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99)
함께쓰는 민주주의
노무현의 흔적을 서울에서 찾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5월은 5·16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만으로도 한국 현대사에서 기록될 만한 달이지만 4년 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함으로써 더욱 ‘쎈’ 달이 되고 말았다. 그는 김해 봉화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부산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상고 출신답게 조세전문변호사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로 돌아섰다. 부산에서 6월민주항쟁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렸던 노무현 변호사는 노동자를 돕기 위해 국회의원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1988년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부산 동구에서 5공 핵심 허삼수를 이기고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로서 마흔 살이 넘도록 김해와 부산에서만 생활했던 그는 처음으..
고등학생들, 4․19혁명의 아침을 열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는데, 한국 현대사의 4월은 제주4.3과 4.19혁명으로 그 말을 증명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등장하는 4.19혁명의 주역은 누구였을까? 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생들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186명의 희생자 중 77명이 학생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학생의 숫자는 22명밖에 되지 않는다. 고등학생이 36명이었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19명이었다. 꼭 사망자 수로 비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가 마산상고에 재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4.19혁명의 주역은 고등학생이었다는 당시 고등학생 참여자들의 자부심은 충분한 근거를..
지학순을 만나러 원주에 가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3월 12일은 지학순 원주교구 초대 주교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선봉이자 정신적 지주로 기억하고, 어떤 이는 1985년 이산가족 상봉에서 누이를 만난 모습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학순 주교는 이런 평면적인 인상으로 기억될 인물이 아니다. 지학순 주교는 1921년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청학리(현 황해북도 중화군 중화읍)에서 태어나 1934년 1월 25일에 중화천주교회에서 메리놀선교회 소속 요셉 클먼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소신학교인 서울 동성고등학교를 다녔다. 1948년 3월 함경남도에 있는 덕원신학교를 다니다가, 1950년 1월 17일 남북 분단 후 친구인..
늦봄 문익환과 봄길 박용길의 길을가다 : 통일의 집,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한빛교회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늦봄이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 후 프린스턴 대학으로 돌아가 신학 석사 학위를 받고 맡은 자리가 한신대 교수였다. 봄길 박용길 역시 이곳 사택에서 오래 살았고 한신 부인회를 조직해서 장학사업, 빈민구제, 탁아소 운영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다. 이어질 민주화 운동의 ‘예행연습’이 된 셈이다. 슬하의 3남 1녀 역시 이곳에서 성장했다. 김용옥 교수가 너무나 아름답다고《노자와 21세기》에 찬사까지 남긴 수유리 계곡은 지금 복개되었고 ‘ㄴ’자 형의 강의동도 철거되고 새로 지어져 옛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옛 강의동은 늦봄의 영결식 때 걸게 그림이 걸려 있었던 건물이어서 더..
도쿄의 늦봄 문익환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이 나라가 한국 역사 특히 현대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한국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역사에도 적지 않은 무대를 제공한 나라이기도 하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벌어진 곳도 도쿄가 아닌가! 하지만 1994년 1월 18일 세상을 떠난 문익환 목사만큼 일본에 많은 흔적을 남긴 민주인사도 드물다. 문익환 목사와 도쿄의 첫 인연은 1938년에 도쿄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사실 학교보다 유학 온 신학생들이 모임인 관동조선신학생회가 그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평생의 반려 박용길을 그 모임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다. [마루노우치 빌딩가] 문익환 목사와 도쿄와의 두 번째 인연은 한국전쟁..
12월, 김근태의 길을 가다. -남영동 대공분실과 상지회관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2011년 12월 30일, 투병 중이던 김근태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 의장이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전국이 충격에 휩싸였다. 고문 후유증이 사인 중 하나였기에 다시 한 번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김근태 전 의장은 자신의 고문 기록을 이란 제목의 책으로 엮었고, 이 책을 정지영 감독이 최근 로 영화화했다. 필자는 이 영화를 문재인, 안철수 후보와 함께 시사회에서 보았다. 같이 간 선배는 실제 남영동에서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한 피해자였다. 영화를 보면 고문실에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남산이나 서빙고는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소리 때문에 고문..
서울역에서 청계천까지 소년 전태일, 청년 전태일의 길을 걷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11월은 공휴일도 없고, 4월의 4.19혁명기념일, 5월의 5.18민주화운동기념일, 6월의 6.10민주항쟁기념일처럼 이렇다 할 기념일도 없는데다가 마지막 달의 전 달이라 뭔가 ‘밋밋해’ 보인다. 하지만 13일만은 결코 평범한 날이 아니다. 물론 일반적인 달력에는 아무 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한국 민주화와 노동운동에서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날이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태어난 열사는 1954년, 여섯 살 때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자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동안 이소선 어머니와 염천교 밑에서 노숙하면서 만리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
10월 유신 그리고 장준하 글 한종수(wiking@hanmail.net) 올해는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게 만든 최악의 폭거인 10월 유신이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운명일까? 바로 올해 대통령 선거가 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씨가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등장했다. 거의 전 국민이 유신의 피해자였지만 가장 대표적인 피해자라면 인혁당사건으로 ‘사법살인’을 당하신 여덟 분과 장준하 선생님을 드는데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새로 조성된 장준하 공원으로 이장하면서 공개된 선생의 유골은 실족사가 아닌 타살의 의혹을 증폭시켰다. 이렇게 장준하! 그 이름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장준하 선생의 일생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 선생은 평안북도에서 ..
전태일 이소선 김근태 그리고 마석 모란공원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이 정권 들어 참 많은 어른들이 돌아가셨다. 김수환 추기경, 두 대통령, 리영희 교수, 박용길 장로,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와 김근태 의장. 그 중 뒤의 세 분은 마석 모란공원에 묻혀있다. 9월 3일이 이소선 어머니의 기일이라 겸사겸사해서 아침 일찍 마석으로 출발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년! 새삼스럽게 세월은 정말 빠르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행사는 11시부터였지만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여러 열사들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조금 일찍 나섰다. 물론 모란공원 가라고 만든 것만은 아니지만 경춘선 열차는 무척 편안했다. 공원입구에 들어서면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묘역도가 참배객들을 맞이한다. 작년 이소선 어머니 장례식..
한국 민주주의의 거인이 살던 곳, 동교동 자택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서울에서 가장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 중에 하나가 신촌과 홍익대 앞이다. 당연히 수많은 점포들이 모여 있는 번화가지만 묘하게도 멀지않은 두 지역 사이에는 조용한 주택가들이 형성되어 있다. 그 곳에 바로 우리나라 정치사와 민주주의 역사에 빼놓을 수없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과 김대중 도서관이 있다. 김대중은 1963년 4월 국회의원 출마를 앞두고 찾는 손님이 많아지자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동교동 국민주택 한 채를 전세 내어 입주했다. 1년 뒤 은행 융자를 보태어 이 집을 구입하면서 김대중의 ‘동교동’이 시작되었다. 물론 당시의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당시 이 지역은 “비가 오면 마누라보다 장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