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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민중의 땅 위에 정의의 북소리를 울린 성남 주민교회 본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가난한 민중의 땅 위에 정의의 북소리를 울린 성남 주민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5. 22. 16:01
 

주민을 섬기는 교회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 2동 7288-11. 태평로 삼거리에서 북쪽 방향으로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다가 시청 정문 앞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오십 걸음 정도 들어가면 길 옆 낮은 땅 아래로 성남 주민교회가 나타난다. 시민의 고단한 삶 위에 끊임없이 군림하기 위해 위엄과 권위의 모습으로 날로 몸집을 불려가며 위용을 떨치는 관공서. 그 담벼락 아래로 낮게 자리한 주민교회의 첨탑은 그러나 높지 않고 십자가 또한 주변의 여느 교회의 것처럼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외국인 노동자의 집·중국동포의 집’ 이라는 간판과 ‘지역 아동센터’ 안내문이 바깥 벽에 큼직하게 붙어 있어서 쉽게 그 정체를 알 수 있게 한다.
주민교회의 역사는 1973년, 이 땅이 오랜 시간 군부 독재에 얼어가고 민중이 가난과 폭압으로 병들어갈 때,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위원장 박형규 목사)가 성남 지역의 빈민 선교를 위해 젊은 전도사 이해학을 파송하면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초부터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소외당하고 정치적으로 억눌리던 수많은 도시 빈민, 철거민, 노동자들이 정부의 졸속적인 이주정책에 쫓겨 와 만들어진 도시. 그곳에서 주민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꼴찌들과 더불어 해방된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모여 ‘주민과 함께 사는 주민공동체’라는 선교 표어를 걸고 ‘정의의 터, 진리의 기둥’임을 천명하며 민족교회로 첫발을 내딛었다.


 

주민과 함께 사는 생명 공동체

“처음엔 좌절도 많이 했어요. 이미 이전에 기독교학생사회개발단(KSCF)의 권호경 목사가 파견되어 주민의 절박한 요구인 주민자치병원을 설립하려던 계획이 10월 유신 계엄령(1972.10.17)으로 무산된 터여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보였던 거지요. 나를 위험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많았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골목길에서 아이들과 함께 구슬치기며 딱지치기, 탁구를 하며 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친해지자 아이들이 늘어났고 그것이 점차 자연스럽게 조직이 되어 누나로, 형으로, 어른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지난 35년 동안 주민교회와 함께 억눌린 자들의 인권을 위하여 모든 구조 악과 싸워온 이해학(주민교회 목사, 62세) 목사의 증언이다.
그 뒤 주민교회는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빈민선교),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정의 실현), 눈 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의식화),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며(인간회복),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새역사)’ 라는 말씀으로 올바른 신앙을 실천하고자 역사 변혁의 험난한 길을 걸었다.
폐품을 모아 팔아서 어린이 도서관을 만들고 교회의 일부를 잠잘 곳 없는 소외된 사람들과 병든 사람 그리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공간으로 내주기도 하며 민중선교의 길을 개척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젊은 이해학 전도사가 있었다. 해방둥이로 태어나 소년기에 벌써 참혹한 전쟁(빨치산 소탕전)을 목격하고 4·19 혁명의 광장에서 교복을 입은 채 경찰의 폭력으로 죽음 직전까지 다다랐던 그는 그 무렵 이미 이 땅에 정의와 진리의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한 신앙적인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독립만세의 함성이 한반도에 힘차게 울려 퍼진 3·1절에 맞추어 창립한 성남주민교회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주민교회는 창립 첫해의 성탄절 예배를 김포국제공항 대합실에서 치뤘다. 청년들과 밤새워 토론한 뒤에 결정한 일이었다. 그곳은 외채가 들고나는 외환 장소이자 대일 굴욕외교의 통로이며 매춘관광의 통로로써 민족정기를 위태롭게 하는 상징적 장소인 탓이었다. 김포국제공항이야말로 오늘의 역사 속에 예수님이 오셔서 누우실 구유의 장소로 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배가 시작된 지 채 십분도 못 되어서 교인들이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경찰은 그들을 끌고 가 두들겨 패면서 이해학 전도사가 빨갱이냐고 집요하게 다그쳤다. 그러나 어린 학생들은 맞으면서도 끝까지 아니라며 울부짖었다.주민교회의 시련은 그 뒤로도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독재 정권과 싸우며 박해와 탄압을 받은 지난한 투쟁의 기록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주민교회의 역사는 1973년, 이 땅이 오랜 시간 군부 독재에 얼어가고 민중이 가난과 폭압으로 병들어갈 때,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위원장 박형규 목사)가 성남 지역의 빈민 선교를 위해 젊은 전도사 이해학을 파송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난의 길 위에서 민주의 횃불을 들다

