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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터를 향한 간절한 외침 <돌아가리라> 본문

문화 속 시대 읽기/노래는 멀리멀리

내 일터를 향한 간절한 외침 <돌아가리라>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0. 26. 11:40

내 일터를 향한 간절한 외침 <돌아가리라>

글 이은진/ jini0501@gmail.com



민중문화운동은 1960년대 말에 시작한 마당극과 탈춤 부흥운동으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연희방식과 우리 소리에 대한 발굴과 복원, 이를 통한 새로운 창작까지 전문적으로 고민을 했습니다.

민요연구회는 1984년에 창립되는데 조직 형식은 회원 단체였지만, 아마추어 중심의 대중조직이 아니라 전문적인 활동을 하면서 민요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중심이었습니다. 주요 활동은 매월 진행하던 민요의 날 행사와 회보 발간, 테이프 제작 사업과 다양한 소모임 활동입니다. 다양한 소모임 중에는 전교조가 생기기 전에 <민중교육>이라는 무크지를 중심으로 교육문화운동을 하려는 교사들이 많이 결합된 소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중고등학교의 음악 문화를 바꿔보려는 시도도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단순히 문화운동단체라기 보다는 산악모임, 그리고 주 1회의 교사모임, 학생모임 등 특성화된 소모임을 통해 조직화하고 토론하는 노동운동 내 부문운동으로 민요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것으로도 보입니다. 또한 국악계의 보수성을 무너뜨리고 시대에 맞는 음악문화를 만들어가고자 진보적인 국악인들을 규합하는 데도 힘을 쏟았습니다.

그 당시 민요는 기생들이 부르는 노래로 일제에 의해서 왜곡되고, 요정에서 부르는 노래로 인식되어 왔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노동요나 민중 삶의 애환, 여러 가지 진솔한 노래들을 다듬어서 원형 그대로 부흥시키고자 했습니다. 이 부분이 민요부흥운동의 가장 핵심이었고, 다시금 발굴되어 정리된 노래들과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창작한 민요들, 그리고 노래가사를 바꾸는 작업들을 병행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회보에 싣고 민요의 날 공연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민요의 날은 단순한 공연만이 아니라 노래 배우기와 공연 끝부분에는 같이 어울려 대동놀이를 하는 흐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전문적인 기량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소위 정통이라고 하는 문화재급 라인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별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열린 구조로 판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지요.

민요연구회는 1984년 6월에 창립되어 그 해에만 5번의 민요의 날 행사를 진행했고 민요보급용 테이프도 많이 제작했습니다. 민요연구회는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90년대 중반에 해산을 합니다. 안양에서도 1980년대 후반 민요연구회가 결성되어 활동하다 역시 1990년대 중반 해산을 했고요.

민요연구회는 민요 부흥 운동으로 시작해서 전통 민요의 발굴과 보급, 창작 민요까지 아우르는 활동을 합니다. <둥당에타령>, <액맥이 타령>, <질꼬내기>, <비타령>, <노세소리>, <이어도사나>, <진도아리랑>, <아리랑타령> 같은 전통 민요와 신민요를 발굴, 보급하였고, 그 밖에 동요, 구전가요, 독립군가까지 계승하고자 하였습니다. 창작민요로는 <돌아가리라>(신경림 시, 문홍주 곡),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신경림 시),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양성우 시, 김용수 작곡), <우리 것이다>(신경림 시․김석천 작곡), <비야 비야>(김석천 작사․작곡), <광주천>(박선욱 작시․이정란 작곡)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민중가요가 확산되던 1980년대 중반의 대학 문화 서클들은 단순히 자기 장르에만 국한된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별 교류를 했습니다. 노래공연이지만 마임이나 연극적 요소가 들어가는 노래극 형식이 도입되기도 했고, 일상적으로도 노래패, 탈패, 민요패, 풍물패, 마당극패 등의 구성원들은 모여서 공동체 놀이나 대동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그 중 민요는 제대로 배우려고 하면 아주 어렵지만 멜로디만 간단하게 익히면 자기 음역에 맞게 키를 잡아서 앞소리를 즉흥가사로 바꾸어 돌아가며 부를 수 있는 열린 형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래가사바꿔부르기(노가바)가 유행을 했던 것도 아마 이런 민요운동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민요운동은 기존 노래패에서는 적극적이지 못했던 국악과 민요의 진보적, 민중가요적 계승에 노력을 기울여 커다란 성과를 남겼습니다.

포크를 중심으로 한 노래 동아리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노래운동과는 달리, 풍물운동처럼 마당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중의 자생적인 민중가요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민요는 쉽게 대중화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민중가요가 점점 대중화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민요운동의 세는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노래운동에서는 민요운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수용하지 못했으며, 그 당시 노래풍에 가곡이나 고급음악적인 요소들이 강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오히려 일반 대중보다도 더 민요적, 국악적 감수성이 적은 실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민요운동은 대중성을 위해서 서양음악적, 대중음악적 측면을 받아들이면 노래운동과 다른 독자적 민요운동의 영역이 없어지게 되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리라>인데, 노동자노래단의 2집인 <전노협 진군가>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입니다. 신경림 시에 곡을 붙인 원제목 <돌아가리라>라는 창작 민요에 1980년대 후반 노동자의 이야기로 일부 개사해서 녹음을 했습니다. 민요가 후렴구를 놓고 앞소리의 노래가사를 덧붙여 부를 수 있다는 장점을 살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창작민요 중에서 이 노래를 선택한 건 노동자들의 끝도 보이지 않는 장기 투쟁, 복직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 상황을 공감해 보고자 함입니다. 벌써 스물 네 분의 목숨을 앗아가고, 또 더 이상 희망도 보이지 않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염원을 생각하며 들으면 좋겠습니다.



*음원 출처: 노동자노래단 2집 <전노협 진군가>

노래듣기 >>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리라>
                                                         신경림 작시, 문홍주 곡

작업장으로 돌아가리라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리라
회장님네 똥개들 눈 뒤집고 우릴 찾는다해도
두팔을 들어 어깨를 끼고 열이 아니다 스물이 아니다
노동자 권리 찾으려다 쫓겨난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진달래가 피기 전에 돌아가리라 코스모스 피기 전에 돌아가리라
그 어느 한곳 찾아 목숨 걸건가 이 억센 두 주먹 불끈쥔 채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두 팔을 들어 어깨를 끼고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리라

이 억센 가슴 어디에 쓰랴 고통스런 해고자 생활
뼛속 깊이 스며드는 이 괴로움 이젠 떨쳐야하네
이 억센 다릴 어디에 쓰랴 우린 몸엔 비린 땀내 음
우리네 얼굴은 누런 구릿빛 이글이글 타는 눈동자
이 억센 주먹을 어디에 쓰랴 노동자가 울고 가족이 울고
작업장 밖에선 해고자 울고 원직복직 외치는 피맺힌 절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두 팔을 들어 어깨를 끼고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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