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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영화로 세상을 바꾸는 힘 청년정신, 김조광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0. 02:59

  그의 별명은 ‘피터팬’이다. 어른이 돼서도 아이의 꿈을 잃지 않는 피터팬처럼 그는 마흔이 넘어서도 스물의 꿈을 잃지 않았다. 청년필름 김조광수(43) 대표는 그런 사람이다. 영화사 대표라는 ‘브루조아적인’ 직함을 달고 있지만, 직함과 어울리지 않게 운동의 현장에 자주 얼굴을 드러내곤 한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정책위원을 하면서 스크린쿼터폐지 반대 1인시위에 나서는 것도 모자라, 스크린쿼터폐지 반대집회에서 사회를 보고 행진을 할 때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선동’하기도 한다.

그의 운동은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04년에는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영화인선언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파병반대 집회에서 대학후배인 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고,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에 참여했다.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자 다시 ‘야당’으로 변신해 2004년 총선 때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영화인선언을 앞장서 조직했다. 심지어 청년필름의 대표이면서 노조결성을 조장하고, 노조의 민주노총 가입을 배후조종(?)한 전력도 있다. 열악한 영화제작 인력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대표의 배후조종 하에 결성된 청년필름 노조는 한국에서 최초로 결성된 영화사 노조로 남아 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

김조 대표는 “대학 영화운동 단체인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출발한 청년필름은 각자가 잘하는 일에 따라 역할을 나누었을 뿐 아직도 조합의 성격이 강하다.”며 “청년필름의 대표는 다른 영화사 대표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청년필름의 청년들도 장년이 되어가는 마당이다. 여전히 청년의 정신을 지키면서 노조를 후원하고, 사회운동에 동참하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운동권 출신의 ‘어떤’ 인사들 중 영화계에서 부도 얻고 명성도 쌓는 동안 김조광수 대표는 부를 얻지는 못했지만, 양심을 잃지는 않았다.

1990년대 초반 대학가에서 상영운동을 벌였던 장편영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기억하는가. 영화사 청년필름은 <어머니 당신의 아들>에서 출발했다. 당시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만들었던 영화제작소 청년이 청년필름의 전신이다. 전공이 학적부에 찍힌 연극영화 보다는 학적부에 나오지 않는 학생운동에 가까웠던 그는 1993년 학생운동을 정리하면서 영화제작 청년에 합류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제작할 당시 대부분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이 1997년 의기투합해 만든 영화사가 청년필름이다. 그 뿐 아니라 영화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 <남극일기>의 임필성 감독, 김선미 프로듀서 등이 청년필름의 창립멤버였다. 한양대 연극영화과 출신인 김조 대표는 다양한 조직 활동을 경험했다는 이유로 영화사 대표를 맡았다. 그들의 첫 영화는 명필름과 공동 제작해 1999년에 개봉한 전도연, 최민식 주연의 <해피 엔드>였다.

하지만 기혼여성의 혼외정사를 다룬 <해피 엔드>를 보고, 영화운동을 하던 청년필름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김조 대표는 “당시 그런 얘기 많이 들었다.”며 “내 동생도 영화를 보고 의아해했다.”고 돌이켰다. 하지만 <해피 엔드>에는 <어머니 당신의 아들>과는 다른 종류의 비판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는 “세기말에 한국 중산층 가정의 허위의식, 요즘 말로 하면 ‘쌩얼’을 보여주자는 의도였다.”고 말했다. 전도연의 에로연기 때문인지, 중산층 가정의 허위의식을 까발린 덕분인지, <해피 엔드>는 당시로서 상당한 숫자인 서울관객 55만 명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렇게 그들의 시작은 창대했지만, 그들의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와니와 준하>, <질투는 나의 힘>, <귀여워>는 청년필름이 제작한 영화들이다. 세편 모두 평단의 지지를 받았지만, 관객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흥행에서 3진 아웃을 당한 셈이다. 아무리 영화를 상품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그들에게 닥친 시련이 녹록치는 않았다. 한때는 정말로 영화계에서 아웃당할 위기에 몰렸다.

 


  그는 “예컨대 <와니와 준하> 같은 영화에서 우리는 충분히 상업적 고려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만들었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절치부심 흥행을 위해 승부수를 던진 영화가 지난해 개봉한 <분홍신>이었다. 배우 김혜수 씨가 주연한 공포영화 <분홍신>은 100만 관객을 넘기며 나름대로 선전했고, 청년도 오해와 고난을 벗어날 희망이 보였다. 비로소 ‘예술영화 제작소’라는 오해를 벗은 청년필름은 올해 텔레비전 시트콤을 영화로 옮긴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김조 대표는 “이제야 비로소 영화계에서 청년필름을 흥행할 가능성도, 의지도 있는 집단으로 보는 것 같다.”며 웃었다. 이렇게 청년필름이 고전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파병반대운동, 스크린쿼터 지키기 등 각종 운동에 열심이었다. 그에게는 영화 못지않게 운동도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의 기질, 영화판으로 이동하다

