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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양키들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3. 11:09



 

양키 물건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주인아줌마는 뭔가 달랐다. 시장통 딴 아줌마들은 한결같이 옆으로 퍼진 체형이었으나, 그 아줌마만큼은 시쳇말로 ‘몸짱’에 가까웠다. 얼굴도 반지르르 마치 밀감처럼 윤이 났는데, 아마 양키 화장품 덕분이었을 터. 하지만 그 아줌마를 본 따 양키 화장품을 사 바른 우리 엄마, 이모, 숙모들은 도무지 ‘때깔’이 나지 않았다. 양키 물건은 ‘동동 구리무’와 달리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아줌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교양이었다.


“어머, 너희들 왔니?”
야들야들한 그 목소리. 마른버짐에 기계충에 국수 같은 때에 이에 서캐에 누런 콧물에, 내가 내 얼굴을 봐도 한심한 그런 놈들을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되는 양 맞이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먹게 된 최초의 양식, 그게 오무라이스였나? 하지만 불행하게도 삼백육십오일 쉰 김치와 된장국에 길들여진 목구멍은 그 맛나게 생긴 오무라이스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까운 마음에 억지로 챙겨먹다가 그만 지극히 교양 없는 토악질을 해대고 말았던 것.


그런 것들이 양키에 대한 우리의 의식 수준이었다.


낯설음, 미끌미끌함, 다름, 교양 그리고 오무라이스! 훗날 교과서에서는 그런 인상들을 통틀어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양키에 대한 우리의 의식 수준

양키는 존 웨인을 통해 야만적인 인디언들을 가차 없이 처단했고, 아무 데나 오줌을 누지 않고 아무 데나 코를 풀지 않고 두 사람만 모여도 줄을 서고…… 그랬다. 우리는 갓난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무식하고 교양 없고 더러웠지만, 양키는 ABC 초콜릿처럼 부드럽고 달콤한가 하면, 그와 동시에 아무리 짓찧어도 부러지지 않는 연필심처럼 튼튼하기도 했다. 아아, 우리가 쓰는 타이어표 지우개는 조금만 힘을 주면 공책 종이를 여지없이 찢어놓고 마는데, 양키시장표 지우개는 어찌 그토록 말랑말랑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잘 지우는지!
양키에 대한 그런 의식은 다 커서, 우리의 한심한 정치체제에 대해 울화통이 터져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가 잡혀 들어간 감방까지 따라왔다.


1979년 10월 어느 날. 나는 양지바른 담벼락에 붙어선 채 동료들과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한 이란 학생들의 행동을 적극 지지했다. 나는 반대했다. 팔레비의 지독한 독재정치를 반대하는 데에는 당연히 찬성이지만, 미국 대사관의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을 볼모로 잡는 건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목적이 좋아도 그건 나쁜 방법이야.”
동료들은 그렇게 말하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치 와서는 안 될 데를 온 놈처럼.


그로부터 불과 한두 해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어느새 그 시절의 나처럼 말하는 후배를 점잖게 타이르는 선배가 되어 있었다.
“미국이 네 생각처럼 그런 나라일 것 같아? 그 민주주의의 실체를 똑바로 봐야 해.”
아마 나는 저 유명한 반미 교과서 『들어라 양키들아』를 후배에게 권했을 것이다.


