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인물/칼럼/인터뷰 (230)
함께쓰는 민주주의
10년 전 그대로 무대와 거리에서 배우 권해효 시민단체가 가장 신뢰하는 배우 “나름대로 룰이 있습니다. 본업이 연기자이기 때문에, 예정된 촬영이나 공연 시간을 바꿔가며 집회나 관련 행사에 나가진 않습니다. 다만 그 이외 시간엔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부지런을 떱니다.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비추고, 활동가나 시민 여러분께 ‘안녕하십니까, 고맙습니다, 힘내세요’라는 뜻을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배우 권해효(41) 씨는 “활동가도 아니고, 대단한 참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부지런을 좀 떨고 얼굴이나 비추는 정도”라며 ‘참여’나 ‘활동’이라는 말을 한사코 사양했다. 하지만 그는 안티 조선 운동,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집회, 호주제 폐지 운동 등 수많은 ‘활동’에 ‘참여’하며 시민단체들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문화..
박형진의 '변산바다 쭈꾸미 통신' - 서정민갑 변산에는 그가 산다. 농사꾼 시인 박형진, 그는 변산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농사지으며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50줄이 가까운 나이에도 흙 파먹고 사는 것을 운명처럼 아는 그는 학교라고는 중학교 1학년까지 다니다 만 것이 전부다. 학교 공부는 일찌감치 작파하고 서울에서 고물장수를 해가며 세상공부를 하던 그는 어느 날 “농민은 농촌에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와 농사짓고 굿치며 농민운동을 하고 또 글을 쓴다. 세상에 글 쓰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이라고 소설가라고 작가라고 명함 내밀며 목에 힘주는 이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박형진은 잘난척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쓴다. 중앙문단에서 알아주지도 않고 상표등록도 되어 있지도..
B급 좌파 김규항의 글 모음집 나는 왜 불온한가 고향 친구들을 만날때 마다 낯설다. 아저씨가 다 되어 가는 유부남 사내들의 화제란 건강관리와 재테크, 그리고 아이 얘기가 대부분. 늘 입을 닫고 조용히 들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쩌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매한가지다. 세상이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라는,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자조섞인 결론은 결국 노래방의 고성방가로 이어진다. 서른을 갓 넘긴 사내들의 조루같은 조로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새벽길은 그래서 언제나 쓸쓸하다. 아파트의 크기와 은행계좌의 잔고와 자동차의 종류로 행복을 가늠하는 짐승같은 자본의 가치관에 잡아먹혀버린 친구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설 때 김규항의 글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하다. 개혁의 담론에 매..
차이와 차별에 대한 상쾌한 딴지 걸기 영화 "별별이야기" 예전부터 TV 사극이나 영화에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올 때 늘 쓰였던 말이 있다. 농민군 지도자가 봉기를 앞두고 비장한 표정으로 했던 말은 바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요새 말로 하면 ‘인권이 보장되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사람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권리와 차별 없이 평등할 수 있는 권리, 그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목숨까지 내걸었는데 과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의 체감인권지수는 매우 낮은듯 하다. 사회적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되어 최저계층과 상위계층의 평균소득 격차가..
남한 사람들의 가짜 통일 엿보기 영화 "간큰가족" 2005년 8·15 민족대축전은 특별한 사고 없이 잘 진행되었다. 북측 대표단이 분단 이후 최초로 남측의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남과 북의 축구 경기가 벌어지며 남북 이산가족의 화상상봉이 이루어지는 시대는 기실 얼마나 놀라운 발전인가.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애도하는 말 한마디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총련 의장이 북한에 다녀오고, 금강산에서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곧 개성도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늘 열망하면서도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지를 의심했던 일들이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통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멀리 있는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과..