1973년은 유신정국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가운데 김대중 납치사건과 서울대 최종길 교수 의문사사건이 일어나고 전국 각 대학 동맹휴학, 함석헌과 홍남순 등 15인이 참여한 ‘11·5 지식인 시국선언’,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이 주도한 ‘유신헌법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이 전개된 시기였다. 그래서 잠시나마 민주화의 봄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자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및 헌법 개폐를 주장·발의·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긴급조치 1·2호(1974.1.8)를 선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민교회의 이해학은 더 이상 선교활동을 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권호경 목사를 비롯한 김동완, 허병섭, 인명진, 이규상, 박창빈 등과 긴급조치에 저항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개헌청원서명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체포되어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곧바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주민교회의 이해학 전도사는 이때(1974.1.17) 긴급조치 1·2호 위반으로 1·2심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일년여 뒤, 이해학이 형 집행정지로 감옥을 나왔을 때는 교회가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세 들었던 건물에서 쫓겨나 있었다. 하지만 주민교회는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노회의 도움을 받아 새 터를 마련하고 교회 안에 해고노동자를 위한 상담소와 야간학교 그리고 공공 구판사업과 의료협동 공동체와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병든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이 치료받을 수 있게 했다

 

교인들은 정보기관의 극심한 감시와 방해 속에서도 열심히 모였다. 그러나 주민교회는 1976년 봄에 또 한번 크나큰 시련을 겪는다.
그 해 3월 1일, 교회 창립 3주년 및 3·1절 기념행사에 강사로 왔던 문익환 목사는 그 길로 명동성당에 가서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정부전복내란음모죄’라는 죄목으로 수감되었다. 이른 바 3·1민주구국선언문사건. 그 선언문에 서명했던 사람들이 무더기로 체포 수감되었는데, 함석헌 선생은 수염이 뽑히고 이우정 선생은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얻어맞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언론은 진실을 알리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다.
그때 이해학 전도사의 품에는 마침 그날 정부에 모두 압수되었던 ‘민주구국선언문’ 한 부가 들려져 있었다. 주민교회에서 문익환 목사가 그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이해학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세상에 진실을 알리라는 명령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믐 곧바로 청년회장 김금용(현 남원제일교회 목사)을 시켜 복사하여 배포토록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집요하고 살벌한 경찰 그물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의 수난과 공포가 또 다시 시작되었다. 야간학교는 강제로 폐쇄되었고 학생을 가르치던 대학생들은 학교에서 제적되었으며, 의료협동회의 중지, 전 교인이 감시와 가택수색을 당했다. 정보기관에서는 피신한 이해학 전도사를 두고 3·8선을 넘어갔을 거라는 흉흉한 소문을 퍼뜨리기 일쑤였고, 교인들에게는 “왜 하필 빨갱이 교회를 다니느냐? 다른 교회를 다니면 집사를 시켜주겠다. 집을 사주겠다.” 따위의 갖은 협박과 회유를 자행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굴하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이해학 전도사는 그해 9월 자수를 하였고, 3년 형을 언도받아 안양교도소 독방에서 2년을 보내게 된다.
영원한 노동자 김종태 열사
한 시퍼런 젊은이가 1980년 6월 9일 신촌 이대 앞 네거리에서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 훨훨 타서 숨져갔다. 1958년 부산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남의 집 고용살이로 떠돌며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야간학교를 다니던 어린 노동자. 먹고사는 문제로 장기결석을 해야만 했던, 그러나 야간학교(성남제일실업중학)가 생긴 이래 최초의 검정고시 합격자가 된 그. 하지만 끝내 이 땅에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포함한 민주인사 석방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를 외치며 쓰러져간 그, 김종태! 그는 성남주민교회의 청년 회원이었다.


 



1960년대 초부터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소외당하고 정치적으로 억눌리던 수많은 도시 빈민, 철거민, 노동자들이 정부의 졸속적인 이주저액에 쫓겨 와 만들어진 도시 성남, 그 과정에 주민교회가 함께 있었다.


“그는 너무도 깨끗한 청년이었습니다. 무자비한 군사독재 권력에 저항한 광주의 아픔(1980년 5월 민주항쟁)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인식하고 자기 몸에 불을 살랐어요. 유서가 있었어요.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남긴 글과 나에게 남긴 유서 그리고 성명서와 시편입니다. 대학생들도 놀라워할 정도의 명문입니다. 참 아까운 나이에 스러져갔습니다. 지금도 그때가 되면 광주묘역을 참배하고 추모제를 엽니다. 김종태 열사 추모제가 우리 교회와 성남시의 또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이해학 목사가 그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결국 그러한 저항과 은혜가 전환점이 되어 1987년 민주항쟁으로 이어지고 오늘 우리 교회가 이웃과 함께 생활공동체,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고 민족이 하나 되는 통일공동체를 위해 믿음의 행진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해학 목사는 이 땅에서 또 다른 노동자 김종태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 주민교회는 약한 자와 억눌린 자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전파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뿐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사는 여러 민족 이주노동자의 고단한 삶 위에도 똑같이 해당된다고 했다. 겨울 한낮 밖은, 성남 주민교회의 낮은 첨탑 위로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글 홍인기 | icwriters@hanmir.com
1960년 출생. 199년 '작가들'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숲의 기억'이 있으며, 한국작가회의와 문학네트워크 리얼리스트100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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