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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도시국가와 공화주의전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11. 17:32
도시국가 형성과 꼬무네(Comune)의 의미
고대 도시들은 로마 시대에 발달한 도로와 건축 기술 등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발달해왔다. 그러나 고대 도시들과 달리 중세 도시의 전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꼬무네(Comune)는 기존 도시들과는 정치/사회적으로 다른 조건에서 출발하였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제국의 헤게모니를 물려받은 것은 교회였다.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교회와 수도원 등은 중세도시를 재건할 수 있는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꼬무네라고 하는 중세 자치도시는 이렇게 출발했다. 로마제국의 중앙집권적 권력을 대신하여 교회와 도시 주민들의 자치 권력이 형성되면서 보다 독립적이고 지역적 특색을 갖춘 도시의 번영이 시작되었다. 특히 1096년부터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이탈리아의 많은 지방 도시들에게 새로운 발전 동력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의 도시들은 농업 환경이 나빴기 때문에 농업보다는 무역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십자군 원정으로 주어진 동방과의 무역 독점권은 도시 자체의 상공업 성장을 뛰어 넘어 주변 지역에까지 파급될 만큼 위력이 큰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렇게중세 자치도시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가장 먼저 새로운 지방 권력의 등장이다. 두 번째는 새로이 성장한 도시 상공업 계층의 등장이다. 흔히 부르주아라고 하는 계층으로 무역과 수공업 등에서 경제적 부를축적한 이들로, 근대 시기에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했던계층이다. 세 번째는 농촌 경제가 붕괴하면서 농촌의 인구와 경제적 투자 여력이 소비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도시의 역할과 기능이 신장되면서 도시가 근대로 가는 공간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었다.
또한 결과론적이긴 해도정치 제도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이념과 원칙의 등장 역시 중세 자치도시들이 보다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꼬무네와 도시 발달은 주로 중북부에 집중하게 되었다.중앙권력으로부터의 이탈과 완화는 중북부의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권력의 성장을 가시적으로 가능하게 하였다. 12~13세기경에는 이러한 도시 공동체의 성장을 바탕으로 꼬무네가 주변 농촌 지역까지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번성하던 꼬무네가 제도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2세기와 14세기 초 사이였지만 동시에 꼬무네의 위기가 시작된 것도 바로 그러한 제도적 정비가 끝나자 마자였다. 독일 황제 프레드릭 1세는 꼬무네의 여러 권리들을 제국의전통적 권리로 귀속시키려고 했다.
꼬무네에 귀속되었던조세 징세권, 주화 제조권, 재판관들의 임명권 등의 권리를 제국의 고유 권리로 돌려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프레드릭 1세는 롬바르디아 동맹으로 결합된 이탈리아 꼬무네들과의 레냐노(Legnano) 전투(1176)에서 패하면서 그의정치적 의도는수포로 돌아갔다. 이후1183년 코스탄자(Cos-tanza) 협정에서 꼬무네가 제국에 귀속되지 않고독립적인 주권을 가진 정치체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꼬무네가 결정적으로 쇠락하게 된 것은 꼬무네내부의 사회적 대립의 결과였다. 꼬무네의 유력한 대가문들은 여전히 정치적 입김과 권력에 대한 지향을 놓지 않 았고 이는 유력한 귀족 가문들 사이의 정치적 투쟁을 유발시켰다. 또한 정치적 권력에 영향력을 미치고자 했던신흥 부르주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했던 저급한 귀족 들과의 갈등과 투쟁 역시 사회적 불안 요소가 되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계층들은 박탈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는 경제적 이익 배분과 소수 귀족 독재적 공화정의 언저리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향상시키려는 계층들의 요구들이 충돌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꼬무네의 등장과 제도화는 고대 로마의 공화주의와 근대 공화주의를 연결하는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꼬무네의 콘솔을 비롯한 여러 권력 기 구들은 권력 분립과 직접 민주주의의 원리 구현으로서 대의제의 전사적 정치 기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공화주의가 귀족들이나 황제권을 정당화 시켜주는 고대적 의미에서의 정치/기구였다면, 꼬무네 시대의 콘솔과 여러정치권력들은 자유주의적인 공화주의의 출발로서 권력분립 원칙에 일정 정도 부합하는 특징을 갖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와 도시 공화주의
현재 유럽을 구성하고 있는 3개의 문화적 기반을 들라고한다면 로마 문명과 가톨릭 그리고 르네상스를 들 수 있다. 각기 다른 문화들이지만 그 기반은 현재의 유럽을 만 들어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르네상스는현대 유럽의 문화적 정체성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말하는 정의의 하나가‘인간 중심의 예술과 문화의부흥운동’이다. 실제로 르네상스 시기는 유럽문명이 활짝 피어난 개화기였고, 오늘날의 현대 문명을 출발시킨
계기가 되었다.르네상스의 원동력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역사서에서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거론하지는 않겠지만, 르네상스의 유산이 단지 예술과 문화라는 외형적이고가시적인 성과만을 남긴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정치적으로르네상스는 본격적인 근대 정치학이 출발할 수 있는 동력과 사상들을 잉태함으로써 오늘날 서구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하게 하였다.
