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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민주화운동

태국, 자유의 나라를 향한 힘겨운 행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1. 7. 15. 10:11

태국 첫 여성 총리 잉락 친나왓이 8월 중순 취임합니다.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서 축출된 탁신 친나왓의 막내 여동생이라는 점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오랫동안 '쿠데타의 나라'였던 태국의 정치 모습을

짚어 보는 글을 소개합니다.

이 글은 사업회 소식지<희망세상> 2006년 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태국, 자유의 나라를 향한 힘겨운 행진 - 박은홍   <PDF 다운로드>


군부독재의 다른 이름 ‘태국식 민주주의’

‘자유의 나라’란 뜻의 태국. 그러나 한때 ‘쿠데타의 나라’라고 불렸던 태국.
이 나라에서는 1932년 절대왕정이 입헌왕정으로 대체된 이래 1991년 쿠데타가 있기까지 13개의 헌법, 15번의 총선, 17번의 쿠데타가 있었다. 1946년부터 1981년까지 143개의 정당이 있었으나 단지 소수 정당만이 3년 이상을 버텼다. 의회가 임기를 다 마친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나머지는 쿠데타로 단명했다.
이것이 바로 군사정부가 정당화시킨 ‘태국식 민주주의’의 실체다. 군부는 선거정치가 능력, 책임성, 정직성을 고루 갖춘 정치인의 배출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의회권력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일 수 없다고 강변했다.
이러한 군부의 정치개입은 냉전 시기에 태국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친미적인 반공국가로 만들었다. 이를테면 1965년부터 75년까지 있었던 인도차이나전쟁 기간 동안 태국은 미국의 핵심적인 정치적, 군사적 전진기지였다. 1968년 당시 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4만 8천명에 달했다.
미국은 태국군의 공산반군 진압 프로그램에 군사적, 기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51년부터 71년까지 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 등 투자 총액은 20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렇듯 태국군부가 친미 일변도의 군사·외교정책을 펼치는 가운데 국내적으로도 사회 갈등이 심화되었다. 군사정부에 반대하는 민주세력과 이들을 좌파세력으로 몰아가는 군부의 대립이 그것이다. 특히 1957년 쿠데타로 집권한 싸릿은 반공을 기치로 가혹한 공포정치를 펴기 시작했다. 체제 비판적인 지식인, 학생, 언론인들을 방화범, 마약 밀매자,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또한 공무원사회 내 불순분자의 침투와 선동 행위를 감시한다는 명분 하에 정치국을 설치하고 나아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총력전’ 사상을 펼쳤다.
당시 ‘총력전’은 ‘태국식 민주주의’로 포장된 공포정치로 구체화되었다. 싸릿은 수상의 지위는 물론 육군사령관, 경찰국장관, 국가개발청장관을 겸직하며 절대 권력을 누렸다.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민의 정치 참여를 완전히 봉쇄하였다. 노동법을 폐지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사상 탄압이 가해지면서 투옥, 피신, 망명하는 재야인사들이 늘어났다.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들은 반체제 활동에 가담하다가 객사하거나 사살되었다. 헌법과 의회의 기능도 정지되었다. 새로운 헌법 제정 임무를 맡은 헌법위원회가 국회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민주주의를 전복한 10월 6일 유혈 쿠데타
1973년 중반 경에 접어들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군부 민주화세력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 해 6월 한 대학 신문 사설에서 싸릿의 뒤를 이은 타넘과 쁘라팟을 야수로 표현한 것을 문제 삼아 군사정부가 대학 측에 압력을 넣어 관련 학생들을 퇴학 처분하도록 하였다. 전국대학생총연합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과 대학교수들은 퇴학 조치의 철회와 헌정 회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특히 학생들은 군사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자 분노하였다.
결국 ‘공권력’과 대중매체를 동원한 군사정부의 억압과 통제에도 시위대의 규모가 일파만파로 확대되자 군사정부를 이끌었던 타넘과 쁘라팟은 국왕의 권유에 따라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시민사회의 힘에 의한 민주화의 역사적 전기가 처음 마련되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의 행진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76년 10월 6일 이른 아침, 탐마삿 대학 내에서 망명하였던 군 수뇌 인사의 복귀를 규탄하고 있던 학생들을 향해 총격이 가해졌다. 순식간에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총격 직후에는 우익 폭력배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 무지막지한 테러를 가하였다. 당시 쿠데타의 명분은 ‘탐마삿 대학에 모인 공산주의자들이 왕세자를 모욕하고 국가전복을 기도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국왕은 쿠데타를 승인하였다. 헌법 폐지, 국회 해산, 정당결성 금지 조치가 뒤따랐다. 군은 새로운 헌법을 통해 의회를 임명직 의원만으로 구성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회에 해악을 미치는 분자들’을 재판 없이 6개월 동안 구금할 수 있도록 하였다. 3천명 이상이 체포되고 서적 판매 자체가 금지되었다. 언론기관과 도서관이 폐쇄되고 출판인은 가혹행위를 당했다. 신군부는 204권의 금서 목록을 제시하였다. 대학 도서관들을 수색하고 책을 압수하였으며 10만권 이상의 도서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정치적 모임과 노조 활동도 불법화되었다. 쿠데타 선언문 가운데에는 ‘베트남인들이 국가전복을 교사하였다.’라는 사실무근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대주의적 사회운동의 실패, 최소주의적 사회운동의 성공
태국 역사상 최대의 유혈사태로 기록된 1976년 10월 6일을 계기로 사회운동 조직들은 심대한 물리적 타격을 받았다. 지도부에 속한 활동가들이 태국공산당에 합류하기 위해 속속 입산하였다. 전(前) 전국대학생총연합 의장, 전 마하돈 의과대학 자치위원장, 사회당 위원장, 노동·농민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탐마삿 대학에서의 살육 그리고 그 이후에 진행된 ‘빨갱이사냥’을 피하기 위해 활동가들이 태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삼림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 수는 2천명에서 3천명에 이르렀다. 태국공산당 지하 방송인 ‘인민의 소리’는 군사정권에 대한 무장투쟁을 거듭 역설하였다.
1979년 태국공산당은 1만여 명의 무장요원을 갖게 되었다. 태국공산당이 참여한 ‘민주애국통일전선’도 결성되었다. 이들은 1976년 대학살 이전까지 태국 정치문화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국왕에 대한 비판을 삼가 하던 태도를 바꿔 푸미폰 국왕과 입헌군주제를 ‘구 봉건질서’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공산 무장세력의 공세도 활발해져 정부군과의 무력 충돌 횟수도 급속히 늘어났다.
이렇듯 공산반군의 규모가 확대일로의 양상을 보이자 군부는 유화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양원제를 도입하고 검열제도,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제약했던 많은 법적 조항들을 철폐하였다. 또한 공산반군에 가담한 자들뿐만 아니라 1976년 쿠데타 때 체포된 민주인사들에 대한 사면을 실시하였다.
특히 공산반군 진영으로부터 이탈한 공산주의자들의 전력을 불문에 부친 훈령은 공산반군의 규모를 약화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 말에 와서 사실상 공산반군의 영향력은 전무하게 되었다.



