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 (99)
함께쓰는 민주주의
파란 하늘을 향해 시원스럽게 뻗은 세련된 아파트 단지와 번듯한 상가들이 즐비한 목동의 거리에는 지나는 행인들마저 왠지 귀티가 흐르는 것 같다. 가을이 깊어가는 안양천의 깔끔하게 조성된 체육공원에서는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농구를 하며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이들 중 20여 년 전 그 곳에 있던 뚝방촌과 생존권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 그 악다구니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정부의 신시가지 조성 계획 1983년 4월 12일, 서울시는 강서구 목동과 신정동 지역에 140만평의 신시가지 조성 계획을 발표한다. 당초 이 계획은 개발지역의 땅을 서울시가 전량 사들이는 ‘토지공영개발’ 방식을 처음 시도하여 인구 10여 만 명의 수용이 가능한 주거지를 만든다고 해서 국민들로부터 관심을 끌었다. 목동 주민들 또한 ‘..
이른 아침 용산역을 향해 가는 택시 안. “나비축제 보러 가시나 보죠?” v 광주가 고향이라는 운전 기사는 내가 함평에 간다니까 그렇게 되물었다. 거센 농민운동의 진원지였던 함평은 30년이란 세월을 거쳐 어느덧 축제의 고을로 재인식되는 것일까? 전라남도 광주에서 서남쪽으로 50여 km 떨어진 함평은 서울에서 기차로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다. 태풍주의보 때문에 우려했으나 막상 도착한 함평에는 가을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고 있었다. 강렬한 햇볕에 고개를 바로 들기 어려웠으나, 들녘의 벼이삭을 여물게 하기 위한 고마운 볕이라 생각하니 밉기는커녕 정다운 느낌마저 들었다. 서울에서 맛볼 수 없는 풀내음 묻은 바람이 외지인을 반겼고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논은 군데군데 노르스름한 빛깔을 띄고 있었다. 아침에 만..
2005년 8월, 신림 사거리는 대형 쇼핑몰과 나이트클럽, 오락실 등 각종 상가와 바쁘게 지나는 행인들로 분주하기만 하다. 19년 전 이곳에서 반미 시위 도중 분신한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흔적을 다시 찾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시 집회 참가자들에게 들은대로 사거리에서 보라매공원 방향으로 100m 정도 걷다보니 연좌농성이 시작됐다는 가야쇼핑센터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그 건물 진입로 쪽의 도로변에서 집회는 시작됐을 것이다. 하지만 열사들이 분신한 3층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을지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었다. 인근의 상인들 몇 분에게 물었으나, 86년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버스정류장 바로 뒤편 안경점 진열장 안으로 나이 지긋한 노인분이..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북의 행정구역상으로 개성 직할시 판문군 판문점리. 서울에서 서북방으로 62km, 평양에서 남쪽으로 215km 떨어진 이곳 판문점은 유엔군과 북한군의 공동경비구역(JSA)으로 7천만 겨레의 통한이 서린 장소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에서 해방된 지 60년을 맞는 올해도 이곳이 상징하는 분단의 현실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철저하게 옭아매고 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분할 점령했을 때, 분단체제가 환갑을 넘기게 되리라 그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또한 스물 두 살의 처녀가 백두산에서 출발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왔던 89년 한여름 전만 해도 저 북녘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산다고 생각한 남녘 사람들이 얼마나 됐을까! 분단체제의 통일운동 좌우..
87년 6월민주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꼽지만 실상 전두환 정권의 몰락 징후는 이미 그 전해인 86년부터 속속 불거져 나왔다. 다시 말해 민중의 생존권 보장 요구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폭발 일보 직전으로 치닫는데 반해 독재권력은 오로지 폭력적이고 야비한 방법으로 이를 억눌러왔다. 이러한 탄압의 연장선으로 부천경찰서에서는 아예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하는 추악하고 더러운 만행이 저질러져 당시 사회를 경악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공권력에 의한 여성 유린 부천경찰서 형사 문귀동은 위장 취업한 혐의로 연행된 여대생을 심문하면서 엉뚱하게도 ‘5?3 인천 시위’ 관련 수배자의 행방을 추궁했다. 모른다고 하자, 뒷수갑을 채운 상태에서 그 여대생의 옷을 벗겨 차마 글로 적지 못할..
