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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 엮을 단결의 핏줄... <꽃다지 2> 본문

문화 속 시대 읽기/노래는 멀리멀리

손에 손 엮을 단결의 핏줄... <꽃다지 2>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7. 26. 15:31

손에 손 엮을 단결의 핏줄... <꽃다지 2>

글 이은진 신나는문화학교 대표/ jini0501@gmail.com




80년대 초반이 광주항쟁의 패배감과 좌절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내적 과제였다면 90년대 초반에는 골리앗 투쟁의 패배와 엄청난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에 주춤해진 노동자 투쟁을 추스르는 것이 또 중요한 과제로 부각됩니다. 이 때 만들어진 노래들은 대부분 자신을 돌아보거나 반성하는 성찰의 정서가 두드러지며, 또한 상처를 위로하고 서로에게 힘을 주려는 의도가 강한 노래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꽃다지2>는 노동자들을 다시금 북돋으며 힘을 주는 그런 노래입니다.

87년 이후 전국적으로 결성된 민주노조들은 지역노조협의회를 결성하기 시작했고, 또 90년 1월 22일 민주노조의 구심체이며 전국조직인 전노협을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전노협이 건설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자본과 정권은 같은 날 기만적 보수대야합을 이루어 민자당을 출범시킵니다. 이로써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립전선이 형성되고 자본 측의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공세가 더욱 거세지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90년에 들어서면서 상승세를 거듭하던 민주노조운동은 주춤하기 시작하고, 또 상대적으로 위축되게 됩니다. 90년, 128일간의 끈질긴 투쟁에도 불구하고 육, 해, 공 상륙작전을 방불케 하는 폭력적 진압과 지역 내 연대 및 지지 투쟁의 저조로 인해 결국 실패로 끝난 현대중공업 노조 골리앗 투쟁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 패배의 충격과 좌절로부터 회복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뒤를 이어 91년 시위 진압도충 과잉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강경대 열사로부터 시작된 열사 정국과 엄청난 회유, 탄압 속에서도 끝끝내 전노협을 사수하다가 숨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열사. 이렇게 노동운동은 공권력 투입과 대량 구속, 자본의 철수, 공장 이전, 생산 감축과 감원으로 노조가 현저하게 약화되는 상황이었고,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기를 겪게 됩니다. 또한 아시다시피 이런 상황은 한국 내의 현실에만 원인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 시기 동구권의 몰락으로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하는 운동진영 전체의 공허함과 혼란스러움이 깔려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겁니다. 지표를 잃었다고 할까? 사람들은 넘실거리는데 뭔가 상징이 될 깃발이 없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상대적인 침체기였을 뿐 노동자들의 투쟁 양상은 이러한 탄압이 거셀수록 더 격렬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서울노동자문화예술단체협의회(이하 서노문협)를 주축으로 하여 노래판굿 ‘꽃다지’와 ‘해방맞이’ 등 노동운동의 주요한 이슈를 주제로 집체극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순회하는 문화집회가 해마다 몇 차례씩 열리곤 했습니다. 강경대 열사가 사망하던 날도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해방맞이’ 라는 연합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89, 90년의 연합공연들이 성공하면서 메이데이를 앞두고 노동운동의 이슈를 선전선동하는 연합문선공연 혹은 문화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공연 중에 강경대열사의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공연이 끝나고 바로 가투에 나갔고 며칠간 계속된 장례투쟁으로 거리에서 트럭 위에서 최루탄에 범벅이 된 채 문선활동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박창수 열사 장례투쟁 때는 시신을 탈취하려는 공권력에 맞서 모두 밤샘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영안실 벽을 부수고 들어와 시신을 탈취해 간 공권력에 분노하며 안양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들을 보면 여전히 역사의 주인으로 우뚝 선 노동자대중들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계속되는 탄압과 지쳐가는 투쟁 속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조직을 추스를 필요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노동가요의 흐름으로 보면 91년 상반기부터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해 전국을 휩쓰는 인기곡이 사라지고, 행진곡, 특히 전술적 행진곡의 퇴조가 뚜렷해집니다. 일상가요 역시 별로 재미가 없어지는 당혹스런 현상이 벌어졌고요. 이는 아마도 대중운동의 정체 내지는 침체가 계속되어 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단결, 투쟁, 총파업 등의 주장을 담은 선 굵은 투쟁가는 별로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가볍고 즐거운 낙관적 일상가요를 부르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겠지요. 이러한 91년 상반기의 당혹감을 극복하고자 노동가요의 창작자들은 하반기부터 노래의 내용과 정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생산하게 됩니다.

계속되는 절망과 좌절, 그로인한 슬픔을 위로하고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삶, 지난 2, 3년 동안 투쟁을 되새겨보면서 좀 더 성숙하게 어려운 시기를 버텨나가는 의지를 가진 노동자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김호철의 <희망의 노래>가 그러하고, 김성민의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박창수 열사 추모가이기도 한 조민하의 <다시 한 번 투사가 되어>, 유인혁의 <사람이 태어나>등이 그러한 고민들 속에서 의도적으로 창작된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큰 호응을 얻기 시작했고, 이전 노래들에 비해 집단성 보다는 개인의 느낌이 부각되었습니다. 특히나 개인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와 더 섬세해진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한 노래 경향은 일정 기간 계속되어 <민들레처럼>,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편지 3>, <내일엔 내일의 태양이>등이 그러한 경향을 이어간 노래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들으실 <꽃다지 2>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져 노동자노래단 4집 [민중연대 전성으로]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로,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보듬으며, 힘을 주는 그런 조금은 비장한 노래입니다.

이 시기 노동자노래단은 작곡가 윤민석의 합류로 기존의 김호철의 느낌과는 다른 음악작업을 포괄하고, 음반으로 발매하게 되는데, 윤민석뿐 아니라 당시 노동자노래단 멤버였던 김성민도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윤민석은 학생운동 세력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작곡가였는데, 자신의 음악활동 중심을 학생 대중에서 노동자 대중으로 넓혀가기 시작했고, 이 시기 곡들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섬세하고도 강렬한 가사를 음미하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노래듣기 >>

* 음원출처 : 노동자노래단 4집 [민중연대 전선으로]

<꽃다지2>

                                                       최준 글/ 윤민석 곡

쓰라린 기억을 지우며 가자 창살 밖 그리운 하늘을 보면
다시 서는 사람들 눈에 보이고 투쟁의 그 모습 선연하여라
부끄런 기억을 곱씹어가자 쓰러져 잠든 가슴 모두 일으켜
녹슨 철문 부수고 기쁘게 맞을 동지의 그 모습 선연하여라
차가운 창살 안에 내 비록 갇혔어도
내 온몸의 핏줄을 주마 붉은 핏줄 너에게 주마
아- 거대하게 넘실거리는 민중연대 전선에서
손에 손 엮을 단결의 핏줄 너에게 주마

차가운 창살 안에 내 비록 갇혔어도
내 온몸의 기름을 주마 적을 태울 기름을 주마
아- 투쟁으로 끝내 승리할 노동해방 전선에서
굳게 움켜 쥘 꽃병의 기름 너에게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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