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인물/칼럼/인터뷰 (230)
함께쓰는 민주주의
쉽게 말해 이렇다. 김현성(44) 씨는 몰라도 김현성 씨의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고 김광석 씨가 ‘다시 부르기’ 해서 이제는 국민가요 반열에 오른 , 2002월드컵의 국민가수 윤도현 씨가 부른 는 대중음악의 클래식이 되었다. 그리고 김광석, 윤도현이라는 가수의 이름 뒤에는 김현성이라는 작곡가가 있다. 거리에서 노래방에서 끊임없이 ‘다시 부르기’ 되는 두 노래는 모두 김현성 씨가 작사, 작곡한 노래다. 김광석, 윤도현 그들의 시작에 어쨌든 1980~90년대의 노래운동이 있었으니, 그 시절의 민중가요는 국민가요와 국민가수로 그렇게 남았다. 와 김현성 씨는 작사, 작곡가일 뿐 아니라 가수다. 영어로 ‘싱어 송 라이터’라고 부르는 아티스트다. , 는 김현성의 목소리로도 음반에 담겼다. 자, 이쯤 되면 ..
민족의 길, 예술의 길 언젠가 시인 김지하는 예술이란 ‘기록이라는 이름의 기억행위’라고 말했다. 우리가 삶을 돌아볼 때 제일 큰 게 ‘모르는 것’이 아니고 ‘잊음’이며, 또 예술에 있어서는 긴장이 흐트러질 때가 잊음이라고 했다. 우리는 오늘 왜 살고 있는 것인가. 때때로 우리는 삶의 이상, 삶의 뜻을 망각하고 살지 않는가. 삶 속에서 지혜를 잊고 예술에서 긴장과 창조적 상상력을 잃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어둡고 메마르겠는가. 설을 앞둔 지난달 15일(목), 『희망세상』 취재진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 오랜 세월 제도권 밖에서 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운동과 문화운동 그리고 후학을 가르쳐온 김윤수 선생이 이제 일흔을 넘긴 노구를 이끌고 그곳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작품과 자료를 수집·보존과 전시, 조사·연구와 국제..
1985년 당시 이원홍 문화공보부장관의 불순한 문화예술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7월 20일 경주발언 직후 종로 경찰서는 아랍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전 전시장에 난입하여 36점의 작품을 강제 철거하고 이에 항의하는 작가 19명을 연행했다. 5명의 작가를 입건한 후 의외로 이 문제가 확대되어 공안당국은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된다. 이 사태 이후 미술가들은 미술운동을 위한 미술가 대중조직의 필요성을 논의하면서 1985년 11월 22일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를 발족시킨다. 전승보 전도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이 전시를 주도적으로 기획했던 분들은 이제 모두 50대의 중견작가입니다. 살펴보면 전 사건을 계기로 민미협이라는 진보적 미술인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또한 일반인들에게 민중미술의 존재를 알..
태권소년, 스턴트맨의 길에 들어서다. 자동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오토바이. 허공으로 떠 오른 오토바이는 지하주차장 천정에 그대로 쳐 박힌다. “이젠 끝이다 쇠고랑 차겠구나” 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의 제작자 차승재.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오토바이를 몰던 사내는 며칠 후 다시 쌩쌩한 얼굴로 현장에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정두홍. , , , , , , , , 의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연출한 무술감독 정두홍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영화에서 스턴트맨은 ‘으악새 또는 몽둥이를 든 백정’에 불과했다. “누가 스턴트맨한테 보험을 가입시켜줘?” 오랜만에 만난 국가대표 무술감독 정두홍(40)의 첫마디다. 스크린에서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거나 툭하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스턴트맨들의 실제 삶은 영화만큼 위험하고 힘겹다. 촬..
1980년 10월 27일 새벽 4시, 12·12쿠데타 군부는 전국 주요 사찰에 계엄군을 투입해 스님과 재가 신도들을 강제로 연행했다. 군부는 그날 이후 며칠에 걸쳐 전국 3천여 곳의 사찰에 진입했는데, 그때 낙산사 원철 스님이 사망하고 송월주 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 이하 승려와 관련 민간인 55명을 연행, 98명의 참고인을 불러 모두 153명을 조사하여 그 가운데 승려 10명, 민간인 8명을 구속하고 32명은 불교정화중흥회의에 회부시켜 승적박탈, 또는 종직사퇴토록 위임했다. 이른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그들의 권력장악에 호의를 보내지 않던 불교계를 향해 ‘범법자 색출과 불교정화’라는 우스꽝스런 명분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군홧발로 짓밟은 1980년 10·27법난이다. 당시 계엄군에 끌려간 스님들..
