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99)
함께쓰는 민주주의
서울대 민주화의 길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한국 사람이라면 관악산을 등지고 있는 아름다운 캠퍼스가 있는 서울대학교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나라 최고 대학으로 수재들이 모인 곳이기에 모든 학부모와 입시생들이 선망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 관악산 입구에 위치해 있기에 산을 사랑하는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지나쳐 가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학교 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고 그래서 이곳에 민주화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기야 나도 서울대에 ‘민주화의 길’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안지 2년이 넘었음에도 이제야 이곳에 처음 왔으니 남 흉 볼일만은 아니다. 예전에는 서울대학교를 가는데 서울대 입구 역에서..
1987년 명동 일대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국민운동본부의 항쟁 종료선언 이후 명동성당으로 모여들고 있는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 한양이 조선의 수도로 결정되고 북악산 아래에 경복궁과 창덕궁이 건축되고, 출사한 선비들이 두 궁전 사이에 집을 짓고 살면서 지금의 북촌이 형성되었다. 대신 벼슬이 없거나 출사를 준비하고 있는 선비들은 남산 아래쪽에 모여 살았다. 이들을 남산 딸깍발이라고 불렀다. 물론 북촌이라고 전부 벼슬아치들이 산 것도 아니고 남촌이라고 전부 재야인사들만 산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구도는 그러했다. 이런 구도는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일본이라도 북촌과 종로를 완전히 장악하기는 어려웠기에 남산 아래쪽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치적..
옛 미 대사관, 미 문화원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서울의 지하철역에서 시청 앞과 을지로 입구 역은 가장 붐비는 역 중 하나지만 의외로 두 역 사이는 한적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람이 많지 않다. 두 역 사이에 등록문화재 238호인 서울시청 을지로 별관이 있다.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고 많은 일본인들이 서울에 왔지만 종로 상권만은 넘보지 못했다. 대안으로 그들은 을지로와 명동 일대를 그들의 상권으로 만들었다. 일본 굴지의 대기업인 미쓰이 물산(三井物産) 주식회사는 경성지점 사옥을 이곳에다 지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로서 1937년 9월에 착공되어 1938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이 접수한 이 건물은 1948년 한미 간에 '재정과 재산에 대한 ..
혜화동 일대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서울이 역사도시라고 하지만 처음 서울에 온 외국인들은 잘 믿지 않는다. 고궁을 제외하면 전통을 알 수 있는 공간이 별로 많지 않고, 근대는 물론이고 몇 십 년밖에 되지 않은 현대사의 무대조차 많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의 역사적 현장이 가장 많은 곳은 아마도 정동일 것이다. 그 다음은 혜화동, 동숭동, 연건동, 명륜동 일대가 아닐까? 이 일대는 서울대와 성균관대가 있고, 기독교회관이 인접해서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런 ‘불온한’(?) 분위기는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에서 당시 이 일대를 일컬었던 ‘반촌’이 중요한 무대가 되면서 많은 이들이 반촌이라는 고유명사를 알게 되었..
3월 어느 날.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서... - 서대문 형무소 글 한종수 작가 wiking@hanmail.net 3월의 시작은 당연히 3월 1일이다. 3월 1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한국인들은 없을 것이다. 삼일절하면 생각나는 장소는 당연히 탑골공원이겠지만 그 다음 가는 장소라면 단연 현저동의 서대문형무소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한국 근현대사 100여 년간 가장 중요한 건물이라고 생각한다. 한일합방이 이뤄지기도 전인 1907년 - 군대 해산 등 한국사에서 굵직한 사건이 많이 일어난 해 - 에 간수 출신 시텐노의 설계로 공사를 시작한 이 형무소는 다음 해 10월 21일에 "경성감옥" 이란 이름으로 80평 규모의 감방과 80평 정도의 부속시설, 수용인원 500여 명 규모로 문을 열었다. 당시 전국 8..
