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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물지 않는 100년의 상처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서대문형무소 본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아물지 않는 100년의 상처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서대문형무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7. 2. 10:31

 
한국의 바스티유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이젠 안으로만 간직한 채, 서대문 시대 그 칠십구 년의 역사를 마감한 서대문형무소. ‘한국의 바스티유’로 불리기도 하다가 이제는 퇴역한 서울구치소, 아니 서대문형무소는 그러나 오늘, 아직은 철문에 빗장을 지르고 텅 빈 채로 침묵에 싸여 얼룩진 벽돌담과 감시탑만으로 말없이 오가는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 나명순, 『서대문형무소 소사』 중에서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때인 1907년에 공사를 시작해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꼭 100년 전 일이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왕위에 올리고는 정미 7조를 발표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처럼 나라의 명줄이 끊어질 위기가 닥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행된 독립투사들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경성감옥이다. 일제의 조선 강점은 공식적으로는 1910년 완성되었다. 그럼에도 1097년부터 감옥을 짓기 시작했던 것은 1905년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일본 통감부를 설치하도록 해 사실상 경찰권까지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조선에는 사실상 감옥이란 개념이 없었다. 감옥이 아니라 ‘옥(獄)이라 불리던 수감시설은 근대 이후 감옥과는 달리 형이 확정되기 전에 임시로 구금하던 시설로 오늘날로 보자면 미결수를 수감하는 구치소와 유사한 형태였다. 오늘날의 금고나 징역형 같은 장기구금형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곳에 수감된 수인들은 형이 확정된 뒤 장형이나 태형처럼 매를 맞던가, 아니면 노역에 종사하거나 귀양을 가기도 하고, 중한 죄인은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근대식 감옥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894년 갑오경장 때이다. 당시 한양의 구치소격인 전옥서(典獄暑)를 감옥서(監獄暑)로 바꾸면서 출발했지만 근대적 의미의 감옥형태로 만들어지고 운영된 것은 경성감옥이 최초나 다름없다. 따라서 1908년 일제가 만든 서대문형무소를 우리나라 역사에서 근대식 감옥의 시작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대한제국시대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건립한 독립문 옆을 터로 잡은 경성감옥은 가즈마라는 일본인의 설계로 당시 화폐 5만 원 가량을 들여 지었다. 480평 규모의 감방과 80평 정도의 부속 시설, 수용 인원 500여 명 정도였는데 당시 전국 8곳에 산재해있던 감옥의 총 수용 인원이 300여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가히 엄청난 규모라 할 수 있다.

 

경성감옥은 1912년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되었다가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경성이란 당시 서울의 이름을 떼고 서대문이란 작은 지명을 붙인 것은 치열한 항일독립운동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체포가 늘어 수용할 공간이 부족해지자 인근 마포구 공덕동에 다른 감옥을 지었기 때문이다. 서대문형무소는 해방 후에도 서울형무소에서 서울교도소, 다시 서울구치소로 계속 이름을 바꿨다.
벽돌 한 장, 흙먼지 하나에까지 일제강점기화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아픔이 스며있던 서대문형무소는 6월항쟁으로 한국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이 열린 1987년 11월 경기도 의왕으로 옮겨가면서 형무소로서의 역할을 끝냈다, 옮길 당시는 옥사가 모두 15개 동이었지만, 현재는 옥사 7개동과 사형장, 보안과 청사만이 보존되고 있다. 그 가운데 옥사 3개동(제10,11,12옥사)과 사형장은 1988년 2월 20일에 사적 제 324호로 지정된 바 있다. 1992년 정부는 형무소 일대를 독립공원으로 조성했으며, 1995년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공사를 시작해 1998년 11월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로이 태어나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독립 민주 정신의 단련장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형무소가 이곳에 80년 동안 온갖 사연과 아픔을 가둬놓고 있는 동안 대략 35만여 명이 이곳을 거쳐 갔고, 일부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 가운데는 이른바 잡범과 일부 흉악범들도 있었지만, 독립투사들과 민주화운동 투사들을 빼놓을 수 없다. 이름을 알만한 시대의 애국지사들은 거의 모두가 이곳을 거쳐 갔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10년 말 황해도 신천의 안악에서 독립군 양성학교를 만들기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다 벌어진 ‘안악사건’으로 이듬 해 이곳에 투옥되었다. 『백범일지(白凡逸志)』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지냈던 일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일제시대 감방의 모습과 일본인 간수들의 횡포, 독립투사들이 어떤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인 충남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체포된 유관순 열사는 이듬해인 1920년 10월 이곳에서 옥사했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한 강제점령이라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우리에겐 역사적 현실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민족독립을 향한 투쟁의 역사가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 계승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되었습니다.(역사관 소개 자료 중에서)

 

