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인물/칼럼/인터뷰 (230)
함께쓰는 민주주의
지난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면서 많은 주변 사진가들에게 자극을 받았습니다. 사진을 시작하던 초기에는 선배 사진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고, 사진이 조금 지겨워지던 시기부터는 후배 사진가들에게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런 후배 사진가 중에 정규현 씨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그랑제콜인 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포토저널리즘을 전공한 정 씨는 코소보 전쟁을 비롯해 북한의 탈북자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다큐 사진을 제작했습니다. 그 사진들은 우리가 알만한 매체인 과 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원래는 에 실리기로 했던 기사가 정치적인 문제로 제외됐습니다. 처음에는 내 사진이 모자라 그런 것인가 낙담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집장이 뻬르삐뇽 사진페스티벌(세계적인 포토저널리즘-다큐멘터리사진 페스티벌)에 30장을 ..
크지 않은 키에 단단한 체구, 턱수염은 덥수룩하고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는 녹녹치 않은 눈매를 지닌 사진가 류은규(45) 씨. 그가 건넨 명함에는 한자가 빽빽합니다. 남경시각예술학원 사진학과 교수. 교수님 스타일도 아니지만(!) 게다가 중국에서 사진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 하지만 저나 한국 사진계에서는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몇 해 전 김좌진 장군의 딸 등을 찾아내 사진과 구술을 기록, 국내에 알림으로서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를 이어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가 한국의 많지도 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중에서 류 씨를 주목한 것은 좀 남다른 사진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류 씨는 1993년 중국에서 본격적인 작업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
문학판에는 ‘구라’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입담 좋은 소설가 황석영 씨가 ‘황구라’로 통합니다. 사진판에도 구라들이 있습니다. 충무로나 인사동의 포장마차에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소주잔을 비울라치면 이런 구라들이 빛을 발합니다. 우리나라 구석구석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는 사람, 내 손길 닿지 않은 문화유산이 없다고 허풍 치는 사람들로 떠들썩합니다. 그 때 조용한 소리로 “그런데 말이야…….”하며 끼어들어 “그곳은 말이야,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낙동정맥을 따라서……. 백병산·백령산·주왕산·주사산·운주산·사룡산·단석산·가지산·취서산·원적산·금정산·몰운대로 이어지고 그 줄기는 낙동강 동쪽에 위치하는데, 그 산줄기의 동쪽으로 울진·영덕·포항·경주·울산·부산이 나오고, 서쪽으로는 태백·봉화·영양·청동·영천·경..
우리가 주변에서 가장 많은 사진을 접하는 매체는 신문이 아닐까 합니다. 매일 배달되는 신문 1부에는 수십 장의 사진이 담겨있으며 사진 한 장 한 장에는 꽤 의미있는 정보들이 들어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고 있는 사진기자들은 전국적으로 수백 명에 달하며 매일 어디에선가 우리 사회의 기록해야할 현장을 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사진가라고 부르기에는 힘든 면이 있습니다. 사진계에서 ‘이 사진은 꼭 신문사진 같다’고 하면 꽤 모욕적인 평으로 받아들입니다. 신문사진의 과도한 정형성과 판에 박힌 앵글감 등은 사진이 갖는 정보성 외에 실험성과 창작성이 현격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문사진계에는 전통처럼 예술성이 뛰어난 이들이 존재했습니다. 정범태, 강운구, 주명덕, 김녕만 같은 이들이 바로 신문 사진기..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문호(50) 씨는 독특한 느낌을 주는 사람입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강렬함이나 터프함 대신에 도인(?) 또는 선비적인 풍모를 가졌기에 그렇습니다. 몇 마디만 나눠 봐도 사진 이야기보다는 세상 살아가는 올바른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가 정말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본다면 『성숙에 이르는 명상』, 『바보들, 순교자들, 반역자들』, 『바드샤 칸(비폭력적인 이슬람 전사)』, 『신의 전기』, 『비노바 바베』, 『평화의 미래』, 『관』 등 인문학 책들의 전문 번역자임을 알게 됩니다. “1983년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번역 일을 하면서 사진을 취미로 시작했다. 사진을 시작한 처음부터 사람들을 찍었다. 애당초부터 풍경이라든가 꽃이나..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격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표면적인 것이 아닌 내면적인 변화를 원합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안세홍(37)의 사진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중심에 있다. 