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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구 민주주의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25. 16:22
 
 

19세기 서구 민주주의의 위상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민주주의는 서구를 제외한 다른 많은 지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졌다 하더라도 막 소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서구에서도 민주주의가 제도적·이념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시 서구 민주주의는 힘들게 진행되고 있었다. 비록‘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는 오래된 것이었지만 서구에서 출현했던 민주주의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19세기 서구 민주주의에 대해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주도하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이 대단히 불완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부르주아가 아닌 노동 계급을 포함한 빈민 대중이 힘들게 성취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대체로 19세기 민주주의는 정치·이념 측면에서는 혁명적이었지만 역사적인 결과로서는 여전히 불완전한 제도였다.
이는 현재 민주주의의 현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정치체제는 일부 신정국가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많은 곳에서 위협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민주주의가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오늘날조차도 현실이 이러하다면 그것의 보편성을 의심받았던 19세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민주주의가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받았던 시기는 최근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민주주의는 무지한 인민의 정치로 간주되었다. 19세기 유럽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혐오, 억압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현대 세계는 인류 역사에서 오히려 예외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역사가 짧다고 그것의 정당성이 훼손되지는 않겠지만 전체적인 역사를 고려해 볼 때, 민주주의는 불안정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를 염려하기에 앞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현대 세계에서 보편성을 획득했을까를 질문해야만 한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19세기의 민주주의는 늘 불안정한 체제로 존재했다. 그것은 19세기 지배 이념이었던 자유주의가 인민의 정치적 진출이라는 불가피한 상황에 적응하는 불안정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서구 민주주의의 이론적 과제들
 

19세기 서구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은 누가 인민인가, 인민의 지배는 정당 한가에 대한 문제였다. 프랑스 혁명은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기하였다. 프랑스 혁명기에 민주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이 인민이라고 선언하면서 인민 주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화주의자인 로베스피에르나 초기 사회주의자인 바뵈프 등도 자신들의 이념이 민주주의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 평등한 주권자들의 사회로 간주했고 또 인민 입법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소유권의 철폐가 아니라 소유권의 평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러한 요구는 사적 재산권과 특권으로 무장한 지배 세력들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특히 자코뱅의 독재가 구체제의 특권에 이어 부르주아 특권 폐지를 요구했을 때 부르주아들은 반동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부르주아들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대중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고 인정했다. 그리하여 대중의 정치적 진출과 사적 소유권 확보 사이에서 그들은 정치적 타협과 타협 방식의 제도화, 즉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모색하였다.

 
민주주의의 제도화
 
그 과정은 첫째 참정권의 확대 요구를 점차 수용하는 것이었고 둘째 인민 주권의 행사를 통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정으로 규정했고 그렇게 제도화시킨 것이다. 대중의 정치적 진출을 허용하면서 그것의급진화를방지하기위한기제로서선거권의부분적인확장과대의제가도입되었다.
그러한 과정 자체는 지배계급의 탄압 속에서 노동계급과 빈민들의 끊임없는 투쟁과 희생을 통해 겨우 달성되었다. 19세기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프랑스의 여러 혁명들은 그러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 부르주아들은 재산권, 교육 정도에 따라 참정권을 제한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몇 차례에 걸친 참정권 투쟁을 거친 19세기 후반에서야 겨우 남성 보통선거가 도입되었고 프랑스는 몇 차례에 걸친 혁명과 반혁명을 통해 달성할 수 있었다. 미국은 내전을 통해 남성 보통선거를 달성했지만 인종차별주의는 20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인 짐으로 남아 있었다.
다른 한편, 19세기 유럽의 산업화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숫자가 확대되었고 이들의 정치적 투쟁은 민주주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대중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권이 1863년 이후 독일에서 전개되었다. 보통선거쟁취를 중시한 라살의 급진 민주주의노선과 사회주의를 강조하면서 마르크스를 추종하는 리프크네히트와 베벨의 노선이 합해져 1875년에 강력한 독일 사회민주당이 만들어졌다.
1850년대 유럽의 민주주의 성적표는 매우 초라했다. 어느 나라도 남성 보통선거제도가 도입되지 않았다. 영국, 북유럽, 네덜란드 등에서는 간접선거로 대의제 의회가 구성되었지만 엄격한 연령 제한, 재산 자격의 기준으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다. 게다가 임명이나 세습으로 구성된 상원이 대의제 의회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영국은 인구 2천 7백만 명에 선거 유권자 수는 1백만 명 정도였고
 
