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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 시대 읽기/노래는 멀리멀리

하나되는 땅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9. 27. 10:27

하나되는 땅

글_이은진/ 신나는 문화학교 대표



이번에는 1980년대 노래운동 속에서 이른바 전통음악인과 클래식 전공자들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노래운동과 진보적 클래식 전공자들이 만나기 시작한 것은 노래운동이 처음 시작된 1980년대 중반부터였습니다. 민중가요는 자생적인 노래문화로 1970년대 중반부터 형성이 되었지만 운동의 주체가 조직되면서 본격적인 노래운동이 시작된 것은 1984년 정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70~80년대 민중가요는 기존의 노래들이 집단적인 재해석을 통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형식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곡이나 찬송가 풍 등 고급음악적인 요소를 많이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노래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클래식 전공자들도 이 흐름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창작자로는 서울대 작곡과의 이건용, 이강숙 교수였는데 이들은 기존 음악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추고 있고 또 그러한 문제들이 일종의 사회적 산물임을 인정하는 작곡가, 평론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대학에서 고급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모여 1989년 4월, ‘민족음악연구회(이하 민족음악연구회)’를 결성하였고 후에 강준일, 노동은, 조념 교수도 함께 활동을 했습니다. 주로 우리 음악의 민족적 뿌리를 찾아 새롭게 계승하고자 노력하였고 통일운동에 대한 열정을 담아낸 스케일이 큰 합창곡과 연주곡들도 창작, 발표하였습니다. 특히 <임을 위한 행진곡>을 피아노 이중주로 편곡해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주요 창작곡들로는 <하나되는 땅>(전경숙 글, 곡), <쓰다만 시, 다 쓴 시>(김남주 시, 이민주 곡), <어디 손 한 번 들어보시오>(김남주 시, 윤민석 곡>, <이 땅을 지키리라>(김남주 시, 이명선 곡), <꼿꼿이 선다>(전경숙 곡), <언제 만난다냐>(이기영 시, 이인원 곡), <너희들의 민주주의>(류형선 글, 곡) 등이 있고, 기존에 나왔던 노래이지만 민족 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아는 <녹두꽃>(김지하 시, 조념 곡), 그리고 일제강점기시대 활동했던 민족 음악인으로 월북한 작곡가 김순남의 <산유화>, <해방의 노래>들도 연주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통국악인들도 함께 활동을 하면서 민족음악의 역사와 형식에 대한 연구 작업도 하였고 국악적인 어법으로 기존 곡들을 편곡하여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퓨전의 첫 시도인 셈입니다.




‘민족음악연구회’ 외에도 ‘한국음악극연구소’라는 전문 음악극을 제작, 공연하는 집단이 먼저 결성되어 있었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미 고인이 되신 문호근 선생님은 오페라 연출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분이셨는데 기존의 번역 오페라의 인물이나 정서가 한국적 현실이나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음악극을 창작하고자 했습니다. 대표적인 창작오페라로 <우리들의 사랑>, <구로동 연가>, <가극 금강>, <가극 백두산> 등이 있습니다. 특히 1988년 6월에 발표된 <구로동 연가>는 당시 역사의 주역으로 부각된 노동자의 삶과 현실을 잘 반영한 창작 음악극으로 이 공연을 통해 <구로동 연가>(강준일 글, 곡), <배웅>, <바겐세일>, <시다의 꿈>, <그렇지요>, <미아리>, <당신이었을까>(이상 이건용 곡)등의 노래들이 발표 됩니다. 이 공연은 ‘연우무대’와 공동으로 제작하여 처음에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흘 이상 공연했음에도, 재공연 요청이 쇄도해 연우소극장에서 한 달 간 연장공연을 하기도 했답니다.

‘민족음악연구회’와 ‘음악극연구소’는 연습 공간을 같이 사용했기 때문에 활동에서도 공동 활동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전문음악인 집단이지만, 기성의 음악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작했고 더 나아가 1980년대 후부터 1990년대 초 중반까지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좀 더 실천적인 운동을 하려는 욕구가 강했습니다. 전문성을 이미 갖고 시작했고 또 철학적, 사상적으로도 충분히 진보적인 집단이었지만 이들이 가진 역량을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노동자대중투쟁과 접목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즈음 노동자노래단 2집 테이프 <전노협 진군가> 제작에 합류를 하게 됩니다.