80년대는 문학의 시대였다. 누가 뭐라 해도 그러했다. 작품의 완성도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출판 역사상 유례없이 많이 팔린 시집들이 등장하고 그 시집이 시낭송 음반으로,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라면 단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전두환 군사독재의 폭압정치 아래에서 철저히 억압된 상상력은 오히려 작가들을 치열한 작가 의식으로 단련시켜 시와 소설과 수필 등 모든 분야에서 수많은 걸작들을 내놓게 했다. 굳이 무수한 작가의 이름과 작품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문학에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80년대가 얼마나 많은 걸작들을 남겨놓은 시대인지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문학보다는 영상 쪽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리게 되면서 ..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성 하모니의 매력 꽃피는 나무의 여행 ‘소풍가는 날’은 기독교 민중가요 노래패 ‘새하늘 새땅’에서 활동하던 가수 방기순과 ‘새하늘 새땅’을 거쳐 퓨전국악 팀 ‘the林(그림)’에서 활동 중인 건반 연주자 신현정 그리고 전대협 통일노래한마당에서 ‘진혼곡’ 등의 노래로 큰 인기를 끌었던 가수 김영남으로 이루어진 여성 트리오이다. 앞서 박창근의 음반을 소개할 때도 언급했지만 90년대 후반부터 민중가요 진영에서는 개인 가수들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었는데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예전에는 각기 다른 팀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어울려 새롭게 팀을 꾸리는 경향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활동을 중단했지만 고명원, 유인혁, 정윤경으로 꾸려져 남다른 민중가요 밴드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유정고밴..
박창근 2집 2000년대 민중가요 진영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지난 8,90년대와는 달리 개인 창작자들의 수가 노래패의 수보다 많다는 것이다. 꽃다지, 노래공장, 맥박, 소리타래, 아름다운 청년, 우리나라, 젠, 좋은 친구들, 천지인, 희망새 등 적지 않은 수의 노래패(그룹)들이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지만 개인 창작자들이 그보다 두 배나 많은 것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다. 이것은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현상인데, 당시 노래운동을 대표했던 노래패에서 활동했던 창작자들이 팀 활동의 중단으로 인해서 이거나 혹은 개인적인 창작 욕구를 펼치기 위해서 솔로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나타난 경향이다. 기존의 노래패에서 솔로로 독립하는 경향이 대폭 늘어난 것과 함께 소수지만 처음부터 솔로로 활동하는 민중..
얼마 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20주년 기념행사의 진행을 도운 일이 있다. 아직 30대 초반인 필자에게 민통련은 사실 특별한 감흥을 주기보다는 80년대의 전설 같은 막연한 느낌만을 주는 조직이었다. 기념행사 당일에 준비한 문화프로그램을 직접 보면서 느낀 점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그날 자리를 가득 메웠던 분들의 면면이 오히려 더 많은 울림을 주었다. 그날 행사장에 오신 분들의 평균 연령은 대략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아마 그 연배도 젊은 축에 속했을 것이고 더 나이 드신 분들도 많았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민통련 부문 조직을 소개할 때였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순서가 되어 당시 회원들이 우루루 등장했는데 세상에! 청년은 아무도 없고, 중년의 아저씨들만이 가득 했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것이다..
비극의 역사를 향한 장난 같은 질문 "천년의 수인" 만약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던 안두희와 비전향장기수 그리고 5·18민중항쟁의 진압군이 얼굴을 마주보고 함께 살아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연출가 오태석의 연극 은 이런 상상에서 출발해서 한국 현대사의 뿌리를 되짚어보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알려진 것처럼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던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3개월 뒤에 15년 형으로 감형되었고 한국전쟁이 나자 석방되어 포병장교로 복귀한다. 그는 이후 곽태영 백범독서회장, 권중희 민족정기구현회장에게 테러를 당하며 도피 생활을 한다. 하지만 결국 1996년 10월에 인천의 자택에서 시민 박기서 씨에게 피살된 그는 암살 배후에 대한 자백을 하기도 하고 백범 묘소를 강제 참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