민주 행동’집회에서 1970년대 유신의 직접적 피해자인‘늙은 노동자’들은 또 다시 질문하고 있었다.
이날 낮에는 민주노총과 70년대 노동운동동지회, 전태일재단의 공동주최로‘박정희시대 경제성장 신화의 허구’라는 주제로 금속노조 회의실에서 토론회가 열렸다.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발제를 통해 ‘1960~70년대 경제개발 계획의 진전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조목조목 짚었고‘저임금 장시간 노동제에 의한 자본축적’이 이루어진 ‘구조와 실태’를 분석했다. 그리고 참석자들은“70년대 노동현실을 지금의 시각에서 재해석해야”하는 과제를 새삼 확인했고 그 과제를 실천하기 위해 어떤 수단들과 행동이 동원되어야하는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어제 오늘의 고민이 아닌, 이 고민의 실타래는 어디서, 누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집회가 열린 대한문 앞에는 어제도 오늘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노숙농성을 하고 있고, 무대 위 영상스크린에서는 한진중공업의 해고노동자 김진숙이“이럴 줄 알았으면 민주노조 하지말걸 그랬습니다. 그냥 쥐새끼처럼 웅크리고 살걸 그랬습니다.”절규하고 있었다.
이날 낮의 토론회장도 그랬지만, 밤늦도록 무대를 바라보며 스티로폼을 깔고 앉은 사람들은 늘 보던 얼굴, ‘유신의 실상’을 말해주지 않아도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유신독재 실상 알리기 행동주간'인데 알아야 할, '모르는 이' 들은 무심히 지나가버렸고 1부의 쌍용차노조집회에 모여 있던 청년 학생들이 2부‘70년대 노동자들의 마당’시간에는 모두 가버렸다. 홍보의 문제? 인식의 왜곡? 아니면 세대 간의 소통 단절 문제일까.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조지오웰의 말이 공허해지는 순간이었다.
밤 10시쯤 귀가를 위해 다시 대한문 앞을 지나는데 쌍용자동차노동자들의 천막 농성장에서 10여 명의 농성 참가자들이 영정사진을 앞에 두고 끝없이 절을 하고 있었다. 거리는 밤이 깊어 한산하고 자동차 불빛만 지나다니는 차가운 바닥 위에서 백배, 천배, 이들의 기원은 고요하고도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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