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인물/칼럼/인터뷰 (230)
함께쓰는 민주주의
산목련이 이울고 있었다 할깃할깃 눈치를 보더니만 급기야 냅다 추월하여 다른 차량들을 앞질렀다. 오대산 상원사를 눈앞에 둔 시내버스는 포장하지 않은 도로를 거북이 걸음으로 가는 휴일 차량들을 견디지 못하고, 휘우듬하게 굽고 좁은 도로를 박차고 나아가 기어코 앞머리에 서고야 말았다. 창밖을 내다보며 산기슭에 바짝 눈을 대고 앉았던 자리가 옹색해졌고, 차라리 걸어서 가야 했던 것을 하는 때늦은 후회를 하였다. 길가 산목련의 또 다른 이름 함박꽃나무의 꽃이 한창 감물처럼 이울고 있었던 까닭도 없지 않았다.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은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하여 두로봉, 상왕봉, 호령봉, 동대산 등 다섯 봉우리가 누대를 이루고 있어 오대산이라고 하며, 이 다섯 봉우리에는 또 각각의 암자들이 둥우리를 틀고 있어 종교를 가..
사라진 탄광들, 주점(酒店)의 이름으로 남다 까아만 저탄더미 아래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상상했던 것일까. 세 번씩 버스를 갈아타고서 도착한 태백버스터미널은 여느 강원도 버스터미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터미널 주변의 노점에서 찰옥수수를 쪄서 팔고 있던 한여름 풍경은 한갓지다 못해 차라리 지루하게까지 여겨졌다. 산으로 들어가기 위한 걸음이었으나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하다못해 어디에 들어가 늦은 아침을 먹기에는 또 어중됐다. 지짐거리던 빗줄기가 뜨막한 사이로 한여름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였다. 황지연못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더덕을 까서 팔고 있던 길가 전봇대 옆의 노파는 활짝 웃으면서 저 길로 쭈욱 가면 있을 것이라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길가에서, 시장에서 푸성귀를 파는 노파들을 만나면 그들 얼굴에서 간..
오색 민박촌 담벼락 화단에서 만난 하늘매발톱꽃은 실하면서도 탐스러웠다. 음료와 새참거리를 사기 위해 들른 구멍가게 노파는 점봉산으로 가는 지름길을 일러주었다. 이른 아침 다래 어린순을 따가지고 온 뒤 아침을 먹는 중이라면서 나물을 하러 가느냐고 물었다. 대답 없이 웃으면서 문을 나섰다. 시골 노인들의 길안내는 가늠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잘못 알아듣기 일쑤인지라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역시 내 어림짐작으로 찾아들었다. 민박촌은 산 깊이 들어앉았고, 마지막 집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더덕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골짜기는 깊었고 등성이는 높았다. 더덕냄새의 향방을 쫓을 겨를이 없었다. 어느 생이 또다시 있을라치면 나는 아마도 더덕이나 소나무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더덕과 소나무를 탐했다. 산에 나..
길은 흔적이다 봄산 가득 따듯한 바람이 일깨운 초록의 세상을 꿈꾸었다. 그렇게 꿈꾼 세상의 한 지점이 하필이면 백두대간의 어느 마루금 삽당령에서 이어지는 석병산이었다. 초행의 석병산 산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산행지도는 챙기지 않았다. 산은, 숲은 결코 선으로 표기할 수 없다. 또한 지도의 단일하고 일목요연한 통제의 질서가 언짢을 뿐만 아니라, 숲의 많은 것들을 은폐하고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강릉과 정선을 왕복하는 직행버스는 삽당령 고갯마루에서 멈췄다. 이른 아침인지라 햇살은 고갯마루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고갯마루에 섰으니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북으로도 갈 수 있었고, 남으로도 갈 수 있었다. 선택은 발걸음의 몫이었다. 그렇더라도 마음속에 품고 온 길이 있었으니 걸음은 자연스..
숲이 수평으로 조화롭다면, 산은 수직으로 강건하다. 바람결은 매서웠고 바다물결은 높았다. 근래 날씨는 한겨울처럼 춥고 시렸다. 길 떠나는 자의 심정이 못자리를 만드는 농부의 우려와 닮았다. 그런 틈 사이로 주춤주춤 다가온 봄빛은 마을 곳곳에 사태가 날 지경으로 봄꽃들을 피웠다. 살구나무가 해뜩발긋한 꽃을 피웠으며, 연푸르면서도 순백으로 피어난 자두꽃으로 마을은 한겨울 폭죽처럼 화려했다. 4월 숲을 찾아 설악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시계가 좋은 날이면 거진항에서건 화진포 호수에서건 중청과 대청의 설악산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었지만 그곳은 언제나 아주 먼 곳이었다. 마치 화진포성이나 거진 등대에 오르면 금강산의 구선봉을 포함한 말무리 반도를 볼 수 있는 광경과 다르지 않았다. 비선대에서 대청봉까지의 길은 ‘산..
