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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이야기/민주화운동이야기(노동운동사)

삶의 지침이 된 ‘나 이제 주인 되어’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2. 27. 11:48

삶의 지침이 된 ‘나 이제 주인 되어’

글_장남수/ jnsoo711@hanmail.net



“엄마의 삶은 불꽃같았다. 엄마의 흔적을 되짚어 가다보면 열기가 느껴진다.”
고 이옥순 씨 (원풍노조 총무, 서울노동운동연합 부위원장 등)의 딸 권다정(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2)은 그 온기로 엄마 없는 어린 날을 견뎠고 건강한 대학생이 되어있다. 통일혁명당 사건 장기수 출신(권낙기 씨)인 아버지와 노동운동가였던 엄마의 삶은 딸 다정에게 어떤 줄기를 형성했을까.



엄마가 남긴 것은?

내가 막 열 살이 되던 2001년 2월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후 성당에서 기도하는 시간 외에도 해를 보고도 달을 보고도 늘 기도했고, 마지막에는 꼭 ‘엄마’를 부르면서 마무리했다. 엄마는 나에게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엄마가 쓴 책은 표지만 봐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늘 엄마의 책을 마음에 품고 있었고 엄마는 참 멋진 사람이라고 느꼈다. 엄마는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던 때부터 노동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나는 들으면서 심장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그 뜨거움이 무엇인지 어릴 때는 몰랐지만 고등학교 때 이해했다. 어릴 때부터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하면 부모님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남긴 책『나 이제 주인 되어』는 나의 삶에 하나의 지침 같은 것이 되었다. ‘내 삶에 내가 주인이 되는 것, 비굴하게 복종하거나 부정한 타협을 거부하고 자존을 지키는 주인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엄마가 남긴 큰 유산이 되었다.

사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어릴 때는 엄마의 늘 바쁜 모습이 싫을 때도 있었고, 다른 엄마들처럼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것이 싫기도 했었다. 그러나 엄마는 너무 짧은 기억을 남기고, 8살짜리 동생에게는 그 나마의 기억도 남기지 못한 채 떠나버렸다. 어느 날 아빠와 심하게 다투었는데 아빠가 말했다. “엄마 죽어도 울지도 않은 독한 것”이라고. 울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독해 보였나보다.

엄마가 병실에 누워있을 때부터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던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동생이 큰 소리로 울고 있는데도 ‘나는 울지 말아야지’ 하고 기를 썼다. ‘좋게 보내드려야 한다. 울면 안 된다.’ 자꾸 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다정이는 애늙은이 같다.”고 하셨다. 대안학교인 금산간디고등학교 3학년 때 졸업논문을 써야하는데 주제가 ‘자기 들여다보기’였다. 그때 심리관련 책도 읽으며 곰곰이 되짚어 나를 들여다보았다.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엄마의 빈자리가 남긴 결핍감, 지금은 대화를 많이 나누는 아빠지만 어릴 때는 별로 자상하지 않았던 ‘경상도 사람’ 아빠,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나는 힘들었으면서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 아이였다. 비로소 나는 ‘내 안의 아이’를 가만히 보듬고 따뜻한 눈물을 흘려주었다.

결핍을 느낀 적은 많지만 부모님 삶의 줄기는 내개 늘 자부심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대학에 와서 공부하면서 자부심은 더 커졌다.

지난 시월 원풍노조 행사 때는 원풍노조원의 자녀인 다른 한 친구와 영상물제작 작업을 맡았고 여름 방학동안 작업을 해서 행사장에 내놓았다.



신방과 학생이라는 것이 그 일을 맡게 된 직접적 계기이긴 했지만, 엄마들의 노조운동을 편집하면서 ‘이옥순의 딸 권다정’으로 엄마의 ‘동지’들이었던 이모들 앞에 서서 엄마를 되살리고 싶었다. 영상물에 담기위해 들추어 본 빛바랜 노동조합 사진첩에서 이십대의 엄마가 스물한 살 내 모습을 닮은 채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어느새 아스팔트 위를 경찰에게 끌려가는 처절함으로 바뀌었고 농성장에서 솜처럼 늘어져있기도 했다. 영상물을 완성해가는 동안 마음이 수천 번 요동을 쳤다. 그리고 여러 날 밤을 지새우며 완성했다. 짧은 영상물이고 미숙련의 부족함으로 허술했지만 자녀들이 엄마들의 역사를 담아주었다는 의미만으로 이모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나는 가만히 엄마의 삶에 경의를 표했다.

대안 중,고등학교와 성공회대 선택?

중학교는 아빠가 권하셨고 고등학교는 스스로 정했다. 검정고시를 봤고, 대학은 아빠가 추천하셨지만 신방과가 있어서 응했다. 영상물을 통해 역사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 있었다. 현실감각이 떨어진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스펙에 연연하지 않는다.

엄마시대의 삶을 보면서‘아! 이게 공동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너무 개인주의화되어있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청춘들의 중요성도 달라진 것 같다. 혼자 잘되려고 한 곳만 보고 가는 느낌이다. 나는 여전히 같이 힘들고 같이 따뜻한 공동체를 꿈꾸는데 친구들과 이야기가 갈라지는 적이 많다. 졸업 후가 두렵지 않다. 옳은 거니까. 그리고 나는 청춘이니까.

‘어울림 속에 하나 되는’ 슬로건 걸고 과대표로 선출

언젠가 하종강 선생의 강의를 들었는데‘대학 다니면 대학에 기여’해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과대표로 출마한 나의 선거 슬로건은‘어울림 속에 하나 되는 미래 신방’이었다. 어울림이 적은 것 같고 참여도 저조하고 해서…함께 걷는‘동행’을 통해 바꿔보고 싶었다. 학우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엄마가 그랬듯이 사람을 좋아하고 함께 하려고 했던 태도가 알게 모르게 배어들은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막연히 인식했던 엄마의 꿈들이 대학에 와서 확실해지더니 지금은 뭉클하다.
대학 와서 반값등록금투쟁‘당연히’나갔고, 제주 강정마을도 다녀왔고, 쌍용차 투쟁현장, 희망버스도 탔다. 아직은 사회를 배우는 중이지만 척박한 현장에 작은 몸 하나 보탤 수 있어 스스로 감사하고 대견해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방송프로듀서로 일하고 싶다.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일하고 싶은 꿈, ‘함께 꾸면’현실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엄마가 되고 나이를 먹어도 계속 내 자리에 잘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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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권력이나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온갖 술수를 동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그 무엇에 따라, 또 자식들이 그 무엇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삶은 다른 줄기로 뻗게 된다. 다정이가 물려받은 것은 부나 권력의 노예가 아닌 인생의‘주인’이 되라는 것이었고,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공동체적 가치였다.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열정을 다했던 부모의 그 유산이 앞으로 다정이의 인생에 무엇을 가져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유산으로 인해 지금 다정이가 반짝이고 있다는‘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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