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인물/칼럼/인터뷰 (230)
함께쓰는 민주주의
해방으로 전진하는 사람들“고개 숙여! 이년들아, 어느 년이 고개 드는 거야! 아침부터 맞아 뒈져볼래, 미친년들!” 우리는 90년 5월 붉은 태양이 작열하는 공장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리는 하나’가 씌어진 붉은 셔츠를 입고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조합원 여러분 힘내요!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공장 정문 밖에선 개처럼 질질 끌려 내동댕이쳐졌던 조합원들이 울며불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누구 한 사람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물이 콧등으로 흘러 콧물과 함께 뭉개져 시멘트 바닥에 ‘뚝뚝’ 떨어져도 손으로 훔치지 못했고, 그냥 대책 없이 흘려보내야 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우리 들여 보내줘!” 공장 문밖의 조합원들이 구사대에게 빙 둘러 갇혀 있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느라 아우성이었..
그는 왕이었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지존’이었다. 그가 뜨기만 하면 학내의 내로라하는 ‘가다’들은 모두 꼬리를 내렸다. 감히 대적할 자가 없으니 그는 캠퍼스의 ‘총가다’이자 왕이었다. 학내의 주먹 실력은 럭비부
흰 얼굴에 긴 생머리, 서글서글한 눈매에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온 그녀는 활달하면서도 조금은 새침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서클룸이나 술집에서 종종 기타를 치며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오월의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은 존 레논의 연인 오노 요꼬처럼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팝송을 부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나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댄싱 퀸’에 맞춰 그녀가 저도 몰래 몸을 격렬하게 까닥이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기는 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팝송 매니아에다 클래식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고, 나중에 고백한 바에 의하면 피아노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그녀에게 우리는 ‘카수’라는 별명을 붙였다.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영산강’, ‘기지촌’, ‘맹인가수부부’……. 담배와 막걸리 냄새에 찌든 ..
1983년 4월 15일은 나에게 참 기묘한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수면실(음악 감상실)에서 클래식을 자장가 삼아 한숨 자고 나와 문과대 건물인 서관으로 향했는데 한 학생이 건물에 밧줄로 매달려 있었다. 그 학생 머리 위에는 12시가 되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가 흘러나오는 시계탑이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진달래, 목련꽃, 개나리, 벚꽃 등 봄꽃들이 회색빛 오래된 석조 건물과 학생들을 아름답게 뒤덮고 있었다. 공중에 매달린 학생은 건물 벽에 뭐라고 쓰고 있었는데 긴장 때문인지 흔들리는 줄 때문인지 안정되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반파쇼(독재 반대)를 쓰려고 했는데 ‘반’자를 쓰고 ‘파’자를 너무 오른쪽에 쓰는 바람에 ‘쇼’자를 중간에 써서 ‘반쇼파’(쇼파 반대)를 쓰고 말았다. 강당 안..
연옥 언니 사람들은 살면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데 그중에는 정말 보고 싶은데 못 보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여자에게 연옥 언니는 보고 싶어도 못 보는 그런 사람이다. 아버지가 남의 집 과수원 일을 해주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집의 장녀였던 여자는 사실 고등학교도 겨우 다닐 수 있었다. 여자에게는 아래로 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여자와는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질 않던 남동생은 공부를 썩 잘했다. 여자는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열아홉 겨울, 아직 고등학교 졸업식도 안 끝난 여자는 어느 새벽 청량리행 열차를 타기로 하고 가방을 싼다. 여자의 아주 오랜 친구 명희가 환타 한 병과 정말 동그랗던 보름달 빵을 사서 건넨다. 병에 든 환타를 기차 안에서 어떻게 먹어야 하나 여자는 잠시 난감했다. 기차를 타기..
질풍노도의 100일이었다. 1971년 3월부터 5월까지 대학가는 극심한 몸살을 앓았다. 최루탄과 돌멩이가 사라질 날이 없었고, 예전에는 잘 볼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졌다. 가두시위, 투석전, 휴교, 휴강, 제명, 무기정학, 연행, 구속, 수배로 얼룩진 나날이 계속됐다. 학사일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주범은 정부 당국의 교련교육 강화 조치와 3선개헌에 의해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였다. 학생들은 교련 반대를 이슈로 극렬한 데모를 벌였고, 선거 부정을 감시하기 위해 참관인단을 각 지역에 파견했다. 대학생들의 이런 적극적인 움직임이 정국 긴장을 한층 고조시켰다. 학기 초에 한 신문사 앞에서 벌어진 사이비 언론 화형식과 각 대학에서 결행된 교련복 및 군화 화형식은 그 후 전개될 학생과 언론인의 험난한 민주..