  이렇듯 급진적 사회운동의 영향력이 퇴조하는 가운데 도시 슬럼가 지역의 아동교육과 생활개선 문제, 매춘 문제, 에이즈 문제, 식수 문제, 삼림자원과 환경보호 문제 등을 다루는 시민사회단체들(NGO)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민사회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에는 1976년 쿠데타 직후 삼림으로 들어가 무장투쟁에 가담하였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급진적인 체제변혁보다는 ‘주민 참여형 민주주의와 지속적인 성장’으로 표현되는 작은 수준의 사회변혁을 중시하였다.
1988년 민선 의원을 수상으로 하는 연립정부가 출범함으로써 군 출신 수상의 시대가 가고 민선 수상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민선내각이 부패 문제로 위기에 몰리게 되자 1991년 2월 일단의 군부가 ‘부정부패 척결’을 기치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1992년 4월 친군부 5개 연립여당의 지명과 국왕의 승인을 얻어 쿠데타 주역인 쑤찐다 장군이 수상에 취임하였다. 쿠데타 직후 정치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다던 그가 수상에 취임하자 대중들의 배신감이 고조되었다.
여기에다가 쑤찐다가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구태 인물들까지 내각에 들여놓자 신군부에 대한 분노는 더욱 증폭되었다.

깨끗한 정치인으로 추앙되던 진리의힘당 당수 잠렁이 단식투쟁에 들어가자 군사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대 규모가 확대되었다. 결국 국왕이 중재에 나서 쑤찐다와 잠렁이 한 자리에 만나게 됐고 쑤찐다가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1973년에 뒤이어 또 한번 민주항쟁의 쾌거가 실현된 것이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
1992년 5월 항쟁 이후 시민사회조직들은 새 헌법 제정에 총력을 기울였다. 1996년 11월 의회는 시민사회의 압력을 수용하여 헌법기초위원회 구성안을 통과시켰다. 헌법기초위원회는 각료의 의원 겸직 금지, 부정축재를 감시하는 독립기구의 설치, 민선 상원의 구성, 지방 분권화 추진, 국민의 알 권리 확대, 금권정치의 폐해 제거, 군부의 영향력 축소 등을 골자로 한 헌법초안을 마련하였다. 이 법안에 대해 보수 성향의 각료들과 의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획책’, ‘왕권에 대한 도전’ 등과 같은 이념 공세를 불사하면서 헌법 초안을 대폭 수정하라고 압박하였다. 지방 분권화 조치로 인해 권한 축소가 불가피해질 것을 의식한 내무장관 역시 이 초안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민중조직, 시민사회단체들은 헌법 개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마침내 1997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투명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비등해지던 시점에서 상·하 양원의 압도적 지지 속에서 새 헌법이 통과되었다.
새 헌법 제정을 계기로 부정축재에 대한 조사 발의, 수상과 정부 고위관료에 대한 파면 요구, 독립적인 선거감시 기구 설치, 상원 구성의 민선화 등이 이루어졌다.





