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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민주화운동과 민중신학의 산실 한빛교회 본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한국 개신교 민주화운동과 민중신학의 산실 한빛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29. 17:30
 
한국개신교와 민중교회
 

한국의 개신교는 보수적·근본주의적 신학 입장에 있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체제안정과 유지에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특히 해방 후 한국 사회가 미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면서 개신교는 친미, 보수반공체제의 핵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개신교는 서구 근대문명을 선교의 도구로 삼았고, 근대문명의 물질적 성과를 선교의 방편으로 삼았다. 근본주의적 신학의 문자주의적 성서 이해와‘예수 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십자가 신앙을 통해 부자와 가난한 자,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 남한과 북한을 아우르기 보다는 끊임없이 타자를 만들고 배타를 당연시했다.
한국의 개신교는 체제 지향적 속성을 강화함으로써 정치· 경제적 권력까지 확보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물질을 신앙화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일반적인 행태와는 달리 양심적 목회자와 지식인들은 산업화· 근대화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과 민중들의 소외를 목도하면서 영(靈)적이고 종교적인 구원을 넘어 사회적 현실의 해방을 적극적으로 인식한다. 기독교 복음이 우리민족의 역사와 현실에 접목되어 민중의 삶과 함께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는 선교 방식의 변화와 함께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교리의 재해석, 신앙의 사회적 고통과 불안해소, 교단의 권위주의 극복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한 목회자들은 보다 낮은 곳으로 임하여 대중과 함께하는 교회를 지향했다. 주어진 역사적 현재에서 성서적 신앙을 새롭게 듣고, 현재적 상황에 실천적으로 응답하려는 목회자들이 설립한 교회는 일체의 집회·결사·표현의 자유를 제한받던 암울한 시대에 뜻있는 사람들의 울타리가 되었다.

 
 
한빛교회가 지금의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지난 1971년 이해동 목사가 담임목사 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1968년 한신대 교수이자 담임목사였던 문익환 목사가‘신· 구교 공동성서 번역’의 책임을 맡게 되면서 그 후임(1970년)으로 이해동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이 시기까지 한빛교회는 지극히 평범했고 일반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 청년 노동자 전태일 분신자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생존권 투쟁은 한국교회 인권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종교인들의 신앙적 양심을 자극하였다. 한빛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인들 중 해직교수나 동아투위 관계자들이 생기고 주요한 민주화운동 사건에 연루되면서 교회의 사회참여가 시작되었다. 특히 1976년‘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문익환 목사, 이우정 장로(당시 집사), 이해동 목사 등이 옥고를 치루는 과정에서 평범한 교인들도 독재정권의 본 모습을 깨닫게 되었다.
한빛교회는 문익환, 이해동 목사를 거쳐 1984년 8월 유원규 현 목사의 부임 후 현재까지 교회의 사회적 소명과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한빛교회의 역사
 
 
탄압과 감시가 삼엄하던 시대, 구속자 가족과 지인들이 함께 모여서 소식도 나누고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이때 이해동 목사가 선뜻 한빛교회를 그런 장소로 내주었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부터 한 건물 안에 두 개의 교회가 생겨났다. 민주화운동사에서 자주 등장하는‘갈릴리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교회를 정의할 때 외형(건물)과 모이는 사람을 지칭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면 박용길 (문익환 목사의 처) 장로가 주도한‘갈릴리 교회’는 탄압받는 사람들, 쫓겨난 사람들이 기도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1970~80년대 목요기도회가 최초로 시작된 곳도 한빛교회였다고 한다. 목요기도회는 이후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개최되고, 갈릴리 교회도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자연스럽게 해산되었지만 그 기도의 힘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한빛교회는 뜻있는 사람들의 정보교환과 교육 공간이 되었고,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쉼터로서의 역할을 떠안 게 되었다.
 
지극히 평범했던 한빛교회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독재정권의 일상적인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정권의 치졸한 감시는 담당형사의 부인과 자녀들, 경찰 여 간부를 교인으로 위장시켜 잠입시켰다고 한다. 독재정권은 교회와 지역주민들을 분리시키기 위해‘빨갱이 교회’라는 여론조작을 감행하였고, 불온한 이미지는 세대를 거쳐 전달되었고 주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교회 내부에는 새로운 교인이 오면 반가워하는 분위기보다는 의심하는 경직된 분위기도 있었다고 한다. 일반교회가 이러한 상황에 놓이면 교회가 이중 삼중으로 분리되었을 법도 한데, 한빛교회 교인들은 단 한 차례도 분열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문익환, 이해동, 유원규 목사에 대한 깊은 존경과 신뢰가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교인들이 민통련에 가입해서 일을 하거나 가두시위를 주도하는 투사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고통 받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 기도와 후원활동을 하였다. 1970~80년대 한빛교회 여신도들이 감옥에 있는 이들에게 보낸 양말과 목도리를 뜨개실로 따지면 트럭 두 대 분이나 될 정도라고 하니 당시 교회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한국 교회가 양분되는 와중에서도 교인들은 문익환 목사의 진정성이 온 누리에 전달되고, 남북한의 갈등이 해소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민주화 이후 교회의 역할
 
 
살펴본 바와 같이 한빛교회는 한국 역사의 수용돌이를 파도처럼 타면서 인권 (1970), 민주화(1970~80), 통일(80년대 후반~)문제에 깊이 개입했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제도적·절차적 민주화가 진전됨과 동시에 운동의 장르가 다양해진 상황을 반영하듯‘교회’도 정체성을 둘러싼 고민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문익환 목사와 이우정 장로의 소천(召天)은 한빛교회와 교인들에게는 정신적 지주를 잃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었으므로 당시의 고민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정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 한빛교회는 21세기의 화두인 통일에 매진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정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장기수 결연과 지원활동, 북한동포돕기운동, 통일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한편 문익환 목사의 뜻을 계승하기 위해 매년(사)통일맞이에서 진행하는‘통일상’수상금을 교회가 전액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교회로서의 거듭나기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으나 정권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가 워낙 두껍고 강고한 탓에 아직은 쉽지 않다고 한다. 내부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면서 고정화된‘장소적’의미에 집착하기 보다는 사명이 필요한 곳에 찾아가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지금은 지역의 뜻있는 청년들이 운영하는 공부방을 지원하는 것을 시발로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5년을 한빛교회와 함께한 유원규(57세) 목사는 우리시대 교회의 사회적 참여와 역할은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한국이 많은 민주화를 이루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는 소수집단의 전유물”로서의 한계를 지적하면서“한국 교회가 초기 선교사들(메첸파)의 영향과 신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맹신의 결과, 신앙을 돈과 힘의 논리에 복속시키고 말았다.”고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비판한다.“ 제도적으로 민주화
되었지만 군부독재에서 시장독재로 변한 것에 불과하다면 여전히 교회의 사회적 사명과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라지지 않을 한빛교회
 
 
한빛교회는 그 유명한 순복음교회나 소망교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작다. 그러나 낡고 좁은 공간이지만 이미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을 수 없는 의미로 각인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공간이 조만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민주화운동의 성지로서 중요한 공간적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재개발 예정지로 선정되어 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란 것이다.
 
 
설령 재개발 이후에 이 지역을 떠나지 않는다고 해도, 현 위치 그대로를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현재 교회에서는 내부 논의를 거쳐 이전·증축을 위해 수유리에 땅을 구해 놓은 상태로서 관계당국과 현 위치에 한빛교회를 기억할 수 있는 조형물이라도 설치할 수 있는지를 협의하려는 계획도 하고 있다
 
글 이창언 | 현재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며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다.
사진 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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