부산지역 6월민주항쟁 민주화를 향한 절규와 승리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유월, 붉은 옷과 태극기로 시청과 광화문을 수놓았던 응원 인파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15년 전 또 다른 유월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지향과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군중을 비교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 있으나, 어떤 이들에겐 오랜만에 접하는 광장의 폭발적인 구호와 자발적으로 단결된 군중의 모습에서 그 옛날 아름다웠던 한때가 연상됐을 법도 하다.겨우 한 종목의 스포츠에 전국적으로 열광하는 기현상을 두고 어떻게든 87년 항쟁의 맥을 찾으려 애썼던 그들의 모습에서 억지스러움보다는 왠지 서글픔이 앞섰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개인과 가족 이기주의에 빠진 나머지 광장과 공동체의 정서를 잃었다는 것이고 생계 문제에 다소 여유가 생긴 반면 시대..
다시 또 5월이다. 시간은 흘러가 버리지만 반복적인 절기와 날짜가 옛일을 기억케 하고 그 의미를 반추하게 만든다. 한국 사람이라면 비단 광주 시민이나 무슨 대단한 민주투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80년 5월을 어찌 무감하게 회상할 수 있을까? 역사에 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한 도시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만행이 두고두고 가슴 아플수록 그 직전 서울의 봄에 벌어진 반군부 민주화투쟁에 대한 여러 가지 상념을 떨칠 수 없다. 서울역 광장의 함성 때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무려 십여 만 명의 학생들이 모여 ‘전두환 퇴진하라!’, ‘비상계엄령 해제하라!’, ‘이원집정부제 철회하라!’를 목이 터져라 외쳐대고 있었다. 여기에 수십만의 시민들까지 가세해 광장은 물론 인근의 차도와 인도, 고가도..
1974년은 대한민국의 헌정 사상 가장 엄혹한 해로 기록될 만하다. 1월 8일, 새해 벽두를 대통령 긴급조치 1호로 불안스럽게 시작한 그해에는 민청학련, 인혁당 재건위, 문인간첩단 사건 등 굵직한 정치공작과 각종 시국사건들로 점철됐다. 특히 양심적 문학인들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고 뜻깊은 해이기도 했다. 바로 11월 18일 ‘문학인 101인 선언’을 통해 민족, 민중, 민주를 지향하는 문예운동조직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가 탄생한 것이다. 왜 시대는 ‘자실’이라는 투쟁적인 문인 조직체를 필요로 했을까? 그 대척 지점에 박정희라는 독재자가 있었다. 72년 12월, 그는 대통령의 초법적인 절대권력과 장기집권을 보장하는 유신헌법을 공포했고 이에 73년 학생과 민주인사들이 헌법개정..
지난 설연휴의 마지막 날에 있었던 북한 외무성의 핵 보유 선언은 한반도와 주변국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특히 이라크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이란을 다음 표적으로 삼아 압박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돌발 선언에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분위기다. 우리 사회에서도 북핵에 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에 앞서 북한을 궁지로 몰아간 미국의 일관된 대북 적대정책과 경제 제재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자신은 수천 개의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다른 나라는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게 하는 일방적인 초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자유의 수호신이자 세계의 경찰 역할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양 지구 곳곳에서 패권을 뽐내고 있는 미국. 우리에게도 이라크 파병과 미군 범죄 등으로 인해 많은 ..
천주교 목성동주교좌성당(이하 목성동 성당)은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안동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서 한 시대를 누렸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붉은 벽돌과 높은 첨탑이 인상적인 고딕양식에 가까운 건축물이었다. 안동 시가지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목성산 이마 위에 올라앉아 풍수지리로 볼 때도 손색이 없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 안동 어디에서 보더라도 높은 산 위에 올라앉은 성당 건물은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외부 사람들이 안동을 둘러보고 이미지를 새긴다면 몇 손가락 안에 들기에 모자람이 없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안동 사람들에게도 목성동 성당이 각별하기는 마찬가지다. 성당 들머리를 지나면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기 마련인 매력이 있었다. 우선 눈에 띄는 구 교구청 건물의 양식도 특이하지만 창문을 빼놓고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