그러나 현재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 운동가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지만 해방 이후 1987년까지 교도소로 쓰였던 사실, 특히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저항의 역사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무 것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0년 전 만들어진 뒤 감옥으로 80년, 역사관으로 10년을 보낸 2008년, 서대문형무소는 여전히 지난 세기 갈등을 풀어내지 못한 채 절반의 역사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권위주의와 독재가 횡행하던 시절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받은 수많은 민주인사가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승만 정권 시절 간첩으로 몰려 최후를 맞은 진보당 조봉암 당수는 사형집행 전까지 이곳에 갇혀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1년 역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이곳에서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올해 1월, 47년 만에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1974년 사형선고를 받은 뒤 불과 20시간도 지나지 않아 8명의 사형을 집행해 사법살인이라 불렸던 이른바 인혁당사건도 무죄판결에 이어 국가배상 판결까지 났음에도 정작 역사의 현장인 이곳에서는 관련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사형장 입구 왼쪽에 자리해 마지막 순간 손을 짚고 울음을 삼켰다는 미루나무만이 그날의 한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통합의 역사를 담은 역사관으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개관 10년을 보내고 내년에 역사관을 새롭게 단장할 예정이다. 보안과청사-역사관을 리모델링하면서, 역사관 전시물들은 여옥사(女獄舍) 옆에 새로 지어지는 사무실로 임시 이전한단다. 공사가 끝나고 역사관이 다시 본 건물로 옮겨진 뒤에는 독립운동뿐만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역사도 함께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거슬러 오르는 세월은 이처럼 당연한 소망조차도 쉬이 꿈꾸지 못하게 한다.
정문을 지나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서는 역사관. 1층은 영상실, 자료실, 기획전시실로 구성된 ‘추모의 장’, 2층은 민족저항실, 형무소 역사실, 옥중생활실로 구성된 ‘역사의 장’이다. 지하 1층에는 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이 있는 ‘체험의 장’이 있다. 역사관 뒤편으로 중앙사(中央舍), 공작사(工作舍), 옥사(獄舍)로 이루어진 형무소체험관이 있다. 지나치며 볼 수 있는 많은 감방 가운데는 무려 여섯 차례나 이곳을 들락거렸던 문익환 목사와 내란음모죄에 휘말려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감되었던 방도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감되었던 방에는 표식이 있어 찾아볼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지하 감옥, 사형장, 시구문이 복원되어 있다. 사형장 바로 옆에는 사형을 집행한 시신을 형무소 밖 공동묘지까지 몰래 버리기 위해 일제가 뚫어 놓은 비밀통로가 있는데 입구만 볼 수 있다.
 
100년 전 지어질 당시부터 이곳 수감자들, 특히 지배자에 맞서다가 잡혀 들어온 애국지사들은 형언키 어려운 고초를 겪어야 했다. 고문이나 폭력 같은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라 해도, 난방 같은 기본적인 시설도 없어 최소한의 생존만이 가능한 열악한 조건인데다, 무엇보다 수감자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 자체가 갇혀있는 이들에게는 한 순간의 짬도 없는 무언의 폭력이었다.
 
“당신은 혹시 길이 여덟 자, 너비 넉 자 크기의 관 속에 들어가 누워 본 일이 있습니까? ……여름이면 낮에도 컴컴한 이 관 속 방바닥에서 ‘식사’라는 것을 차려 놓고 먹을라치면, 막힘이 없이 통해 있는 변소의 구멍에서 누런 구더기떼가 줄줄이 기어 나와 더불어 생존하기를 요구합니다. ……시체를 넣는 관이 아니라, 지난 세월, 비인간적인 독재정권 아래서 수 천, 수 만의 정치수, 사상수, 양심수, 확신수 들이 처넣어져서 신음해야 했던 이 나라의 교도소와 형무소의 감방, 독방의 모습입니다. …… 이 관은 21세기를 바라보는 세계 문명사회의 가려진 치부입니다.”

― 리영희, 「서대문형무소의 기억」 중에서
 
감옥 밖의 인권조차 흔들리고 최소한의 인간다움조차 빼앗기고 있는 낮은 삶이 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감옥 안의 삶을 들여다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인권이 얼마나 지켜지는 가는 곧 한 사회가 누리고 있거나 혹은 지키고자 하는 민주주의 더 나아가 문명의 척도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서대문형무소를 찾은 이들은 애국지사들과 투사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흔적뿐만 아니라 보통의 수인들이 겪어야 했던 일상의 고통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1운동으로 3년 동안 이 곳에 머물렀던 만해 한용운이 옥중에서 썼던 시는 여전히 가난의 질곡, 분단과 억압의 창살 안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갇힌 자들의 한숨 소리로 남을 뿐이다.
 

눈오는 밤(雪夜)
감옥 둘레 사방으로 눈이 펑펑 내리는 밤(四山圍獄雪如海)
무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재와 같은 꿈을 꾸네(衾寒如鐵夢如灰)
철창의 쇠사슬 풀릴 기미 보이지 않네(鐵槍猶有鎖不得)
심야에 어디에서 쇳소리는 자꾸 들려오는지(夜聞鐵聲何處來)

 
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어두운 공간에 갇혀 무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재와 같은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절망의 한 가운데서도 미래를 향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역사의 저편이 아닌, 살아있음으로 내쉬는 이들의 가쁜 숨소리를 들어 내 숨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런 곳이다.

 

 

글 김종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장
사진 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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