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99)
함께쓰는 민주주의
6월항쟁의 주요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과 영등포교도서 그리고 명동성당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 1987년 5월 18일 오후 7시경, 명동성당에 울려 퍼진 이 한 문장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박종철로 인해 시작된 민주화 투쟁은 4·13호헌조치 이후 다소 소극적이고 분산적인 개헌운동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의혹투성이인 박종철 죽음의 진실은 여전히 장막에 가려져 있었고, 전두환 정권은 그를 추도하기 위해 2월 7일과 3월 3일에 열린 대중 집회를 효과적으로 분쇄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만한 군부정권의 판단 착오였다.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추모미사에서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대표를 맡고 있던 김승훈 신부는 모두 10항으로 이뤄진 장문의 성명을 발표하..
자생적이고 독창적으로 싹튼 민중신학 1970, 80년대 한국의 기독교는 민주화운동의 맨 앞줄에 있었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에서 기독교는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깨우침을 얻고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 그때의 기독교는 지금과 달랐다. 노동자, 농민이 역사와 구원의 주체였으며, 교회는 민중을 보호하고 그 뜻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민중의 고난의 역사와 함께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이며, 그것이 바로 살아 숨 쉬는 성서의 메시지였다. 예수 자신이 민중이었고, 그러한 구원의 길을 실천한 메시아였기 때문에 그때의 신학자들은 이미 박제되고 죽어버린 ‘말씀’의 신학을 거부하고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연구하고 실천했다. 그리하여 197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 하에서 태어난..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이었던 수세 강물을 팔아 한몫 챙긴 봉이 김선달은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이다. 현대판 김선달이 팔아먹는 물품은 상수도에서부터 달나라 땅까지 다양한데, 아무튼 김선달은 환금될 수 없는 공공의 재산을 얄팍한 혹은 기막힌 상술로 팔아먹는 자를 빗대는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그렇다고 김선달이 백성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상대는 돈벌이에 혈안이 된 상인 혹은 양반네였다. 세균이 서식하는 ‘먹는 샘물’이나 성능 미달의 정수기를 파는 기업에 비하면 그는 그저 꾀 많고 해학이 넘치는 인물일 뿐이었고, 농민들을 상대로 강물 장사를 한 정부기관에 비하면 차라리 귀엽기까지 하다. 일제 강점기부터 2000년도까지 권력기관은 농민들로부터 수세를 징수해왔다. 수세란 쉽게 말하면 ‘..
한국 불교운동사 정점의 현장, 조계사 올해는 1987년으로부터 꼭 20년이 되는 해이다. 20년 전, 한 젊은이의 죽음은 민주화를 바라던 민중의 열망에 불을 지폈고 군부독재정권은 잠시나마 백기를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깨뜨린 보도블록 조각을 들고 싸웠으며, 최루탄 자욱한 시위 현장의 높은 빌딩 유리창에서 쏟아진 두루마리 휴지들은 마치 살풀이춤의 하얀 수건인양 너울너울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해 2월부터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산발적이면서 격렬한 시위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6월 10일 범국민대회를 시작으로 20여 일 동안 전국적으로 5백여 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집중적으로 일어났으며, 마침내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긴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는 결정적 동인이 된 6월..
“머릿속은 텅 비고 몸만 발악했습니다. 욕조의 물이 입으로 코로 눈으로 내 몸 안으로 액체덩어리처럼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 덩어리들이 내 몸 안의 이곳저곳을 사정없이 쑤셔댔습니다……. 나는 쿨럭쿨럭 토악질을 해대다가 멱이 따져 숨이 꺼져가는 돼지새끼처럼 컥컥 숨만 헐떡거렸습니다. 뱃속이 요동을 치고 목울대를 치면서 쓰디 쓴 물이 밀려나왔고, 다시 그 입 속으로 물이 흘러들어와 청산가리처럼 속을 태웠습니다. 그 역겨움으로 코가 막히고 입이 막혀, 빠져나갈 수 없는 숨결이 몸속을 불길처럼 벌겋게 달궜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디까지 고통을 줄 수 있을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을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일. 육체만 살아남아 발악하며 이성은 고사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재감마저 말살된 채 한 ..
