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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6. 16:37



캄보디아의 슬픈 역사

킬링필드. 인구 700만 가운데 2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캄보디아의 비극이다. 1975년 친미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크메르루즈는 지상 낙원을 건설한다며 사람을 죽이고 또 죽였다. 광기로 무장한 이 극단적 공산주의자들이 세우고자 했던 것은 도시 없는 자급자족형 농경사회였다. 우선 ‘불순분자’로 분류된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도시에서 쫓겨나 집단농장으로 가야 했고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굶주려 죽었다. 살아서 도착하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노동과 굶주림 그리고 무슨 이유로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은 죽어나갔다. 죽음과 죽음의 공포가 캄보디아를 휩쓸었다.
사실 죽음의 그림자는 킬링필드 이전에 이미 캄보디아를 덮치고 있었다. 정부군과 크메르루즈와의 내전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미국의 폭격으로 무고한 양민 1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크메르루즈가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19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크메르루즈를 국경 지역으로 몰아내면서 비극은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크메르인들의 고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점령군은 헹 삼린(Heng Samrin), 훈 센(Hun Sen) 등 크메르루즈 출신 친베트남 인사들을 내세워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을 수립한 후 10년 동안 캄보디아에 주둔하면서 횡포와 수탈을 일삼으며 대규모 기아 사태를 초래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국왕 시하누크(Norodom Sihanouk)와 그의 아들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가 이끄는 푼신펙(FUNCINPEC), 전 수상 손 산(Son San)이 조직한 크메르인민민족해방전선(KPNLF)은 군대를 조직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부 지역은 여전히 크메르루즈가 장악한 채 게릴라 전술로 버티면서 캄보디아는 다시 내전 상태로 빠져들었다. 수도 프놈펜에서조차 해가 지면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대다수의 캄보디아 사람들은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왜 싸우는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는 채 매일 공포와 굶주림에 맞서 싸워야 했다.



 
1991년, 캄보디아를 분할하고 있던 캄푸치아인민공화국, 푼신펙 인민민족해방전선, 크메르루즈는 마침내 파리평화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전쟁 대신 선거를 통해 누가 캄보디아를 통치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협정에 따라 전권을 위임받은 유엔은 유엔과도행정기구(UNTAC)를 구성하여 경쟁 세력들을 무장해제한 후 선거를 준비하였다. 비록 크메르루즈는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선거를 보이콧했지만 예정대로 1993년 5월에 선거가 실시되어 제헌의회를 구성함으로써 내전은 종식되었다. 크메르루즈는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어 실질적인 지도자 폴 포트(Pol Pot)가 사망한 1998년 이후 급격히 와해되었다.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는 전범재판소를 구성하여 크메르루즈가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를 심판할 예정이지만 크메르루즈의 핵심 인사들이 대부분 사망한데다 훈 센을 비롯하여 현 정부 고위 인사들 중에 크메르루즈에 가담했던 이들이 적지 않아 어떤 성과를 거둘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3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전쟁이 남긴 상처는 너무 컸다. 특히 아무데나 흩뿌려진 지뢰는 여전히 가난한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다.

지금까지 지뢰에 목숨을 잃거나 팔다리를 잃어버린 이들이 3만 명을 넘는다. 국제지뢰금지운동(ICBL)과 지뢰자문그룹(MAG) 등과 같은 비정부기구(NGO)들이 지뢰제거 작업을 펼치고 있지만 아직도 최소한 천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속도로는 모두 다 제거하는 데 약 3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지뢰 한 개를 찾아내 제거하는 데 최소 200달러가 소요되는 만큼 국제사회의 지원이 절실하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 낯선 인간의 조건

그 누구도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지는 않았지만 1993년 선거는 캄보디아에 민주주의를 선물했다. 1998년과 2003년에는 독자적으로 선거를 치러냈고 그 결과에 따라 정부도 구성되었다. 많은 이들의 우려에도 캄보디아의 민주주의는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캄보디아의 민주주의는 결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훈 센 총리가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은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사실상 권위주의 정부와 다름없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실 신생 민주주의가 처음부터 튼튼한 뿌리를 갖고 민주적으로 운용되기란 쉽지 않다. 민주주의를 쟁취한 경우에는 민주화 세력이 든든한 수호 세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캄보디아처럼 민주주의가 주어진 경우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비민주적 수단을 쓰고픈 유혹이 강하게 작동한다. 실제로 1993년 선거 직후 캄보디아의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았다.