그의 피터팬 기질은 학생운동을 오래한 경력에서도 드러난다. 한양대 연극영화과 83학번인 그는 1993년까지 학생운동에 몸담았다. 그 사이에 한양대 인문대 학생회장을 지냈고,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회 위원장을 했으며, 전대협과 한총련 문화국에서 일했다. 1993년 비로소 한총련이 출범한 다음에야 학생운동을 ‘은퇴’했다. 그는 “영화 <여고괴담>에 보면 해마다 졸업앨범에 같은 아이가 등장하는 모습이 무서운 장면으로 나온다.”며 “그 장면을 보면서 내 얘기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무슨 말이냐면, 그도 1989년, 1991년, 1992년 한양대 졸업앨범에 세 번 등장한다.

<여고괴담>의 아이처럼 귀신이어서는 아니고, 올해는 졸업을 하겠지 하면서 졸업사진을 찍었지만 번번이 ‘운동’에 바빠 학점을 못 따 졸업을 못 했던 탓이다. 그는 “학교를 오래 다니니까 어느 철학과 교수님이 나를 보더니 ‘그런데 자네는 박사과정 학생인가’ 묻기도 했다.”며 웃었다. 한총련을 출범시킨 이후 진로를 고민하던 그에게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마수’를 뻗쳤다. 당시 청년이 제작한 영화를 한총련 ‘라인’을 통해 전국에 배급하려면 한총련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오랜 학생운동 경력에 연극영화를 전공한 김조 대표는 누구보다 적임자였던 것이다. 그는 “원래는 졸업하고 전국연합 같은 단체에서 일하려고 했지만, 청년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그의 영화인생은 시작됐다. 그리고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문화운동 출신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한국 영화계는 이 땅에서 대표적인 진보적 집단 중의 하나가 됐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변한다. 오늘날 누구는 과거를 기억하고, 누구는 어제를 지우고 싶어 한다. 그에게 “그들의 초심이 오늘의 영화로도 표현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래도 다양한 한국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느냐. 반미를 드러내는 ‘괴물’에 1천만 관객이 들고, <왕의 남자>처럼 동성애 코드가 들어간 영화도 국민영화가 되고…….”라고 답했다.

늘 1980년대에, 아직도 운동의 일선에서 뛰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그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뜻이 맞는 영화인들과 의기투합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희망이다. 마이클 무어가 <화씨 9·11>을 통해 미국에서 했던 일을, 그가 기획하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한국에서 하고 싶다. 그는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더라도 모두가 웃으며 즐기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내년은 6월항쟁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니까.” 이렇게 그는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는 1980년대를 다룬 극영화를 만들고 싶은 희망도 숙제로 간직하고 있다. 김조 대표는 “예전에 명필름이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드는 것을 보면서 부러웠다.”며 “언젠가는 1980년대를 제대로 다룬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인 심산이 쓴 <사흘 낮, 사흘 밤>을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마음속으로는 벌써 구상도 해봤다. 그는 “영화 외적인 활동으로 표현됐던 정치적 입장을 이제는 영화를 통해서도 표현하고 싶다.”는 희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시계추가 1980년대에 멈춰 있지는 않다. 21세기의 진보를 영화로 표현하는 일에도 자신의 구실을 다한다. 청년필름은 본격 퀴어영화 <후회하지 않아>를 제작하고 11월 16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후회하지 않아>는 한국에서 최초로 커밍아웃한 게이 영화감독인 이송희일 씨가 연출한 디지털 장편영화로, 남성 동성애자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남들이 피해가고 싶어 하는 주제를 피해가지 않고 마주하는 태도에 여전히 청년의 정신은 살아 있다.

 


 

그에게 남은 영화인으로서의 과제

청년필름은 앞으로도 저예산 디지털장편영화 제작을 통해 좀처럼 장편영화 데뷔기회를 잡기 어려운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장편영화 데뷔기회를 제공할 생각이다. 벌써 독립영화 출신의 윤승호 감독이 <전전 여자친구>를 찍고 있고, <마이 제너레이션>으로 데뷔한 노동석 감독은 두 번째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완성했다. 김조 대표는 “사실 독립영화 감독이 찍는 디지털장편영화는 아무리 예산이 적게 들어도 찍는 순간부터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면서도 “하지만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출발한 청년필름은 단편영화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를 돕는 일에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청년정신은 상업적인 이해를 넘어서 독립영화계와 연계를 유지하는 방식에서도 살아있다.

비록 흥행영화사의 대표가 ‘아직’은 아니지만, 그는 영화를 시작한 결심을 후회하지 않는다. 충무로의 피터팬으로 여전히 꿈을 잃지 않은 덕분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청년정신을 잃지 않은 영화인 동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흔을 넘긴 청년은, 아직도 꿈을 꾼다. 영화로 세상을 바꾸는 꿈을, 세상이 영화로 바뀌는 꿈을.

 

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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