달구벌을 유령처럼 거닐다 - 대구 '2.28학생운동'과 항쟁의 거리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08년 발행한 '-다시 가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단행본에 실렸던 글입니다. 미군정의 폭정에 맞선 1946년 10월 항쟁의 진원지 대구. 그러나 그 이후 대구는 몇몇 역사적 항쟁에 동참한 걸 제외하면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불모지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군사정권이 대중적 기반을 두었기 때문일까. 게다가 대구에는 지금 또 하나의 망령이 떠돌고 있다. 박정희라는 전대미문의 독재자의 망령이 부활한 것이다. 이 망령을 불러낸 사람들은 따로 있으나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우리 모두일 것이다. 한번 불러낸 망령은 숱한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늘을 드리우며 좀처럼 물러가지 않을 테니. 그러나 이런 생각은 대구 시내..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서 글 한종수 (wiking@hamail.net)/ 시민주권 민주올레 사업팀장 KTX가 출발하는 서울역과 용산역 사이에 남영역이 있다. 완공된 지 40년 가까이 되었고 이렇다 할 개축공사도 없었기에 화려한 두 역 사이에서 더욱 초라하게 보이지만 그만큼 서민적으로 느껴지는 역이기도 하다. 남영(南營)이란 지명은 이곳에 조선시대에 남쪽에 있는 진영 즉 군부대가 있었기에 붙여졌다고 한다. 용산, 남영 일대는 한강이 가까워 이동에 유리하고, 남대문 바로 밑이라 도성 안에 변란이 날 경우 바로 출동할 수는 곳이기에 군부대가 주둔했던 것이다. 그러나 구한말 국력이 약해지면서 원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차지했고, 이후 일본과 미국이 바통을 이어받으며 3세기에 걸쳐 130년 이상 외국 군대가 ..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다니던 박종철이 당시 시국사건으로 수배중인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의해 참고인으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이에 경찰은 서둘러 화장을 하고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으나, 다음날 15일 석간신문에 사망 보도기사가 나가자 단순 쇼크에 의한 사망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사체를 검안한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이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하자, 경찰은 1월 19일 물고문으로 인한 질식사로 정정 발표하고 고문에 가담한 경찰 2명을 구속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박종철의 연행 시간과 사망 경위, 고문에 가담한 경찰의 숫자 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
- 부산 ‘민주공원’과 부마민주항쟁의 기억들 글 원종국 당시 남포동 시장 상인들은 유신 독재에 항의하며 시위대와 합류했다. 이곳은 골목 골목이 많아 시위자들에겐 적전지의 요소였다고 한다. 현재는 부산국제영화제로 유명해지면서 피프(PIFF) 거리로도 불린다 부산 민주공원과 민주항쟁기념관 부산은 파도의 도시다. 때로 그 파도는 노도(怒濤)가 되어 한반도 전역을 일렁이게 했고, 마침내는 독재자를 쓰러뜨리는 해일(海溢)이 되기도 했다. 60년 4월혁명과 79년 부마민주항쟁, 87년 6월항쟁이 모두 그러했다. 2002년 10월 19일, 노구의 해외 민주화 인사들은 버스에서 내려 부산 ‘민주공원’ 계단을 올랐다. 국립 5․18묘지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들은 ‘한국민주화운동 ..
울산 현대 노동자 87년 7.8월 대투쟁의 현장을 찾아서 김순천 남목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 아직 겨울의 찬기가 가시지 않은 약간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희미한 오후의 햇살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남목은 남쪽의 말목장이란 뜻이다. 예전에 이곳에 말목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중심과 변두리를 가르는 상징적인 고개였다. 1987년 7.8월 현대 노동자들 수만 명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함께 이 남목 고개를 넘었다. 이 고개를 넘어 시내로 향하면 자신들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일요일 오후여서인지 현대중공업은 조용했다. 평일에는 2만 5천 여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조선, 해양, 프랜트, 엔진기계, 전기․전자 시스템, 건설장비로 나뉘어 일을 하고 있다. 남목 고개를 넘으면 현대 자동차가 나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