 

선거 직전 실질적으로 캄보디아를 통치하고 있었고 군사력에서도 우위에 있었던 캄보디아인민당은 선거 결과 푼신펙에 뒤져 제 1당이 되는 데 실패하자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총리를 한 명 더 두는 제도를 도입했다. ‘제 2총리’에 지명된 훈 센은 ‘제 1총리’ 라나리드를 제치고 실질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불편한 동거에 인민당과 푼신펙 모두 불만일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1997년 군부 내의 양당 지지세력 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푼신펙을 제압한 인민당은 푼신펙 소속 장교 100여 명을 처단하고 라나리드를 반란혐의로 몰아 제 1총리 직을 박탈했다. 라나리드는 국외로 망명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듬해 선거는 예정대로 치러졌지만 이미 실권을 장악한 캄보디아인민당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제 1당의 자리를 확보했다. 인민당은 유권자들에게 금품을 살포하고 행정조직을 동원해 인민당에 입당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인민당에 표를 주지 않을 경우 보복이 있을 거라는 협박을 일삼았다. 가난에 시달리는 유권자들에게 금품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며,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던 과거를 기억하는 유권자들에게 협박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두려움이다. 정부가 장악한 언론은 항상 인민당과 훈 센 총리에게만 조명을 비추었다. 푼신펙도 인민당 못지않게 금품을 살포하며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했다. 결과는 인민당의 승리였다. 푼신펙을 비롯한 야당은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며 왕궁 앞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정부의 폭력적 진압에 무력하게 무너졌다.




 

2003년 선거에서도 승리한 인민당은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푼신펙은 정부에 참여하는 대가로 관제여당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새롭게 부상한 삼래앙시(Sam Rainsy)당이 야당 몫을 하고 있지만 인민당 앞에서 무력하기만 하다. 인민당은 이제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 초법적 권력이 되었으며 급기야 지난해 2월에는 삼 래앙시를 포함한 삼래앙시당 소속 국회의원 3명의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명예훼손과 반란군 조직 혐의로 법정에 세웠다. 연말에는 베트남과의 국경 문제와 관련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 언론인이 구속되었다.

이에 항의하는 시민단체 지도자들에게도 체포영장이 발부되었고, 국경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피력한 토미코(Sisowath Thomico) 왕자도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 국회의원과 왕족조차도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일반 민중의 권리는 철저하게 무시될 수밖에 없다.
최근 인권단체들은 일련의 불법적 토지 탈취에 주목하고 있다. 크메르루즈가 지배하면서 토지를 포함한 모든 사유재산에 대해 소유권을 폐지하였기 때문에 이후 일부 지역의 토지 소유권이 법적으로 모호한 경우가 생겼다. 이러한 허점을 이용해 권력자들과 기업들이 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 캄보디아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한 법을 만들고도 집행을 미뤘을 뿐만 아니라 빼앗은 자들 편에 서서 항의하는 농민들을 탄압했다. 2004년에는 농민시위대에 수류탄이 터져 8명이 부상을 입었고, 지난해 3월에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5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시민단체들의 항의에 마지못해 발포 책임자를 구속했지만 곧 석방하고 말았다.
NGO들도 권력의 횡포 앞에서 예외가 아니다. 런던에 본부를 두고 불법 벌목을 감시하는 지구촌감시(Global Witness)는 사무실을 폐쇄했다. 현지 직원들이 끊임없이 협박에 시달리고 외국인 직원들에게는 입국이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노조에 대한 탄압도 강화되고 있다. 2004년에는 노조 지도자가 암살되었으며 노동자들의 집회는 일체 불허하고 있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그야말로 실종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했던가. 현재 캄보디아의 권력기구는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다. 정의의 보루인 사법부는 행정부의 시녀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피해는 고스란히 민중의 몫이다.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은 살인을 저지르거나 미성년자에게 성폭력을 가하더라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 반면 힘없는 자들에게는 고문과 폭력이 고질병처럼 반복되고 있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의 2004년 보고에 따르면 1992년 이후 중대한 인권침해가 178건 발생하였고, 캄보디아 인권단체인 LICADHO에는 지난해에만 343건의 인권침해가 보고 되었다. 캄보디아에서 인권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낯설다.

누가 민주주의를 지킬 것인가?

캄보디아의 슬픈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행했던 과거는 그 어두운 그림자를 현재에 드리우고 있다. 습성화된 폭력, 그로 인해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협박은 여전히 효과적인 통치 수단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과거는 현재와 비교되며 현재를 정당화한다. 현재는 그 무엇과 비교하더라도 지옥과도 같았던 과거보다는 낫다. 사람들은 그렇게 고통을 견뎌내며 혹 과거로 돌아갈까 두려워하며 억압적인 정부를 받아들인다. 이는 캄보디아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국제사회도 권력을 장악하고 경제성장을 이끌어내는 훈 센의 인민당 정부를 인정하며 지지하고 있다. 평가의 기준이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누가 캄보디아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인가?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농민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인 나라에서,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시민사회는 정부의 탄압에 성장은커녕 오히려 위축되고 있다. 캄보디아 시민단체들과의 지속적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캄보디아는 현재 국제사회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지난 3월 기부국자문단은 올해 6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약속했다. 주목할 것은 이 결정에 앞서 기부국자문단은 국경정책을 비판해 구속된 인사들을 모두 석방할 것을 요구했고 캄보디아 정부가 이를 받아들인 사실이다. 과거를 먹고 사는 현 정부에게 경제적 성장은 정치적 생존의 필수조건이며 따라서 국제사회의 원조는 그들에게 정권을 유지해주는 동아줄이나 다름없다. 국제사회가 캄보디아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톺아볼 대목이다.

 

정연식
현재 창원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한국동남아학회 총무이사. 2003년 호찌민대학교 객원교수
미국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정치학박사
사진제공 박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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