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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민주주의의 열망과 좌절의 공간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 본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의회 민주주의의 열망과 좌절의 공간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8. 5. 19:34
 
근대문화와 식민이 공존한 부민관(현 서울시 의회)  
   
국회의사당은 국회의원들이 의정활동을 수행하는 곳이다. 197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국회의사당은 안정적인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의회민주주의의 불안정성을 반영하듯 제헌국회 때는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홀을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구 문화극장, 부산 문화극장, 경남도청 내 무덕진 등을 전전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4년~75년까지 서울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현 서울시의회)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다. 특히 22년 동안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된 서울시 의회 건물(등록 문화재 제11호)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은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을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각종 문헌이나 자료에 따르면 이 공간의 처음 명칭은 부민관(府民館)이었다. 부민관은 경성에 대규모 공연장이 없던 1930년대 초 경성부가 부민들의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명분으로 경성전기주식회사로부터 100만 원을 기부 받아 1934년에 준공한 부립극장이었다. 일본 동경 히비야에 있는 공회당을 모델로 삼아 세워졌다는 부민관은 단성사,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화신백화점 등과 함께 이 시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 건축에서 유행한 모더니즘 양식을 모방하여 건립된 부민관은 초현대식 시설로 인해 경성 유명 극단들의 창단공연, 유명 연극단체들의 공연을 비롯해 강연회, 음악회, 전시회 등이 끊임없이 개최될 정도의 근대 문화가 형성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부민관은 황국신민화를 찬양하는 친일파의 변절 공간이기도 했다. 급기야 분노한 독립운동가들이 이 공간에 폭탄을 던지는 ‘부민관 의거’가 발생하기도 한다. 1945년 7월 24일 강윤국·조문기 선생 등이 친일파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 주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저지하고자 행사장인 부민관을 폭파하였던 사건이다.
 
 
해방 후 부민관은 미군이 접수해 임시 사용하다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국회의사당으로도 활용되었다.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옛 부민관)은 197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준공됨에 따라 시민회관으로, 1976년 세종문화회관 건립과 동시에 그 별관으로 이용되었고,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은 제헌국회 출범, 초대 대통령 선출, 사사오입 파동, 3선 개헌, 유신헌법 등 한국의 의회민주주의가 왜곡되고 질곡에 빠지는 초유의 사건의 중심에 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3선 개헌, 의회민주주의의 왜곡과 퇴행
 
‘3선 개헌’, 쉽게 풀이하면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한다는 뜻이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위한 3선 개헌 논의는 1968년 12월 윤치영의 발언 이후 공식화되었다. 3선 개헌 움직임이 포착되자 재야 세력과 신민당은 연합하여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대학생들도 날마다 3선 개헌 규탄과 헌법 수호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어용학자와 언론을 동원하여 3선 개헌 정당화 논리를 만들고 정보부와 각급 기관을 통해 국회의원에 대한 협박과 회유를 시도하는 한편 날치기로 3선 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희대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민주공화당 의원들은 대통령 3선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 본의회장이 아닌 국회 3별관에서 모였다. 본 회의장은 야당의원들이 밤샘 농성 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3선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키기 위해 전등까지 끄고 의사봉 대신 주전자 뚜껑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신 새벽에 자행된 날치기로 3선 개헌안은 찬성 122표, 반대 0표로 통과되었다.
다음날 이 같은 전대미문의 변칙적인 개헌 통과가 세상에 알려지자 각 대학과 재야, 야당의 개헌 무효 성토대회가 줄을 이었다. 야당은 개헌안의 변칙 통과를 기점으로 여당과의 대화를 일절 끊고 ‘정권 타도’를 제기하며 원외투쟁에 돌입하였다. 대학생들은 물론 심지어는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나섰다. 해외에서의 규탄투쟁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 같은 국민들의 분노에 아랑곳 하지 않고 학원에 경찰 병력을 투입하고 여론조작을 통한 국민투표로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려는 양동작전을 구사하였다. 공포 정치와 관권개입 속에 10월 17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3선 개헌안은 최종 통과된다. 이로써 박정희는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 세 번째로 민주공화당 후보로 다시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장기집권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민주주의의 종언, 유신독재의 등장
 
한국의 의회정치는 특정 인물이나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민을 배제한 헌법 유린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의 집권연장을 위해 전시 상황에서 자행된 발췌개헌안의 불법적 통과, 1954년 재임에 국한되는 대통령 임기조항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그 적용을 배제하려는 개헌안을 추진하다 부결되자 사사오입의 원칙에 따라 가결시킨 2차 개헌,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살벌한 분위기와 정보의 부재 속에서 진행된 5차 개헌이 자행되었다. 또한 1969년 3선 개헌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차 개헌, 유신독재를 탄생시킨 7차 개헌, 신군부의 집권과 간선제를 핵심으로 한 8차 개헌은 단독정권 수립 후 이루어진 총 아홉 차례의 개헌 중 대표적인 반민주적 개헌 사례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40년 전 태평로 국회의사당에서 발생한 3선 개헌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개인의 영구집권의 서곡이었다는 점에서 어떤 사건보다 심각한 개헌이자 반민주적 폭거였다.
 
