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99)
함께쓰는 민주주의
원진레이온(주)은 국내 유일한 비스코스 인견사(레이온)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설립 당시 회사명은 흥한화학(주)이었으며, 1964년에 일본 도레이레이온사의 중고 기계를 들여와 1966년 처음 가동되기 시작한 이 공장에는 노동자를 보호하려는 안전설비가 결여된 채 수많은 노동자를 이황화탄소(CS2)에 노출시켰다. 한때 호황을 누리며 흑자를 냈지만 60년대 중반 이후 합성섬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계 국면을 맞이하자 사업주가 두 번 바뀐 다음 76년 원진레이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견사는 석유화학 원료인 벤젠을 기초 원료로 하는 합성섬유와 달리 펄프를 재료로 하며, 펄프에서 실을 뽑아내는 과정에서 대량의 이황화탄소 등 화공약품이 투입된다. 특히 문제가 된 이황화탄소는 2차 대전 때 독일이 신경독가스의 원료로..
전국에 걸쳐 비가 오리라는 일기예보는 틀리지 않았다. 원주에도 어김없이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원주에 도착하여 맨 처음 찾아간 곳은 원주자활후견기관이었다. 이 기관이 입주해 있는 건물은 원래 천주교 원주교구의 교육관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입구 오른쪽의 단층 건물에는 원주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이 자리 잡고 있다.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마당을 가로지르면 낡은 2층 건물의 현관에 닿는다. 한눈에도 퍽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원주자활후견기관의 간사로 활동하는 정인재(62) 선생은 이 건물의 변천사를 일러 주었다. “원래 1967년 이 건물은 기숙사로 지어졌어요. 시골에서 올라 온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곳이었죠. 저 앞에 생활협동조합이 들어선 단층 건물은 강의실이었지요. 그 뒤 1973년부터 원주교구에..
고대 그리스의 아케데모스 숲 속에서 철학자들이 벌였던 대화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넘어 고대 철학자들이 그랬듯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또한 그들은 학문적인 영역에 머물러 현학적으로 되는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을 비켜가지 않는다. 그러한 갈등과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해결점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아카데미란 아카데미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지성이어야 한다는 걸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바로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거쳐 간 지성들이 그들이다. 중간집단 육성 프로그램의 단절 1979년 3월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커다란 시련에 부딪힌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채 스무 살도 안 된 앳된 소녀들이 한겨울 날선 바람에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공단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 달 내내 동굴 같은 작업장에서 먼지를 먹어가며 일해 봐야 그들 손에 쥐어지는 돈은 단 몇 푼. 그러나 소녀들은 그 돈을 아끼고 아껴 시집갈 밑천을 삼거나, 동생 학비를 보태거나, 부모님 병원비를 대거나, 한 가지도 불가능해 보이건만, 그 많은 일을 해왔다. 그리고 지금 그 소녀들은 어느덧 중년의 여성이 되어 있다. 그 많던 소녀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후레아 패션에 입사했던 박경이 씨도 지금은 중학생 딸을 둔 마흔 다섯의 중년의 여성이 되어 있다. 이리 수출자유지역 수출자유지역이란 세관의 수속 없이 특정지역에 상품을 반입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고 자유롭게 상품을 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구로구에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한 건 1965년이다. 지금도 많은 공장이 공업단지 지역 외곽의 구로동, 고척동, 신도림동, 오류동, 개봉동에 널려있으며, 서울의 금속기계 공장의 4분의 1 이상이 구로구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구로구에는 대규모 공구상가도 자리 잡고 있어 가히 공업도시라 일컬을 만하다. 그래서 7,80년대 구로지역은 잿빛이었다. 단순히 이미지로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구로는 변했다. 이제는 잿빛의 이미지보다 서울의 여타 지역과 비교해도 뚜렷이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보편적인 이미지를 지닌 곳으로 바뀌었다. 잘 정비된 가로와 길을 걷는 사람들의 화사한 옷차림, 세련된 마감재로 우뚝 선 고층 건물들은 과거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 하..
옛 서울대 문리대 터, 마로니에 공원 -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차에 적셔먹는 마들렌이라는 과자를 통해 과거를 복원해낸다. 마들렌만의 독특한 맛과 향이 그와 관련된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마들렌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씁쓸하기도 하고 때로는 달콤하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씁쓸하면서 달콤하기도 하다. 그래서 마로니에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씁쓸한 기억을 가지고 누군가는 달콤한 기억을 가지고 이곳을 찾는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박건이 부른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흥얼거리는 이가 있다면, 그는 분명 마로니에 공원에 관한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게다. 한일 회담 반대운동의 진원지 마로니에..
10․28 건대항쟁의 현장을 찾아 -농성학생 대표 정현곤 씨 동행취재 태풍 ‘매미’가 지나가고 때늦은 더위가 찾아왔다. 부신 햇살을 받아 번득이는 건국대의 일감호 표면은 잘 닦은 유리 같았고 호수 주변을 산책하는 학생들의 얼굴은 모처럼 햇빛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하듯 싱싱하다. 등나무 그늘 아래 나무의자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는 학생들 틈에 끼어 1986년 당시 공안당국에서 공산혁명분자라 규정지었던 정현곤(40)씨를 만났다. 스물 셋의 공산혁명분자는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인지 이제 건국대를 찾아도 담담하다 말하며 살풋 웃는 그에게서 지난 세월의 상처는 쉽게 엿볼 수 없다. 정 씨는 서울대 지구과학과 83학번이다. 건대항쟁 당시에는 서울대 자민투 위원장이었으며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天網恢恢 疏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광대하여 성글어도 빠뜨리지 않는다.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하늘을 통일로만 바꾸면 이처럼 딱 들어맞는 말이 없지 싶다. 통일을 주제로 한다는 게 이처럼 곤혹스러울 줄 짐작도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분단된 시점부터 통일운동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1988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 조국통일 촉진운동을 선언하면서 통일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부문을 초월하여 통일운동은 모든 운동의 영역에 걸쳐 있다. 서울과 지방 가릴 것 없이 한반도 전체가 통일운동의 유적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통일, 이 낱말 하나가 하늘처럼 우리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다. 또한 통일은 쌍생아이다. 통일은 분단이란 낱..
■ 민주화 유적지 답사기 11 한국 민주화의 성지, 명동성당 - 1987년 6월의 명동성당, 그리고 2003년 - 명동은 새로운 것의 진원지이고, 서울 시민의 희망을 앞서 표현해내는 곳이다. 2003년 6월, 명동은 한여름 날씨처럼 후덥지근하고 구름은 낮게 깔려 분주하다. 젊은이들은 여름에 유행할 패션을 앞서 두르고 나와 명동 거리를 활보한다. 명동은 패션의 거리이고, 외국인을 포함해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서울의 축소판이다. 옷, 신발, 액세서리, 햄버거, 한․양식당, 퓨전요리점, 은행, 백화점, 호텔……. 새로 생기느니 쇼핑몰이요, 그 중 절반은 먹거리로 채워진다.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걷기 시작한 길은 명동으로 접어들며 자꾸만 늦춰진다. 볼거리가 많아지기도 했거니와 인파에 묻혀 발이 묶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