‘민족음악연구회’는 주로 연주를 담당하였고 ‘음악극연구소’의 원창연은 노래로 결합을 하면서 좀 더 현장과 결합된 실천 활동으로 자기 활동의 영역을 넓혀가는 계기가 됩니다. <전노협 진군가>나 <단결투쟁가> 등의 브라스 소리는 ‘민족음악연구회’의 연주로 1집에서 발표된 투쟁가에 비해 음악적으로 훨씬 풍성하면서도 진취적인 정서가 잘 표현된 것도 바로 이들의 역할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민족음악연구회’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이 테이프 제작 작업에 함께 했던 ‘삶의 노래 예울림’과 ‘노동자노래단’의 음악적인 작업에도 꽤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후 발표되는 투쟁가나 노동가요 전반에 많은 부분이 적극적으로 반영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노동자노래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 ‘민족음악연구회’, ‘음악극연구소’는 자주 교류를 했고 또 공연 때 서로 가수나 연주자를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민족음악연구회’에는 서양음악 전공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류형선과 같은 전통음악을 전공한 사람들도 몇 명 있었지만 주축은 서양음악으로 민족음악의 뿌리를 연구하면서 한국의 현재에 맞는 민족음악의 전통을 만들어가려 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전통음악인들의 독자적 조직화는 다른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해오름’, ‘다스름’ 등이 결성되었으니 기성 국악계를 겨냥한 활동이 시작된 셈이지요. 그러나 기층 민중을 대상으로 국악적 감수성의 근저를 넓히면서 국악의 진보적 현대화에 기여한 이전의 ‘민요연구회’나 풍물 운동의 성과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경향이 있어 그 성과를 계승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고급음악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해 당시의 기층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음악적 형식과 그 시대 대중의 정서를 어떻게 그려냈는가에 대한 크고 작은 논쟁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떤 노래들이건 당시 실천적 활동을 하는 음악인들의 고민과 대중들과의 정서적 교감이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민중가요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1990년대 후반에 발표된 노래를 들으면서도 찬송가 같다고 느끼거나 또는 군가 같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과거의 음악들이 지금 시기 대중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들에게는 구태의연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대중음악도 계속 변화해서 일제강점기시대나 1960년대에 불렸던 노래들은 그 시대에는 아주 획기적인 형식이거나 상류층이 즐겨 듣던 고급음악임에도 현재 음악 마니아들에게는 촌스러운 과거의 트롯으로 인식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조금은 딱딱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시대에 창작되고 불린 노래들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는 많은데, 7분에서 10분정도 되는 노래들이 많아서 인터넷을 통해 잠시 들으실 수 있는 노래로 선택한 곡이 <그렇지요>입니다. 편안히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노래듣기 >>


<그렇지요>
                                   하종오 글, 이건용 곡

1.올 때쯤 이면 오겠지요 그렇지요
생사람으로 아니온다면 죽은 사람으로 오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이 땅에 남는 길은 이 땅에 남는 길은 삶과 죽음 삶과 죽음
삶과 죽음 한꺼번에 삶과 죽음 한꺼번에 있으니
살아있으면 오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2.올 때쯤이면 오겠지요 그렇지요
생사람으로 아니온다면 죽은 사람으로 오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죽어도 이 땅에만 죽어도 이 땅에만 묻힌다면 묻힌다면
무덤으로 이산 저산 무덤으로 이산 저산 바라보며
서로 만나 보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3.올 때쯤이면 오겠지요 그렇지요
생사람으로 아니온다면 죽은 사람으로 오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더구나 살아가고 더구나 살아가고 있다면야 있다면야
있어야 할 저 사연 있어야 할 저 사연
가슴으로 남을 날이 오겠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음원출처 : 1990, 민족음악연구회 [백두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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