C.W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처럼 자극적인 책 제목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 책에 대한 독후감은 더욱 자극적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어렵사리 그 책을 다시 구해 읽기 전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독후감은 하바나의 밤거리를 누비는 창녀들과 마약과 뚜쟁이들이 거의 전부였다. 어찌 보면 책을 잘못 읽었지 싶기도 했지만, 천만에, 다시 책을 읽고 났을 때, 나는 내 독후감이 정확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밀즈는 그런 하바나의 풍경을 먼저 보여줌으로써 쿠바 혁명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끌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즐거운 관광도시 하바나, 과거에는 하바나는 추악한 죄악의 고장이었다. 우리들 쿠바인은 일종의 가톨릭 신자이므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바나에서는 죄악은 소수자에게 막대한 돈벌이를 시켜 주는 짓이었고, 그것은 방금 보이오(bohios: 오막살이)에서 끌려나온 열두 살, 열네 살짜리 소녀들에게는 더러운 매춘 행위를 시키는 것이었다. 푸라도에서 또는 ‘유덕한 거리’라고 불리는 좁은 거리에서 그 소녀 매음부와 펨프(매춘 소개자)들이 당신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티스타와 그 추종자들은 그 소녀들의 육체를 팔아 기생했다…… 독재가 쓰러지기 2년 전, 하바나에는 270개 이상의 사창굴이 번창하였고, 시간제로 방을 빌려주는 여관과 모텔은 얼마든지 있었다. 메세라스(meseras), 즉 접대부가 우글거리는 빠가 700개 이상이었는데, 메세라스는 매음의 첫 단계였다. 빠마다 약 열두 명의 메세라스가 있었고 그들은 빠에서 하루 2.25달러를 벌고 있었다. 주구와 정부의 앞잡이들은 하루에도 52달러를 거기에서 뜯어냈다.

이런 장면들이야말로 밀즈가 쿠바 혁명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 그 ‘혁명을 육성시킨 역사’ 자체였다.

 

혁명을 육성시킨 역사

밀즈는 지극히 자극적인 방식으로, 따라서 지극히 학자답지 않은(?) 방식으로 혁명 전 쿠바, 바티스타 독재 하의 쿠바가 철저히 미국을 위해 존재한 하나의 거대한 시궁창이었음을 밝혀낸다.


우리 전 국민이 1년 동안 꼬박 일해서 버는 돈의 전액은 당신들이 1년 동안 립스틱을 위해서 쓰는 액수도 못 된다.
양키들아! 빈곤이란 몹쓸 것이다. 너희들이 그걸 모른다면, 말하지만 빈곤이란 것은 비참한 것이다. 빈곤은 아직 채 죽지 않은 죽음의 길이다. 빈곤이란 곧 신을 구두가 없는 것을 뜻하고 맨발로 걸어 다니는 어린애들 뱃속에 있는 살찐 기생충을 말한다.

물론 혁명을 성공시킨 쿠바인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쿠바는 없다는 걸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는 지나갔다. 양키들아, 제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하라. 우리는 선을 긋고 그 선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법률을 만들었으며, 우리는 이 손에 총을 들고 법률을 끝까지 사수한다는 것을. 우리의 자매들은 이제부터는 양키에게 몸을 팔지 않으리라는 것을.

 

『들어라 양키들아』는 미국에서도 비판적인 사회학자로 유명한 C.W. 밀즈의 대표작이다. 그는 당시 미국 사회학계를 지배했던 계량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연구 방식에 대해 그것은 결국 “사상적인 빈혈” 상태를 초래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따라서 그는 사회학 방법론으로서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현실과 역사에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다가설 것을 주장했다.

 

사회학 방법론으로서 상상력 강조


현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미국 사회의 지배 계급의 구조와 실상을 해부한 『파워 엘리트』를 비롯해서 『화이트칼라』 『사회학적 상상력』 등의 명저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청바지에 오토바이를 타고 강의를 하러 다녔다는 밀즈의 그 치열한 반항 정신이 오늘의 미국에도 이어졌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미국인의 양심의 시험장’이 된 이라크를 보고 있을까. 꿈 많던 시골 처녀 린디 잉글랜드 일병이 ‘마녀’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야 하는 모습은 더더욱!

 

부기 : 『당대비평』의 문부식 시인이 조선일보 기고를 위해 쿠바를 다녀왔다. 그도 당연히 첫머리에 『들어라 양키들아』를 인용했다. 지금 하바나에는 창녀가 많은 모양이다. 쿠바가 ‘관광 사회주의’라는 말도 했다. 문 시인의 회의와 의구심은 이해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카스트로 혁명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논거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무수히 많은 조건과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의도된 자기 틀 속에서 현실과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내가 아는 문 시인의 스타일은 아니다. 쿠바에 관한 한, 가 보지 않았지만, 가 보지 않아도, 아직 더 큰 문제는, 밀즈가 말했듯이, 쿠바가 아니라 미국이다. 그게 20세기와 20세기를 관통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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