무주구천동, 기이하고 슬픈 강마른 긴 가을가뭄 가운데서도 들판의 벼이삭은 황금빛으로 여물고 있었으나 강바닥은 몹시도 메말라 마른 먼지를 풀썩이면서 힘겹게 흐르고 있었다. 길섶의 가을꽃들 또한 물기 없이 제 빛깔을 잃은 채 까맣게 말라 죽거나 흙빛으로 아등그러지고 있었다. 너른 들의 벼농사는 쨍쨍한 햇볕이 풍년의 징조이겠으나 산비탈의 밭농사는 흉년의 기미와 다름없었다. 콩꼬투리 속의 콩알은 여물지 못하였고, 김장밭의 배추 속은 올차게 앉지 못하고 있었다. 멀리 돌아 길게 가로질러 덕유산 무주구천동에 닿았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는 중추의 다저녁때 당도한 무주구천동 터미널 주차장은 휑뎅그렁했고, 주변은 황막하도록 풀들이 무성했다. 다음날 가고자한 서울행 버스 시간을 묻는 내게 직행버스 기사는 터미널 건물..
백무동 계곡 집채만 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은 나무의 뿌리는 지층을 향해 혹독한 삶이 그만할까 싶을 정도로 길디길게 뻗어 마침내 땅 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때로 먼 길을 앞에 두고 부리는 엄살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지난밤 별 총총하던 하늘은 엷은 구름이 낮게 드리웠고, 푸른 죽창의 왕대밭은 미풍조차 없이 잠잠하였다. 미처 산마루를 넘지 못한 아침 해가 동해 저 끝에 머물고 있는 시간, 계류의 물소리는 도란도란 속삭이듯 남은 잠기운을 털어내며 귓가를 즐겁게 하는 지리산 백무동 계곡의 서릿가을은 흔연한 꿈속 같았다. 늦저녁이 되어서야 백무동 매표소 어름에 닿았다. 진부령을 넘고 다시 서울에서 안의, 함양을 거쳐 다다른 백무동의 저녁은 깜깜하였으나 가로등 불빛은 돌올했고, 펜션의 불빛은 지나치게 밝고 환했다..
어스름새벽 숲길은 나뭇잎 위로 떨어지며 흩어지는 비꽃의 소리로 한층 적요했다. 간밤에 내리던 비가 긋고 구름이 벗개면서 먼데 새벽하늘이 열리고 있었으며, 왜바람 속의 나뭇잎들은 사뭇 거칠게 빗방울을 떨쳐내고 있었다. 한물 피해가 채 아물기도 전인지라 또 다른 태풍의 북상소식은 한걱정이었다. 대관령을 넘어 속리산까지, 차창 밖으로 내다뵈는 한물 피해의 흔적이 아직도 고스란했던 까닭이었으며 또한 한나절 남짓, 즉 7~8시간 정도의 산행을 계획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속리산 ‘오리숲’은 깊고 먼 숲속처럼 큰 키의 넓은잎나무들로 울울창창하였다. 사하촌 여관에서부터 법주사에 이르는 숲길의 대지와 수풀의 기운을 나 홀로 독점하며 걸을 수 있었다. 태풍 소식과 함께 간밤에 내린 웃비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멧비둘기 울..
희방사를 찾아가는 한 여름 길 어린 풀꽃들이 아등그러지는 한여름 뙤약볕 속이었다. 소백산 희방사매표소 입구까지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시내버스와 직행버스를 무려 여섯 번을 갈아타고서야 간신히 그곳에 닿을 수 있었다. 모든 도로는 서울을 향해 있었고, 변방에서 변방으로 뚫어놓은 도로들 또한 궁극은 중앙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강원도 거진읍에서 경북 풍기읍의 희방사까지 길은 힘에 겨웠다. 때맞춰 여름휴가의 막바지 피서인파와 겹치는 바람에 단양버스터미널에서 요기를 하려던 콩국수를 딱 한 젓가락 입에 넣고서는 부리나케 풍기로 향하는 버스를 향해 뛰어야 했다. 예정시간보다 두 시간 연착이었고, 언제 다음 버스가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안내에 따른 결과였다. 고속도로가 밀리는 것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