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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재야 운동의 본거지였던 장충동 분도회관 본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1980년대 재야 운동의 본거지였던 장충동 분도회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11. 09:54
 

장충동 족발집 거리의 분도회관

서울 사람이 아니라도 장충동이라는 지명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배달 야식 메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족발. 많은 업체들이 ‘장충동’ 원조 경쟁을 벌이며 서울 전 지역은 물론이고 전국에 점포망을 형성해 놓은 덕분이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사거리에서 장충체육관을 뒤로하고 서북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족발집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북한 음식인 족발이 장충동의 상징이 된 것은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충동의 족발집은 대부분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원로 인사였던 문익환, 백기완, 계훈제 선생의 고향도 이북이어서 단골로 드나드는 집이 몇 군데 있었다고 한다.
1985년에 결성된 민통련은 분도회관 4층에 사무실을 열었다. 지금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분도회관을 찾으려면 족발집 거리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는 수정약국이나 역시 이북 출신 집안이 3대째 운영하고 있는 평양냉면 건물을 찾는 것이 빠르다. 분도회관은 그 맞은편에 자리한 지하 1층, 지상 5층짜리 건물인데, 언제 바뀌었는지 ‘분도회관’이 아니라 ‘분도빌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1층에는 분도출판사가 있다. 베네딕도회가 문화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한 출판사로 ‘분도’는 ‘베네딕도’의 중국어 음역이다. 수도회 본원이 있는 경북 칠곡의 왜관읍에 본사가 있고 장충동에 분도회관을 지으면서 지사를 두었는데, 민통련에서 활동하던 이들 중에 종교계가 꽤 많았기에 이곳에 사무실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분도회관 1층에 있는 분도출판사는 베네딕도회가 문화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설립한 출판사다.
 

분도회관 앞에서 당시 민통련 간사를 지낸 이명식 씨(52세)를 만나 그의 안내를 받으며 4층으로 올라갔다. 그때는 없던 엘리베이터가 생긴 것 말고는 내부 구조에 큰 변화는 없다고 한다. 복도 양쪽으로 다양한 업체가 입주해 있었고, 길가 쪽으로 난 사무실 중 맨 안쪽이 민통련 사무실이었다. 그때는 다단계 판매회사로 추정되는 업체들이 들고 나기를 곧잘 하느라 사무실이 자주 비곤 했는데, 바로 옆 사무실은 평수가 넓어 민통련에서 강당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이명식 씨는 민통련이 결성될 때부터 해산될 때까지 간사로 활동했으며, 결성 이듬해인 1986년에 강제 폐쇄될 때까지 분도회관 사무실을 지켰다.


군사정권의 가장 강력한 대항세력으로 떠오른 민통련

제도 정치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1980년 민중항쟁을 겪으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의 변모를 꾀하게 된다. 각 부문과 지역에서 공개적인 연대조직을 꾀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1983년에 그 첫 깃발을 올린 것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다.
민청련의 출범으로 민주화운동 세력 전반에 스며있던 패배감이 걷히면서 새로운 활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후 기다렸다는 듯이 결성된 부문 조직이 10여 개에 이른다. 교육, 문화, 언론, 종교, 노동 등 전 부문에서 공개적으로 조직을 결성했고, 지역에서의 조직 결성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중에서 1984년 6월 29일에 결성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는 민청련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로 각 부문 조직 간의 협의체적 성격이 강했으며, 아직 성숙하지 않은 기층 민중의 대중운동 역량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군사정권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사회 전반의 민주화 열망을 모아 하나의 세력으로 결집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같은 해 10월 16일에 결성된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는 이러한 민민협과는 대립적이면서도 보완적인 성격을 띠었다. 대중운동 단체보다는 개인 회원을 기반으로 삼았으며, 대중조직을 강화하기보다는 당면한 투쟁을 중시한 국민회의는 문익환, 장기표 등 명망 있는 재야 원로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운동 역량이 부족한 각 지역 단체의 지지를 받았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한 두 단체는 상대 단체를 통해 돌파구를 찾고자 했고, 그해 11월부터 두 단체의 통합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서로 다른 노선을 조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오랜 진통과 논의 끝에 1985년 3월 29일, 장충동 분도회관에서 통합대회를 열어 민통련을 출범시켰고, 문익환 목사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출범 당시에는 10여 개 단체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25개로 늘어났으며, 단체뿐만 아니라 개인 회원도 받아들였다. 각 부문운동 세력과 지역운동 세력이 총집결한 민통련은 군사정권의 가장 강력한 대항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때부터 분도회관은 민통련의 사무실이자 1980년대 재야 운동의 본거지로 떠올랐다. 이명식 씨는 당시의 사무실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가장 막내였어요. 워낙 재야의 어르신인 문익환, 계훈제 같은 분들이 매일 나오셨고, 30대부터 50대까지 연배별로 많은 분들이 오셨죠. 노동, 종교, 문화, 여성, 농민 등 전 부문에 걸쳐 지도자급 회의도 자주 열렸고 아주 활기찼어요.”
당시 민통련은 각 지역과 각 부문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통합되는 곳이었다. 끊임없이 연대와 지원을 결정하고 공동과제를 논의하는 장소였으니, 민주화 운동 세력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일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명식 씨는 이곳의 주역은 다른 분들인데 맨 밑자리를 차지했던 자신이 인터뷰를 하러 나올 자리가 아니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대학 제학 중 제적을 당한 그는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거쳐 국민회의 간사로 활동했으며, 민민협과 국민회의가 통합되면서 자연스럽게 민통련 간사를 맡게 되었다. 제적생으로 사회에 나온 그에게 민통련은 세상을 폭 넓게 볼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준 고마운 존재다.
  민통련 사무실 자리인 분도회관 내 4층 사무실, 이곳에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던 민통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민통련 간사로 활동했던 이명식 씨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강제 폐쇄되다

