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99)
함께쓰는 민주주의
근대문화와 식민이 공존한 부민관(현 서울시 의회) 국회의사당은 국회의원들이 의정활동을 수행하는 곳이다. 197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국회의사당은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의회민주주의의 불안정성을 반영하듯 제헌국회 때는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홀을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구 문화극장, 부산 문화극장, 경남도청 내 무덕진 등을 전전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4년~75년까지 서울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현 서울시의회)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다. 특히 22년 동안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된 서울시 의회 건물(등록 문화재 제11호)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은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을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각종 문헌이나 자료에 따르면 이 공간의 처음 명칭은 부민관(府民館)..
한국의 바스티유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이젠 안으로만 간직한 채, 서대문 시대 그 칠십구 년의 역사를 마감한 서대문형무소. ‘한국의 바스티유’로 불리기도 하다가 이제는 퇴역한 서울구치소, 아니 서대문형무소는 그러나 오늘, 아직은 철문에 빗장을 지르고 텅 빈 채로 침묵에 싸여 얼룩진 벽돌담과 감시탑만으로 말없이 오가는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 나명순, 『서대문형무소 소사』 중에서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때인 1907년에 공사를 시작해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꼭 100년 전 일이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왕위에 올리고는 정미 7조를 발표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처럼 나라의 명줄이 끊어질 위기..
한국개신교와 민중교회 한국의 개신교는 보수적·근본주의적 신학 입장에 있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체제안정과 유지에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특히 해방 후 한국 사회가 미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면서 개신교는 친미, 보수반공체제의 핵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개신교는 서구 근대문명을 선교의 도구로 삼았고, 근대문명의 물질적 성과를 선교의 방편으로 삼았다. 근본주의적 신학의 문자주의적 성서 이해와‘예수 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십자가 신앙을 통해 부자와 가난한 자,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 남한과 북한을 아우르기 보다는 끊임없이 타자를 만들고 배타를 당연시했다. 한국의 개신교는 체제 지향적 속성을 강화함으로써 정치· 경제적 권력까지 확보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물질을 신앙화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로 올라가면 허리 굵은 은행나무들이 늘어선 대로변에 빨간색 벽돌 건물이 보인다. 1층에 스타벅스가 입주해 있어 흔히‘스타벅스 건물’로 통하는 흥사단 본부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죄다 수용해 낼 듯한 대학로의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흥사단의 고색창연한 로고와 스타벅스의 당당한 영문 간판이 빚어내는 묘한 이질감과 부조화는 2000년대 흥사단이 감당하고 있는 난제들을 대강이나마 짐작케 한다. 선비를 일으키다 여름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던 금요일 오후. 나는 대학로 스타벅스 앞에서 우산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젊은이에게 흥사단 가는 길을 물었다. 1초도 못돼 대답이 날아왔다. “흥사단이 뭐예요?” ‘흥사단’은 몰라도 스타벅스 대학로점은 아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흥사단은 이제 약간의..
폭우가 한 차례 지나간 뒤 날은 더 무더워졌다. 지하철 1호선 신이문 전철역사를 무심히 빠져나오던 나는 숨 막히는 지열을 느끼며 걸음을 멈췄다. 어지러웠다. 비에 씻긴 태양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올랐고, 폭염에 달궈진 아스팔트는 무엇이든 걸리기만 하면 통째로 녹여 버리겠다는 듯이 지글거렸다. 층계참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문초등학교를 지나 이문삼거리까지 걸어 올라가는 동안 만난 동네 풍경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 서울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언덕길 양켠에 촘촘히 들어선 낡은 주택과 점포, 술집들, 그것들 사이로 미로처럼 이어주는 비좁은 골목과 계단에는 오랜 세월의 더께가 앉아 있었다. 의릉·한국예술종합학교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을..
원풍(怨風)아 불어라! 1982년 10월 1일 새벽 5시, 서울 대림동 원풍모방 제 1공장이 폭풍전야의 적막에 휩싸였다. 노조 파괴 책동에 맞서 닷새째 단식농성 중이던 600여 조합원들은 긴장된 눈빛을 빠르게 교환했다. ‘삐이익!’ 날카로운호루라기소리를신호로700여명의구사대와사복경찰이농성장에들이닥쳤다. “끌어내!” 농성장은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조합원들은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야수처럼 달려드는 저들의 몽둥이와 발길질을 당해낼 수 없었다. 머리가 깨지고 입술이 터지고 옷이 찢긴채 공장 밖으로 내몰린 조합원들은 교통이 차단된 대림동 6차선도로에 내동댕이쳐졌다. 마침 그날은 추석이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보름달이 그네들의 차가운 맨발과, 점점이 떨어진 붉은 피와, 육교 난간에서 펄럭이는 고딕체 선! 진..
인천, 노동자 그리고‘인간 문제’ 1934년에 발표된 강경애의 소설『인간문제』의 배경은 식민지적 근대화의 관문 인천이다. 여주인공 선비는 살인적인 노조 탄압의 대명사 동일방직의 전신인 동양방적의 여공으로 공장 내 조직 활동에 관여한다. 부두노동자 첫째는 경성제국 대학생 신철을 만나 의식화되고 파업을 주도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선비가 폐병으로 죽고 신철마저 전향하자 첫째는,‘ 인간 문제는 노동자 들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개항 이후 인천은 일제의 군수품 조달 기지이자 수탈항으로서 근대적 자본과 노동자의 대립이 격심한 곳이었다. 서울과 가깝고 국제항까지 갖춘 덕에 대규모 공장들도 많았다. 1960~70년대, 한국경제의 폭발적인 성장은‘공순이’,‘ 공돌이’라는 멸시 속에서 죽음 같은 노동을..
고려대생 피습사건 1969년 5월 2일,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한밤중이었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의 한 야산지대에 트럭 몇 대가 멈춰 섰다. 서울시 청소용 차량인 이 트럭들은 뒤에 실린 물건들을 한 곳에 황급히 부려 놓고는 매연을 내뿜으며 사라졌다. 처음에 그것은 거대한 쓰레기더미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곧 검은 유령처럼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름에 가린달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자 그것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것은 수십 명의 어른과 아이, 가재도구와 이불보따리, 식기와 곡식자루가 뒤섞인 그들의 남루한 세간이었다. 주변의 사물이 눈에 들어오면서 그들은 이곳이‘일자리 걱정 없는 신천지(新天地)’가 아니라 난방은커녕 전기와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집단수용소라는 걸 깨 달았다. 아무렇게나 깎아놓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