청년기부터 꾸준히 작업해 온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작업은 어느새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할머니들을 처음 찍을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찍고 나면 도무지 동네 할머니들과 구별이 안 되는 거예요.” 그는 할머니들을 찍으면서 차츰 일본·성노예·사회적인 문제 등에서 할머니들의 개인적인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드러나지 않는 슬픔과 개인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할머니들을 텍스트 없이도 이해시킬 수 있는 이미지 작업이 필요했다. “나와 피사체 사이에 아무 것도 없이 바로 투사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그 사..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서 노순택(36)은 유명인사입니다. 아마도 이 곳 주민들이 알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그이 뿐일 것입니다. 자신들의 얼굴을 전국에 알려주는 것도 모자라 요즘은 같은 동네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칩니다. 얼마 전 동네에 사진관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100가구도 채 안되는 촌 동네에 왠 사진관? 사진가 노순택은 왜 이곳에 살면서 사진관을 연 것일까요? 대추리는 평택에 위치한 K-2 미군기지 바로 옆동네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의 재배치로 인한 기지 확장 부지로 선택된 곳이 바로 대추리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오래전 평택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강제이주 당해 대추리에 정착했고 다시 그 자리에서 뿌리 뽑힐 위기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노순택은 이곳을 방문한 후로 큰 마음의 부담을 느꼈다고 ..
나이 들어 사회생활을 하다가 만난 사람을 동료 또는 선후배로 10여 년 넘게 가깝게 지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사진판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성남훈이 그런 경우입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 만난 후로 동료로서 선배 사진가로서 그는 저뿐 아니라 많은 사진가들의 귀감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남훈이 프랑스에서 사진을 시작한 후 15년의 긴 장정 끝에 내놓는 이번 사진은 특별합니다. 1990년대 초반 프랑스에서 취재한 루마니아 집시들의 사진으로 서울에 있던 에서 개인전을 했을 때만 해도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세계적인 포토저널리즘 콘테스트인 수상작 작품집(1994년)을 통해 그의 이름을 접하고는 ‘아! 우리나라 작가 중에도 해외에서 다큐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
얼마 전 양평에 있는 사진전문갤러리 에서 사진가 김수남(57)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두 달 동안 개인전을 열고 있었고 오늘은 ‘작가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어휴! 이거 너무 추워서 사람이 오겠나?” 올 겨울 일찍 찾아 온 추위에 양평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은근히 걱정이 되나 봅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이 추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굿’의 작가 김수남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진가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김수남은 비인기 종목인 다큐멘터리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독특한 예입니다. 게다가 그의 사진 소재가 ‘굿’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합니다. 1970년대에 굿은 유신정권에 의해 ‘미신타파’라는 명목 하에 없어져야 할 구습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하지만 김수남은..
양키 물건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주인아줌마는 뭔가 달랐다. 시장통 딴 아줌마들은 한결같이 옆으로 퍼진 체형이었으나, 그 아줌마만큼은 시쳇말로 ‘몸짱’에 가까웠다. 얼굴도 반지르르 마치 밀감처럼 윤이 났는데, 아마 양키 화장품 덕분이었을 터. 하지만 그 아줌마를 본 따 양키 화장품을 사 바른 우리 엄마, 이모, 숙모들은 도무지 ‘때깔’이 나지 않았다. 양키 물건은 ‘동동 구리무’와 달리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아줌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교양이었다. “어머, 너희들 왔니?” 야들야들한 그 목소리. 마른버짐에 기계충에 국수 같은 때에 이에 서캐에 누런 콧물에, 내가 내 얼굴을 봐도 한심한 그런 놈들을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되는 양 맞이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먹게 된 최초의 양식,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