민통련은 생존권 지원 투쟁과 정치 투쟁을 병행해나갔다. 구로지역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나 농민들의 소몰이 투쟁 등 정치적으로 큰 사안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결합했다. 동시에 전국적인 중심체로 만들기 위해 전국에 걸쳐 지부를 결성해나갔다.
1985년은 기층 민중으로 확산된 군사정권 반대투쟁이 그 절정에 이른 때였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했다. 탄압은 파상적으로 이어졌고, 그 와중에 김근태 민청련 의장에 대한 고문 사실이 드러나면서 민통련과 신한민주당(신민당),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수사 및 용공조작대책위원회(고문공대위)’를 결성했다. 민추협은 김영삼, 김대중 양 김 씨를 따르던 야당 인사들이 연합하여 만든 재야 정치단체로 공대위는 민주화 세력과 양 김 씨 사이의 최초의 연대 모임이었다.


  민통련은 결국 1987년 정권교체 국면으로 접어들면 전면적인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때 민통련이 지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안으로는 ‘군사독재퇴진 및 민주헌법쟁취위원회’를 설치하고, 밖으로는 정치권과의 공조를 도모하면서 정치투쟁에 힘을 실어나갔다. 1986년은 어느 때보다 반독재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해였고, 민통련은 그 열기를 이어가기 위해 양 김 씨와 민통련 간의 비상설 연락기구인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를 구성해 개헌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신한민주당(신민당)은 국회 밖으로 나와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3월 11일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대회’를 열었고, 5월 말까지 부산, 대구, 대전, 인천, 마산, 전주 등의 순서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개헌 현판식을 진행했다. 현판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동안 억눌려 온 민중들의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이 모처럼만에 생긴 합법적인 공간을 통해 분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김세진, 이재호의 분신 사건이 일어난 후 민국련이 와해되고 민통련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민국련은 양 김 씨의 의사대로 학생들의 반미·용공·과격 시위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것은 민통련의 입장과 기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므로 민국련을 탈퇴하는 한편,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도부가 총사퇴하겠다고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사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곧 다가오는 5월 3일 인천지역의 개헌 현판식에 맞춰 대규모 집회가 예정된 터라 지도부의 사퇴는 그 이후로 보류되었다가 5·3 인천사태의 배후 조종자로 민통련이 지목되어 문익환 의장과 장기표 정책실장이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인천시민회관 일대에는 3만여 명이 모여들었고, 대회 초반부터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민통련의 계획과는 달랐다.



분도회관, 그렇게 민통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곳에서 활동했던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터이다.
이명식 씨는 그 중에서도 특히 분도회관 시절의 민통련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전한다.

“민통련 지도부는 선제공격을 하지 말고 시간을 끌면서 하룻밤을 세우자고 방침을 정했어요. 집회를 장시간 끌고 가다 보니 간부 대부분이 연단에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게 되고, 하나하나 카메라에 찍힌 얼굴이 방송에까지 나갔어요. 그것이 배후로 지목되기에 좋은 빌미가 되었죠.”
집회는 여러 군데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다른 진영에서 선제공격을 함으로써 경찰과의 물리적인 충돌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정권으로서는 거대 조직인 민통련을 공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일로 인해 구속된 장기표 씨가 가지고 있던 초안을 빌미로 민통련을 용공단체로 몰아 주요 간부 전원을 지명수배하기에 이르렀고, 11월 12일 분도회관 사무실 문을 용접기로 땜질함으로써 강제 폐쇄해버렸다.
그 후, 남영동 대공분실 바로 건너편에 비밀연락 장소를 마련해 사용하다 공간이 너무 협소해 을지로5가 냉면집 골목으로 옮겼다. 1987년 6월항쟁 이후에 구속된 사람들이 모두 석방되면서 같은 장소에서 개소식을 다시 열고 몇 달 사용하다 종로3가로 다시 옮겼다.


수위실 안의 구조는 나무 목재로 리모델링이 거의 되지 않았음에도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민통련

그러는 동안 민통련은 제도권 정치세력과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총망라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국본을 통하여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여전히 명실상부한 민주화운동 조직으로서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6·29 선언 이후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고, 대선 전략을 두고 내홍을 겪으면서 사실상 분열되었다. 또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결정하였으나, 결국 대선에서 패배함으로써 국민들의 신망을 잃기 시작했다. 그 후 1년여가 지난 1989년 1월에 해산하면서 민통련을 계승하여 전국적인 통합조직으로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 종로3가 사무실을 넘겨주었다.
그렇게 민통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곳에서 활동했던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터이다. 이명식 씨는 그 중에서도 특히 분도회관 시절의 민통련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전한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희망이 있었기에 열심히 일했고 많은 것을 배우게 해준 곳이었으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인터뷰를 마치자 그는 그 시절, 강연을 다녀온 어르신들이 고생한다며 강연료를 털어 맛있는 음식을 사주곤 했는데, 그 맛을 다시 느끼고 싶다며 나를 가까운 족발집으로 이끌었다.

글 류외향 |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9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와 『푸른 손들의 꽃밭』이 있다.

사진 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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