꼬무네의 번성은르네상스의 물적 공간적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동양으로부터 전달된 연금술을 비롯한 과 학기술과 항해술 그리고 화약과 같은 기계 문명의 발달은건축이나 조선업의 발달도 함께 가져왔다.수공업과 무역 등의 경제 활동을 통해 막대한 부가 축적 되고, 자유에 대한 바람과 부르주아 계층을 중심으로 권력 분립이 실현되면서 이탈리아 도시 공화주의의 싹이 핀것이다. 비록 전 이탈리아의 꼬무네에 도시 공화주의가 하나의 정치 원리이자 제도로서 꽃을 피운 것은 아닐지라도 14세기와 16세기에 걸쳐 베네치아와 피렌체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공화주의 통치 기반은 근대 국가의 이론적 출발을 제공했고, 정치를 하나의 학문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정치사적 의미를 갖는 도시 공화주의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주의는 르네상스 시기의 여러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론적으로 발전하였고, 마키아벨리와 브루니(Bruni) 그리고 귀차르디니(Guicciardini)와 보테로(Botero) 같은 학자들에게 이어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현대 정치학에서 이야기하는 삼권분립에 바탕 한 공화주의 이론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로크, 몽테스키외, 루소 등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사상의 발전에도 이 시기 도시 공화주의는 충분한 정치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15세기 이후 이탈리아에서 공화주의의 전통과 체제적안정성을 구현한 곳은 베네치아였다. 13세기부터 베네치아에서는 사회 지배계층이 거의 바뀌지 않았으며, 사회적 지위와 신분이 세습되는 귀족들이 통치 구조의 맨 위층을구성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주로 상공업과 무역 등에 종사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거의 독점하였고, 행정 관료로서 공직에 진출하기도 했다.이 시대의 베네치아는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에서 볼 수 있었던 허약하거나 과도기적 형태의 공화정이아니라 삼권분립에 기초한 도시 공화주의의 원칙과 제도가 가장 발달한 곳이었다.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지배복종 관계나 지배 계급 사이의 안정적 통치 구조는 베네치아 공화주의를 당대 최고의 공화주의 모델로 평가함에있어 손색이 없었다.베네치아의 권력 구조는 학자들에 따라 다소 다른 의견을 보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6개 등급에 따른 구조화로 구축되었다. 첫 번째는 대평의회(Maggior Cosiglio)와1백여 개에
달하는 작은 부서들(uffici minori)이다. 두 번째는 상원(Seanto)과 40인 평의회
(Consiglio deiQuaranta), 지사나 대사 등 고위 직급의 공직이다. 세 번째는 10인 평의회 (Consiglio dei Dieci)와 40인 평의회의3자 모임과 현자들의 총회(Collegio dei Savi)가 있었다.

네 번째는 10인 평의회의 수장회(Capi del Consiglio deiDieci)와 국가 감찰단(Liquisitori di tato)이었으며, 다섯 번째는 산 마르코 집정관들(Procuratori di SanMarco)과 총독 자문위원단(Consiglieri ducali)이고, 베네치아의 주권을 상징하는 도제(Doge)가 최상위 단계에위치하는 수직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공화정 시스템은 여러 측면에서 현대적인제도와 운영을 하였다.도시를 인구와 산업적 고려 등을 통해 구역(세스트리에라고 하는 구획을 말한다)으로 분할하고, 국가 변호인단이나 군제 개편과 각종 직능별 위원회의 존재 등은 베네치아의 여러 권력 기구의 분산과 상호견제를 통해 삼권분립과 권력 분점이라는 현대 공화주의 원칙을 18세기까지유지할 수 있었던 원천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베네치아공화국의 영속 기간은 중세 자치도시인 꼬무네의 발달로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도시 공화주의의 완성을 보여주는적절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탈리아 도시 공화주의의 민주주의적 의미
지금까지 살펴본 이탈리아 도시 공화주의는 그 뿌리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으며, 거의 1천 년에 걸쳐지속되었던 정체(正體)이자 시스템이었다.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도시공화주의가 민주적이었던가에 대해평가하는 것은 쉬운 작업은 아닐뿐더러 어째서 민주주의의 역사에 이를 포함해야 되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여기서 새로운 해석이나 또 다른 주장을 펼치는 것은 새로운 논란과 검증의 작업이 필요하기에 간략하게 이탈리아도시 공화주의의 민주주의적 상관성과 정치적 의미만을서술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가장 먼저 이야기할 민주주의와의 상관성은 분명한 역사적 실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중세 자치도시인 꼬무네가 현대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민주사회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꼬무네의 새로운기반은 고대 귀족이나 중세를 지배했던 가톨릭이 아니었다는 측면에서 자유 증진을 통한 새로운 사회구성체의 등장에 대해서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특히 대부분의 꼬무네에서 노예제도를 폐기하였던 점과 농업이 아닌 상업과 원시공업체제를 통해 경제적 부를획득한 부르주아 계층의 등장은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이는 민주주의 확장에 대한 사회 조건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시 공화주의는 현대적으로 어떤 해석이 가능한 것일까? 비록 당대의 꼬무네가 오늘날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현대의 민주주의적 특징을 모두 갖지는 않았을지라도 일정 부분 현대적 해석이 가능한 면면들을나타내고 있었다. 첫째는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제의 과도기적 형태라는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이 문제는 당대의 여러 꼬무네에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권력 분점과 제도적 보완 의 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둘째는 이탈리아 도시 공화주의가 현대 서구 여러 선진 공화주의 국가들, 다시 말해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등의 국가에 전해지면서 현 대 공화주의 원형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충분히 획득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오늘날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의 다양한 문화적 색채와 내 용의 정치적 기반이었고, 현대 이탈리아의 권력배분과 균형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이다.따라서 이탈리아 도시 공화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의 내 용과 모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거울이자 전형이라는 측면에서 현재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을담당하고 있으며,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를 조화롭게 운영하는데 기반이 되는 풀뿌리 민주주의와 공동체적 이상을 구현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정치적 의미를갖는다 할 것이다.
글/사진 : 김종법 uti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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