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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민주주의의실천광장 서울대학교아크로폴리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11. 15:38
 

 
저항과 투쟁의 무대
 
광장은 민주주의와 운명을 함께 해왔다. 해방 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1960년 4.19 혁명.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된 그 날의 광장 은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 의사당 앞이었다. 대학생들은 의사당 앞에 모여‘부정선거 다시 하라! 민주주의 수호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국회 의사당을 거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하자 경찰은 이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 때 광장은 피로 얼룩졌다.
1970년대는 광장이 사라진 시대였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긴급조치를 앞세워 국민의입에 재갈을 물리고 폭력으로 손발을 묶었다. 시위와 집회는 저지선이 따로 없었고, 대학생들은 학교정문 밖 진출을 꿈도 꾸지 못했다. 사복경찰은 강의실에도 들어와 있었고, 교정에서조차 무리지어 있는 학생들은 공권력의 표적이 되었다. 경찰의 저지선 이 학교 담장을 넘어 도심으로 확대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박정희가 측근에게살해당한 뒤 찾아온 1980년 서울의 봄. 그 짧은 희망이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으 로 물거품이 되자, 서울대학교 학생들은그를 규탄하기 위해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모였다. 모인 학생 수가1만 명이 넘었다. 그 규모에 놀라 서로 감 격의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아크로폴리스는‘민주’를 상징하는 광장이다. 고대 희랍의 아크로폴리스가 민주주의의 시연장이었다면, 서울대 아크로폴리스는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저항 과 투쟁의 실천 무대였다.

특히 서울대가관악 캠퍼스로 이전한 1975년 이후 80년 대와 90년대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군사독재권력과 싸워 민주와 통일을 부르 짖으며 몸과 혼을 불태운 학생운동의 성지이며 역사의 현장이다.
 
1980년 5월 민중항쟁을 총칼로 제압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김대중을 비롯한 문익환,고은 등 민주 인사 37명을 계엄법, 반공법, 국가보안법이란 근거를 들어 내란음모 (1980.7.4)죄로 구금했다.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8월 27일, 마침내 그들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11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후 전두환은 국민투표(10.23)를 거쳐 5공화국 헌법을 만들고, 27일에는 국회를 해산,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발족하여 법적 조치들을 마련,‘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정치풍토쇄신 특별조치법’, 국가보안법 등을 개정하거나 제정했다. 피와 학살을 주저하지 않는 그의 이러한 야만적 권력욕 앞에 민중은 절망하거나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뜨거운 함성이일었다. 외침은 처절했으며, 그 핏빛울림이 민주와 통일의 꽃망울이 되어 관악을 흔들고 조국의 산하를 덮기 시작했다. 서울대 아크로폴리스는 그 무렵부터 주요 정치적 국면 때마다 저항과 투쟁의 진원지가 되었다. 학생운동의 리더는 물론 문익환 목사 같은 재야인사들도 수시로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수배, 구금의 길을 밟았다. 당시 아크로폴리스는‘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위험을 감수하는 공간이었다.
 
아크로폴리스가 목격한 수많은 열사의 죽음과 외침
 
“그때는 뒤로 보이는 저 도서관의 난간이 온통 쇠창살로 가로막혀 있었어요.”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만난 고원(45) 씨는 1984년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2학년으로 학생회 간부로 활동했다. 그가 상기된 얼굴로 중앙도서관을 가리켰다.“ 지금은 광장이 이렇게 조경이 되어 있지만, 제가 다니던 1980년대 중반엔 장미가 빽빽이 심어져 있었어요. 참 아이러니 하지요. 전두환이 집권하고 한때 학원자율화니 뭐니 유화책을 쓰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게 얼마나 거짓 정책이었는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지요.”
음울한 캠퍼스에 피어난 붉은 장미들, 그 기막힌 부조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학생들이 모이는 자체를 두려워한 학교 측의 고육책이었을 것이 분명한데, 어쨌든 그것은 장미의 가시처럼 학생들의 정신을 찔러 상처를 냈을 것이었다. 1983년 12월 21일 전두환 정권은 5.17이후 제적된 학생들에 대한 복교허용조치를 발표했다.
 
 
전정권이 탄압 일변도의 강경책에서 이른바‘학원자율화’라고 불리는 유화책으로 정책을 변경한 데는1986년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의 영향이 컸다. 인권탄압국가라는 이미지로는 전 지구적인 잔치를치를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제 강경책으로도 더 이상 학원 문제를 해결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5.17이후 1983년 12월까지 학원 사태로 제적당한 학생은 전국 65개 대학,총 1천 3백여 명이었다. 이는 유신 7년 동안 786명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1983년 한 해만 327명에 달했다. 전두환 정권은 무언가 정책의 전환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학원자율화조치는 1984년 벽두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제적생들이 학교별로 복교대책위 를 구성하여 복교에 앞서 사회 전반의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재학생들은 학원자율화조치로 열린 공간을이용하여 학생운동의 대중적 기반 확산 에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1984년 10월24일 서울대에서 총학생회장 이정우등을 제명 조치한 것에 항의하여 학생들이 중간고사를 거부하자 전두환 정권 은 다시 경찰을 학내에 진주시켰다. 이것으로써 이른바 학원자율화조치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학생회를 지키기 위해 운동권뿐만아니라, 일반 학생들까지 참여해 저항했습니다. 수천 명이 넘게 운집하곤 했습니다. 곳곳에 들어와 있던 사복경찰들을 피해 자연대 건물이나 학생회관도서관 난간에서 선언문이나 구호들을뿌리고 내걸었습니다. 그때 이 광장의장미를 뽑았습니다. 뽑고, 던지고……모였습니다.” 고원 씨가 느닷없이 그때를 떠올리며낮게 그러나 북받치듯 운동가를 불렀다.

장미꽃 만발한 아크로폴리스 쇠창살 둘러친 면학의 도서관
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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