날씨는 흘미죽죽(일을 여무지게 끝내지 못하고 흐리멍덩하게 끝내는 모양) 비라도 한 줄금 쏟아낼 듯하였다. 눈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도 아닌 것이 마치 저녁 굶은 시어미 얼굴처럼 흐렸다. 강원도 고성 삼포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하여 더디기도 하고, 빠르기도 했다. 어느 해 이른 봄 나는 짝짓기를 하는 개구리들 곁에서 어린 잣나무들을 줄 맞춰 심었다. 미친바람이 불어댔고, 이르게 핀 연분홍 진달래꽃은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어느 날은 인정사정없이 불어대는 미친바람 때문에 작업을 중도 포기하고 가까운 바위틈이나 개자리 같은 곳에 찾아들어 도망자처럼 웅크려 고개 숙이고 있어야 했다. 얼굴을 할퀴며 지나치는 바람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골짜기 응달에는 잔설이 깊어서 발이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기도 했다. 나..
그곳, 미시령에는 큰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수를 앞둔 절기에 그만 마음을 놓았던 것이 불찰이라면 불찰이었을 것이겠지만, 어쩌면 미시령은 이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바람들만의 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길 떠나는 날 이른 아침의 청명한 햇살은 큰 부조가 아닐 수 없었다. 동해 수평선 위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커다란 아침 해를 보았다. 일진은 순조로울 듯했으나 장담할 일은 아니었다. 미시령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시인이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고 했던 바로 그 어둠이 낳은 돌, 울산바위를 만나기 위한 내심을 은근슬쩍 숨겨놓은 채 그 방편으로 미시령을 향해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울산바위 울산바위는 천후산(千吼山), 하늘이 우는 산이라는 큰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바위이며 외..
얼마 전 KBS 은 태국의 쿠데타를 집중취재해 방영했습니다. 방송내용도 좋았지만 누가 재수 좋게 마침 쿠데타가 일어나던 저 때 태국에 있었을까 했습니다. 방송 마지막에 제작진 자막이 오를 때 박종우라는 이름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역시나!”했습니다. 2004년 쓰나미가 덮칠 당시에도 현장에 있었던 그는 참 사진가로서는 억세게도 재수가 좋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해 250일이 넘게 해외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는 그에게 조금 더 많은 기회가 부여됐는지도 모릅니다. 다큐멘터리사진가 박종우는 한국의 많은 사진가들 중에 특별한 존재입니다. 잡지나 전시장에서 보다는 TV에서 더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의 어깨에는 사진용 카메라와 함께 방송용 HD카메라가 걸려있습니다. 사진..
숲은 동·식물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키워왔다. 바람이 지나갔고 햇살이 모여들고 계류가 흘렀으며 꽃들이 피어났고, 나무들은 늙어갔다. 봄이면 그곳에서 더덕을 캤고 삼지구엽초(음양곽) 꽃을 구경하였으며 수리취를 뜯었다. 언 강이 따듯하게 녹아 흐르고 낮은 자리에서 숨죽이며 제 부피를 키우고 있던 여리디여린 싹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면 깜깜하던 산과 들은 눈 깜짝할 사이 초록의 눈부신 세상으로 돌변하였다. 길고 길었던 삭풍의 겨울은 옛말이 되었고, 큰 산에 곰처럼 쌓여 엎드려 있던 눈더미들은 아름다운 물무늬로 바뀌면서 강을 건너 바다로 흘러갔다. 숲의 기억 닫혔던 창문을 열어젖뜨리는 그날부터 누구든 발탄 강아지처럼 숲으로, 숲에서 나무와 풀과 꽃들을 만나러 나서곤 했다. 지망지망 걸으면 만나지 못할 보랏빛, ..
저는 어린 시절 서울의 변두리에서 자랐습니다. 변두리라고 해야 동대문에서 1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 곳에 미군부대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이 기지 앞에 있었는데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살았던 동네였죠. 당시는 미군이 주인이었고 주변에 사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손님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쉬쉬했지만 우리 동네에는 미군들을 상대하는 아가씨가 많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여성들과 미군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나는 함께 자랐죠. 남자 아이, 여자 아이, 피부가 하얀 아이, 검은 아이 등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그 미군부대는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무렵 사라졌습니다. 미군들도 본국으로 돌아가고, 운 좋은 여자들은 혼혈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도 아니면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