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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설의 새로운 전망 찾기, 전성태의 국경을 넘는 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0. 02:06

80년대는 문학의 시대였다. 누가 뭐라 해도 그러했다. 작품의 완성도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출판 역사상 유례없이 많이 팔린 시집들이 등장하고 그 시집이 시낭송 음반으로,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라면 단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전두환 군사독재의 폭압정치 아래에서 철저히 억압된 상상력은 오히려 작가들을 치열한 작가 의식으로 단련시켜 시와 소설과 수필 등 모든 분야에서 수많은 걸작들을 내놓게 했다. 굳이 무수한 작가의 이름과 작품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문학에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80년대가 얼마나 많은 걸작들을 남겨놓은 시대인지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문학보다는 영상 쪽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리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한국 문학은 이전의 진지함과 무거움에서 벗어나 신경숙이나 윤대녕처럼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인간의 삶을 주로 다루는 작품들이 더 주류적인 경향이 되기 시작했다.

80년대 한국 문단에서 민족문학 진영의 참여적 작품들이 좋은 성과를 내며 많은 호응을 받았던데 비해 90년대부터는 완전히 상황이 바뀐 것이다. 노동자와 민중, 해방을 이야기했던 경향은 일시에 밀실과 유랑의 정서로 뒤바뀌었고 80년대 내내 인간과 사회의 진보를 옹호했던 작가들은 말을 바꾸거나 깊은 침묵에 빠져들기도 했다. 어차피 특정한 장르가 계속 주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고 사회의 변화로부터 예술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한국 문학의 변화 역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며 거대 담론이 쇠퇴하고 개개의 욕망에 몰두하게 된 것은 충분히 예상할만한 흐름이었다.
다만 문학을 비롯한 예술의 기본 의의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꾸준히 해나가는데 있다고 보았을 때 90년대 한국 문학은 자신의 역할을 분명하게 다하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다. 굳이 민중이나 혁명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양극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사회, 민중의 정치적 진출이 이루어지는 사회, 다원성에 대한 주목과 공감이 이루어지는 사회에 대한 문학적 대응은 결코 멈춰서는 안되는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90년대의 작가들은 급격하게 팽창하는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정신적 혼란을 묘사
하는데 편중되고 서사가 실종된 작품들을 양산함으로써 한국 문학이 예술의 중심에서 벗어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예술의 중심에서 벗어난 문학
9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작가들 중에서도 몇몇의 작품들은 진지한 성찰의 자세를 기반으로 이제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농촌과 여성의 문제에 천착한다던가,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로 현대 도시인의 삶을 비틀어 보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전작 『매향』에서 농촌의 절박한 삶을 담담하게 묘사해나감으로써 69년생 작가라고 믿기 힘든 필력을 보여주었던 작가 전성태 역시 충분히 주목할 만한 작가이다.
그는 소재의 차별성 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이문구가 구사했던 농밀한 농민의 언어에 육박하는 언어미학을 선보임으로써 평단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가 지난 4월에 내놓은 두 번째 소설집 『국경을 넘는 일』은 이전과 유사한 소재를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보다 더 확장된 소재와 표현 기법을 선보이고 있어 그동안 작가 전성태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확장된 소재와 표현 기법
이전의 작품과 가장 유사한 방식으로 빈농의 삶을 정감 있게 다룬 「소를 줍다」는 주인공 소년이 초등학교 3학년 때 물에 떠내려 온 소를 줍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묘사한 단편으로서 읽는 맛이 쏠쏠하다. 그리고 민중미술가 최병수를 모델로 한 단편 「한국의 그림」과 프로레슬러 김일을 모델로 한 듯한 「퇴역 레슬러」역시 각각의 인물들을 통해 몸으로 작품을 만들어온 작가의 원초성에 주목하게 한다. 개발독재시대의 혼미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애처롭게 묘사함으로써 당시를 효과적으로 복원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집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단편은 「연이 생각」과 「국경을 넘는 일」이다. 90년대 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 연이의 삶을 회상함으로써 아직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는 그 시대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오래 곱씹어 보아야 할 매우 소중한 것이다.
또한 캄보디아와 태국의 국경을 넘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혼란스러워하는 인물을 형상화한 「국경을 넘는 일」 역시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국제적 위상과 지향의 혼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밖에 「존재의 숲」이나 「사형」, 「환희」 등의 글에 도입한 환상과 현실의 교차는 전성태의 두 번째 소설집과 첫 번째 소설집을 구별 짓는 가장 큰 차이이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환상을 쓰겠다는 의식이 강했던 것은 아니고 벽에 부딪친 소설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남미 소설의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대로 남미의 소설들은 마르께스의 소설처럼 환상적 리얼리즘을 사용해 독특한 미학적 성취를 이뤄냈다. 즉 과거 리얼리즘 일변도의 방식에서 벗어나 작가 전성태만의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탐구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연수, 김종광, 박민규, 이기호, 천명관 등 동년배 작가들과 함께 개성 넘치는 문학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작가 전성태가 보다 과감한 시도를 통해 우리 소설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여 이번 여름휴가를 준비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굳이 전성태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맘에 맞는 소설 한, 두 권과 동행한다면 더욱 상쾌한 여름휴가를 보내게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서정민갑

진보적 음악운동단체인 한국민족음악인협회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있다. 공연기획, 음반제작, 음악강좌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아름다운 문화의 시대를 만들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다.
문화와 관련한 자유로운 글쓰기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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