우리 눈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착각을 착시현상이라고 한다. 누구나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원인과 조건을 알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신학철 화백의 가 그렇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시각적 착각 그 자체라기보다는 우리 현대사가 빚어낸 질곡의 기억이 만들어 낸 것이다. 질곡의 기억이 만들어 낸 착시 현상. 우리는 를 통해 그런 현상에 빠져 들었다. 신 화백의 는 1989년 이후 거듭된 재판 과정의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사건을 잠시 살펴보면, 이 그림은 1987년에 제작되어 1989년 ‘통일염원 전’에 출품되었다가 공안당국에 의해 작가의 체포와 작품 압수로 사건화 되었다. 1, 2심에서의 무죄판결은 최종적으로 대법원의 유죄판결로 작가에 대한 선고유예가 내려졌다. 이후 2004년 UN인권위원회의 작품반환 및 ..
“우리 딸 이름도 이오수린이에요.” 부모 성 함께 쓰기를 하는 기자를 만나자 그는 만으로 여섯 살배기 딸 이름으로 인사를 건넸다. “물론 호적에서는 (어머니 성을 함께 쓰도록) 안 바꿔 줘서 우리끼리 그렇게 부르죠.” 그렇게 덧붙이더니 “요즘 딸이 왜 내 이름만 네 자냐고 물으면서 반항한다.”며 웃었다. 그렇게 서른아홉의 오지혜 씨는 유명한 배우이기 전에 당당한 ‘아줌마’였다. 알다시피 이 아줌마는 연기의 달인일 뿐 아니라 달필도 지녔다. 그는 에 연재한 우리시대 ‘쟁이’들의 인터뷰를 모아서 지난해 『딴따라라서 좋다』라는 책을 펴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사회를 고민하고, 세상에 발언하는 배우를 얻었다. 어쩌면 대한민국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오지혜는 스스로 ‘한국 사회가 그래도 좋..
우리 민족은 근·현대를 거치면서 크게 두 번 역사의 실패를 경험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고 그도 모자라 민족이 분단되었다. 20세기 내내 억압과 갈등구조가 재생산되었던 우리 사회가 이제 분단 60년을 지나 21세기의 문턱을 넘은지 여러 해.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고 정치·경제·문화의 완전한 민주주의를 확보하지 못했다. 미군기지 이전문제로 촉발된 평택 대추리 농민들의 아픔과, 민의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끝내 사회적 약자 계층의 피눈물을 강요하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독주 그늘에서 희망을 잃어가는 절대 다수 경제적 빈곤층의 신음이 계속되는 오늘. 우리 민족은 다름없이 그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희망세상』은 2007년 새..
1998년 5월 독재와 부패로 얼룩진 수하르또 체제가 극적으로 무너졌다. 수하르또의 뒤를 이어 대통령 직을 승계하였던 수하르또의 측근 하비비도 헌정절차에 따라 퇴진했다. 이어 이슬람 지도자 와히드와 메가와띠가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취임했으니, 민주화는 인도네시아 시민사회가 경제위기를 군사정부에 대한 도전의 계기로 적극 활용한 성과였다. 박정희 독재체제에 비견될 수 있는 수하르또 독재체제는 1965년 ‘9·30 사태’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를 수하르또가 평정하고 수까르노 지지 세력과 인도네시아 공산당세력을 괴멸시킨 가운데 수립되었다. ‘9·30 사태’ 이후 1966년까지 공산주의자로 몰려 살해된 숫자는 아직도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한 인권보고서에 의하면, 이 시기에 정치적 이유로 피살된 사람을 100만 명 ..
지금은 개발이 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세종문화회관 뒤편에는 멋진 한옥들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당주동이라 했던가. 1979년 어느 날, 거기 사는 벗의 집에서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황토』(한얼문고, 1970). 그것도 김지하 시인이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활동을 하던 벗의 부친에게 직접 서명까지 해준 시집이었다. 아아, 빨간 표지가 선명한 그 시집을 꺼내 들었을 때의 그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라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김지하의 시 한 편을 온전히 읽은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이런저런 평론에서 토막으로 인용된 시 몇 줄을 겨우 훔쳐 읽곤 했을 뿐이었다. 김지하는 말 그대로 지하의 인물, 밝은 대낮 햇볕 속에서 공공연히 거론해서는 안 되는 금기 그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