강원도는 흰 눈과 검은 석탄이라는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폐광 후 14년이 지났어도 그 강렬한 대비는 여전히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다. 1993년 폐광이 되기 전까지 강원도 일대는 7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탄광도시의 명맥을 이어갔으니, 그러한 고정관념이 사라지려면 두 세대는 더 지나야 하지 않을까. 강원도는 일명 ‘검은 노다지’로 불리던 석탄으로 여러 차례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광부의 삶이 석탄산업의 활황을 맞는 것과 비례한 것은 아니었다. 밑바닥 인생을 흔히 ‘막장 인생’으로 비유하듯 캄캄한 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캐는 일은 고되기 그지없었고 처우가 열악했으며, 갱도가 무너져 목숨을 잃는 일도 잦았다. 1987년 탄광 대투쟁으로 쟁취한 민주화의 결실들은 불과 6, 7년 만에 탄광산..
5·18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들어선 군부 는 1980년 7월 30일 이른바 ‘7·30조치’를 단행하여 새로운 군부정권을 위한 교육통제 장치를 정비하는 한편 교사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더욱 강화하였다. 5공화국 시절 문교부(현재 교육인적자원부)는 각 시도교육위원회에 ‘전담실’을 설치해 교육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교사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관련 정보를 보고하도록 하고, ‘보안위원회’를 구성해 사립 중고교 교사채용 때 과거 전력 등을 조사하여 채용 여부를 판정했다. 반공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건전한 비판의식을 키워주는 교사들에게는 강제 연행, 장기 구금, 고문 등을 통해 좌경용공조작을 자행하여, 다수의 교사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신군부에 의한 폭정이 기승을 부리던 1982년,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
피(P) 언로가 차단되었던 1970~80년대, 정의와 진실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불법 인쇄물’이 유일했다. 그것은 대중을 향한 유일한 선전수단이었고,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감시망을 피해 점 조직으로 활동해야 했던 민주화 운동 세력의 용이한 지침서였다. 운동권 내부에서도, 그것을 감시하고 적발하기에 바빴던 형사들에게도 그러한 유인물들은 ‘피(P)’로 불렸다. 영어 ‘Paper’의 첫 글자를 딴 것이었지만, 군사독재에 대한 피 끓는 적개심과 분노를 표출하는 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상징적인 이름이었다. 그 시절, 시위 현장에서 어김없이 뿌려졌던 그 수많은 유인물들이 비밀리에 탄생한 곳이 바로 을지로 인쇄골목이다. 지금도 명보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원통골목 곳곳에 들어서 있는 인쇄소마다 연말을 ..
동양 최대 규모의 감옥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가려면 서울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려야 한다. 역사관을 포함하고 있는 독립공원이 그곳에 있고, 독립공원은 독립문 때문에 조성된 곳이니 역 이름이 독립문역인 것은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 취재를 오면서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관계가 새삼스러워졌다. 전자는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 러시아와 그 밖의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의 자주독립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1897년에 완공하였고, 후자는 그 11년 뒤인 1908년에 일본이 항일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의 규모로 지은 감옥이다. 이 둘이 한 공간 안에 있다. 원래 독립문은 현재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7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어쨌든 서대문형무소, 당시의 이름..
지리적 여건에서 받아들인 천주교 전북 익산시에 속해 있는 여산은 면 소재지로 충남 논산과 접해 있다. 내게는 생소한 지명이었으나, 천주교도들에겐 순교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천호성지에 이어 전주교구의 제 2의 성지라고 한다. 예로부터 여산은 충남과 전북을 잇는 호남의 첫 관문이어서 사람의 왕래가 잦았고, 같은 이유로 천주교의 전래도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빨랐다. 1866년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 당시 여산 인근의 산골짜기마다 숨어 지내던 수많은 신도들이 끌려와 처형을 당했다. 숲정이, 동헌과 기금터, 옥터, 배다리, 뒷말 치명터 등 여산 전체가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면을 한 바퀴 돌다보면 성당, 교회, 원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