 
3선 개헌을 날치기 통과시킨 박정희는 여세를 몰아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국회대신 국무회의가 전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선포된 유신헌법에 따라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정희를 제 8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유신체제는 출범한다. 유신헌법은 한마디로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었다.
 
 
유신헌법은 전문과 12장 126조 및 11조의 부칙으로 되어 있다. 그 주요 내용은 ① 전문에 민족의 평화통일이념을 규정하고, ②법률유보조항을 두어 기본권 제한을 보다 쉽게 하였으며, ③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치하였고, ④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영도적 국가 원수로 하였으며, ⑤ 정당국가적 경향을 완화하고, ⑥정부가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연대성을 가지게 하였으며, ⑦국회의 회기를 단축하고 권한을 약화하였으며, ⑧위헌법률심사기관을 대법원에서 헌법위원회로 개정하고, ⑨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하였으며, ⑩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거하도록 하였고, ⑪국민투표제를 채택하였으며, ⑫헌법개정절차를 2원적으로 하였고, ⑬지방의회를 통일달성 시 까지 구성하지 않게 한 것 등이다.
이처럼 유신헌법의 주요 내용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이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 침해, 권력구조상에 있어 대통령 권한의 비대로 독재를 가능하게 한 헌법임을 알 수 있다.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임기가 6년으로 늘어났고 중임제한도 사라지게 되었다. 대통령은 국민이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 손으로 넘어갔다. 박정희는 긴급조치권과 함께 법관과 국회의원 3분의 1을 지명할 수 있는 임명권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하는 3권 분립체제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선택적 기억과 망각을 넘어
 
1969년 3월 박정희가 대학을 병영화, 장기집권을 위한 상아탑의 순치를 강요하는 동안 대학생들은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을 결성하였고 4·27 선거를 불법·부정·관권 선거로 규정했다. 대학생들의 교련반대는 반정부투쟁으로 이어졌고, 부정선거 규탄은 군사교육거부로 상징화 했다.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 전태일 분신사건을 시작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꿈틀대기 시작하면서 도시빈민들의 광주대단지사건, 언론인들의 언론자유수호투쟁 등이 잇따랐다. 재야에서도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결성되는 등 반독재투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더욱이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신민당 후보는 도시표의 52.3%(특히 서울에서 58%)를 얻는 성과를 올렸다. 총선에서도 야당이 이전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의석을 차지했다. 양대 선거 결과는 독재정권에 대한 민심의 반영이었던 셈이다.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특정한 정치적 사건은 항상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 놓여진다. 부민관,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 건물로서 현 서울시 의회를 근대와 식민이 교차했던 공간이자 의회정치에 대한 기대와 왜곡이 동시에 일어났던 공간으로 재 호명하는 이유는 과거를 정상화하고 망각을 전제로 하는 지배자의 기억화에 맞서 과거를 다시 거론하는 방식으로, 과거를 현재의 삶 속에서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침묵하거나 은폐되었던 과거가 공론화되고, 실질적이었든 형식적이었든 사회적 기억으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열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재시대를 미화하고 심지어는 군사파시즘을 찬양하는 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기억을 둘러싼 투쟁은 여전히 중요하다. 한편 적극적으로 기억하기는 타자화 된 자신을 새롭게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망각을 강요하는 상징적 질서에 맞서 더 많이 기억하고 소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강요된 망각만이 아니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들, 잊혀지는 것들에 대한 보존과 재 기억화의 과정도 중요하다. 서울시의회 주변의 역사적 공간인 서울시청 건물과 세실레스토랑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서울시는 안전성을 이유로 서울시청 철거의 정당성을 피력하지만 많은 전문가와 시민들은 이런 시각 이면에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의 저열성을 지적한다. ‘현대화’, ‘대한민국화’의 미명 속에는 성장주의적 시각이 내장되어 있고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밀어붙이기식 행정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한번 사라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서울시청사가 일제강점기의 굴욕적인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후대에는 역사적인 교훈의 장으로 활용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지난달 10일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또 다른 역사적 공간이 있다. 1979년 문을 연 세실레스토랑은 군사 정권 당시 민주화 인사들의 회합 장소였다. 서울시 의회 건물이 근대와 식민이 교차했던 공간이자 의회정치에 대한 기대와 왜곡이 동시에 일어났던 공간이라 한다면 이 건물 뒤에 있는 세실레스토랑은 군사 정권 당시 민주화의 부활을 위한 작은 회합의 공간이었다. 서울시청과 세실레스토랑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면서 식민과 독재라는 단어가 함께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한때 접점을 지녔던 타자와 더 이상 교류할 수 없는 서글픔, 귀중한 존재들이 사라져가는 덧없음, 강요된 망각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왜일까?

 

 

글 이창언 |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이며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고 있다.

사진 황석선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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