  새 헌법은 잘못된 행정 절차에 대해 국민이 직접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옴부즈만에 해당하는 인권위원회, 행정법원, 헌법재판소를 신설토록 하였다. 또한 매표 행위를 근절하기 위한 선거감시위원회의 설치도 명문화하였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공직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공개해야 하는데 실제로 추언 전 총리의 측근이 거짓 재산신고를 하였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새 헌법에 근거해서 국가인권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반공법도 폐지되었다.
새 헌법은 전례없이 강력한 정부가 출범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새 헌법이 통과되고 처음 치룬 선거를 통해 역대 가장 강력한 민선 내각이 출범하였다. 1997년 경제위기의 파장 속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긴축정책 요구에 굴복한 추언 민주당 정권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간파한 탁신의 태국사랑당은 농촌개발기금 지원, 기초의료 보장 확충 등 농촌과 도시서민을 향한 사회 개발, 복지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중 영합적 정치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여기에다가 전례없는 의석 점유율로 역대 민선정부의 결함이던 ‘지도력 부재’ 문제를 극복하고 과거 민주화운동 세대 출신의 인사들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국가 권력의 무늬를 ‘민주적’으로 덧칠하였다.

이렇듯 막강한 정치적 지지를 조직해내는데 성공한 통신재벌 출신의 탁신 수상은 분권화와 다원성을 명문화한 새 헌법을 무시하기 시작하였다.
탁신의 최고경영자(CE0)형 국가 경영 방식은 의회는 물론이고 새 헌법에 따라 탄생한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반부패위원회의 자율성을 침해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언론을 통제하고 비판적 지식인 집단과 시민사회단체를 비난하고 나섰다. 특히 최대 소수종족인 말레이무슬림 사회의 소외문제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그나마 있던 의사소통 구조를 제거하였다. 그 결과 태국 남부 무슬림사회에서 간헐적으로 발생하였던 소규모의 테러와 방화는 극한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는 비 사법적 처형을 남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새 헌법 하에서 인권상황의 악화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일각에서는 탁신의 단호함, 공격성을 과거 개발독재자 싸릿의 통치 행태에 비유한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이 탁신은 군 출신이 아닌 재벌 총수 출신이다. 그는 고위 경찰직에 있으면서 사업에 손을 대 신흥 기업인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경찰직에서 나온 그는 본격적으로 통신사업에 뛰어들어 친나왓 그룹을 급성장시켰다. 1994년에는 잠렁의 진리의힘당에 가세하여 정치 입문에 성공하였다.



  1998년 경제위기 직후에는 IMF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간파하고 태국사랑당을 창당하였다. 탁신 진영은 2001년 1월 선거운동 과정에서 인구의 절반가량이 아직 농촌인구인 것을 의식하여 농가부채 상환유예를 비롯해서 모든 면단위에 ‘1촌 1특산품 운동’을 후원하는 농촌개발기금 책정을 약속하였다. 또한 30바트(한화 약 1,200원)로 기초의료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공약하였다.
그의 이러한 대중 영합적인 선거운동은 일부 사회운동 지도자들의 지지까지 이끌어냈다. 결국 그의 이러한 정책공약은 유권자들에게 그대로 먹혀 500개 의석 중 248개 의석을 차지하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2005년 2월 총선에서는 377석을 얻어 제 2정당인 민주당을 완전히 따돌렸다.
이러한 승승장구 속에서 탁신은 자신이나 집권 태국사랑당에 대한 모든 비판을 국가에 대한 도전으로, 국제사회로부터의 비판은 ‘주권 침해’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의 시민사회 길들이기는 언론 사주를 대표하는 손디와의 대결국면으로 발전하였다.
태국 민주주의가 자본가에 포획되었다고 보는 것은 속단일 수 있다. 민주화를 이끌어낸 시민사회의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태국은 CEO형 정치 지도자임을 자임하는 재벌 총수 출신의 정치 지도자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어떻게 위기로 몰아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자료사진
『Labour Against Dictatorship』 (Somsak Kosaisuk, Friedrich Ebert Stiftung), 『The Politics of despotic paternalism, 『タイ 開發と民主主義』 (岩波新書)



<박은홍>
성공회대 아시아 NGO정보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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