 
벨기에는 인구 470만 명에 유권자수는 6만 정도였다. 대의제는 존재했지만 민주주의 제도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1860년대에 들어서 대중의 압력이 높아지자 보통선거권이 점차 확대되었다. 그러나 영국만 해도 2차 선거법 개정 결과 유권자 수가 두 배가 되었지만 그 조차도 전 인구 8%에 지나지 않았으며 통일 이탈리아는 1%에 불과했다. 남성 보통선거권은 오스트리아에서는 1907년, 이탈리아에서는 1913년, 영국에서는 1918년에 확립되었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20세기 초반 서구 사회의 민주화의 정도는 대단히 낮았다.
여성 참정권도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1893년 영국 식민지였던 뉴질랜드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1890년대 미국 와이오밍에서 여성의 선거권이 인정되었고 핀란드와 노르웨이에서는 1905년과 1913년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1907년 영국에서는 여성 사회정치동맹 지도자들이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영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은 1928년에 인정되었다.
 
보수화와 민주주의의 제도화
 
대중의 정치적 진출이 불가피해지면서 한편으로는 참정권의 확산을 제도화하고 다른 한편으 로는 노동자들의 급진화를 방지하기 위해 일련의 사회 개혁조치들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매우 늦게 비사회주의적인 노동자 정당이 출현했다. 마르크스조차도 사회주의 혁명의 긴급성에 부정적이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체제를 지탱하는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노동운동은 혁명이 아니라 산업화된 세계에서 뿌리를 내리고 권력 쟁취를 위한 대중 운동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인민들의 정치적 진출, 참정권의 확대가 불가피해지면서 부르주아의 관심은 참정권 행사를 통제할 수 있는 제도화와 정치공학에 몰두했다. 대의제가 그 가운데 하나였다. 독일제국은 최초로 남성 보통선거제를 도입했지만 그렇게 구성된 제국의회는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또 형식적인 선거를 조작하기 위한 게리맨더링, 대의에 의해 구성된 의회에 대해 귀족특권으로 구성된 상원의 견제도 존재했다.
부르주아의 경우 숫자상 이점이 없었던 까닭에 빈곤계층에 대한 헤게모니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소수인 부르주아의 헤게모니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가 경제발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차이에도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경제발전이라는 현실적 과제 앞에서는 모두 자유주의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1870년대 이후 유럽은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1871년 프랑스는 보통선거로 구성된 의회 승인에 의해 꼬뮌을 붕괴시키고 보통선거로 독일 제국의회가 구성되었다. 유럽의 군주와 귀족 그리고 대 부르주아에게 보통 선거권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영국에서 보수파들은 자유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참정권 확대를 추진했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추진했다는 것은 사실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19세기 후반 모스카, 미헬스 등은 인민에 의한 통치라는 엄격한 전통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란 불가능하며 모든 통치는 엘리트 혹은 경쟁하는 엘리트들 가운데 하나에 의한 통치라고 규정하였다. 슘페터는 민주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입법적이고 행정적인 결정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규정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절차적으로 축소시켰다. 나아가 그는 민주주의는 절차의 제도화라고 주장하고 그 절차는 대표자 선출을 위한 경쟁적 절차라고 정의하여 대의제를 옹호하였다.
아울러 당시 성장하고 있었던 대중정당이나 대중운동에서도 비민주성이 드러났다. 대중을 대표하고 대중을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까닭에, 조직이 대중들을 대표하여 조직을 지배하는 일은 매우 쉬웠다. 조직화된 대중운동 자체가 대의됨으로써 조직은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고 대중들은 조직으로부터 소외되었다. 대중적인 정당 조직에서 민주주의의 결여는 정치체제 자체에서 민주주의 결여로 연결되었다.
19세기 말에 나타났던 주요한 정치적 변화란 과거 소수가 독점하던 구체제의 위상을 국가권력의 제도화된 정당 운동의 복합체가 대신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한편으로 사회 개혁과 복지 프로그램 채택을 통해 대중적인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정당들의 불만을 완화시키는 정책을 구사했고, 다른 한편으로 제국주의를 활용했다. 제국주의는 그 자체가 사회개혁에 대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잉여를 창출하였고 더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주요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제 1차 세계대전 직전, 혁명세력들은 민주주의가 사회혁명을 저지하는 제도라 규정하고 그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민주주의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제도화되면서, 또 민주주의와 보통선거권이 짝을 이루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말 서구에서 선거권에 입각하여 성립된 입헌 정부의 역사를 가진 나라들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했으며 그 조차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파시즘으로 파탄이 났다.
이처럼 19세기 서구 민주주의 역사에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는 결코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제국 시대에 발전했던 서구 민주주의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까지도 그것의 영구성이나 보편성을 전혀 예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글 김동택 |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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