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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민주화운동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29. 10:10
2차 대전 이후의 민주주의
 

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 민주주의의 새로운 분수령이 되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유럽의 대부분은 권위주의 정부의 지배를 받았지만, 전후에는 모든 정치세력이 민주적 헌법과 자유선거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치세력은 독일군의 점령에 협력하면서 회복할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민주주의야말로 지옥과 같은 전쟁 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후 유럽에‘냉전’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국제정치의 역학은 민주화의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서유럽에서 반공주의 정부가 등장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데 비해, 소련의 외교정책은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반대파를 억압하고 민주적 정치를 중단시켰다. 연합국의 점령과 국제정치의 역학 이외에도 유럽의 정치적 판도는 국내의 정치적 갈등과 정치적 합의로 다양한 결과가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서유럽과 북유럽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수립되었고, 동유럽에는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되었다. 반면에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남유럽에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러한 정치체제의 지리적 분포는 1970년대 중반 남유럽혁명과 1980년대 후반 동유럽혁명이 발생할때까지 유지되었다.

 
승전국의 경험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 영국, 프랑스의 민주정부는 더욱 공고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민주주의는 가장 덜 나쁜 정치제도”라고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파시즘보다 좋은 제도라는 점이 널리 인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하는지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의 민주정부는 상이한 정치제도를 채택하였으며,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국가들은 법의 지배, 시민적 자유, 권력 분립, 대의정부를 비롯한 민주정부의 공통적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의 민주정부를 보면 전후 민주주의가 단순히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미국과 영국은 새로운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했고, 프랑스는 전후에 새로운 민주적 헌정체제를 만들었다. 미국의 노동자 계급은 독자적인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지 않았지만, 루스벨트의 민주당에 협력하여 상당한 정도의 노동조합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노동자 계급이 성장하고 노동자 대표들이 의회에 진출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영국의 노동당은 국내에서 거국내각에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했고, 프랑스 공산당은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했다. 전후 영국 노동당은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무상교육을 추진했다.
스웨덴 출신 사회학자 괴란 테르반이 주장했듯이, 전후 유럽의 민주주의 발전에서 노동자 계급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은 항상 다른 계급과 연합하는 전략을 선택해야 했고, 정치적 동맹은 정치적 조건에 따라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다. 전쟁 시기에 파시즘의 지배를 막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연합한 것처럼, 국내 정치에서 좌익과 우익의 극단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온건한 중간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정치적 연합이 형성되었다. 전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들 사이의 계급 타협을 강조한 미국의 정치학자 애덤 쉐보르스키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정부는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였지만,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경제적 개혁과 복지국가를 통해 사실상‘사회민주적 합의’를 이룩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 영국, 프랑스의 민주정부는 더욱 공고하게 발전할 수 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민주주의는 가장 덜 나쁜 정치제도”라고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파시즘보다 좋은 제도라는 점이 널리 인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하는지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의 민주정부는 상이한 정치제도를 채택하였으며,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국가들은 법의 지배, 시민적 자유, 권력 분립, 대의정부를 비롯한 민주정부의 공통적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패전국의 경험
 
전후 영국이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서독, 이탈리아, 일본에서도 정치체제의 선택은 권위주의와 민주주주의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를 선택하는가의 문제가 되었다. 누구도 권위주의로 복귀하려고 시도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이 이식한 민주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민주정부가 수립되었다. 민주화의 급진적 모델이 채택되지 않았으며, 정부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서독, 이탈리아, 일본의 민주화 과정에서 미국의 외교정책이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구체제의 권위주의와 파시스트 연합의 핵심적 세력을 모두 제거하여 민주주의의 장기적 전망이 밝아졌다. 1946년 이탈리아는 국민투표로 공화국을 선택했고, 독일에서는 나치 세력을 축출하고 군대를 해체하면서 연방공화국의 정부에 남아 있는 융커 계급의 잔재를 모두 청산하였다. 일본에서도 군국주의 세력과 결탁한 재벌을 해체하였다.
위와 같은 민주화 과정에 대한 점령군의 역할과 국제정치 등 구조적 설명 이외에도 주요 정치적 행위자의 전략적 선택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국내 좌파와 우파 정치세력의 전략도 민주적 이행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집권세력인 우파 정당은 외양상 자유?민주적 정치체제를 지향했다. 이와 유사하게 좌파세력도 혁명노선을 포기하고 민주주의를 선택했다. 자유주의는 자유민주주의가 되었고,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가 되었다.
 
 
뒤늦은 민주주의 혁명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양차 대전 사이의 시기부터 권위주의 체제가 형성된 후 수십 년 동안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민주적인 유럽 국가와 달리 1970년대 중반까지 독재정부가 유지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유럽의 사생아’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왜 1970년대 중반에 남유럽의 권위주의 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가? 이러한 갑작스런 권위주의의 위기는 장기적인 구조적 변화와 단기적 위기에서 촉발되었다. 먼저 산업화와 자본주의 발전은 노동자, 중간 계급 등 민주적 세력을 강화시켰고 전통적 엘리트가 주도하는 권위주의적 연합을 약화시켰다.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약화되고 지배연합에서 분열이 발생했다. 특히 에스파냐의 산업화와 도시화는 산업노동자 계급, 도시 중산 계급, 대학생들이 강력한 저항운동을 조직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와 함께 다양한 사회집단의 정치적 행동이 권위주의의 붕괴를 촉발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위기는 외부에서 발생했고, 에스파냐의 위기는 내부에서 발생했다. 포르투갈은 식민지 전쟁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해 정권의 위기를 불러일으 켰다. 이해 비해 에스파냐는 권위주의 정치에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이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고 저항하면서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정치학자 길레르모 오도넬은 권위주의의 지배에서 초기의‘이행’(transition)과 자유민주주의의‘공고화’(consolidation)를 구분하여 설명했다.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 가운데 누가 우세한 정치적 힘을 갖느냐에 판가름되었다. 남유럽의 경우에는 민주화를 추진한 정치세력이 우월한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에서는 사회당과 가톨릭민주당이 협력하여 극단적인 정치세력을 배제하고 민주적인 정치연합을 형성했다. 에스파냐에서는 사회당과 민주중도연합이 협력하여 프랑코를 추종하던 팔랑헤당을 제외하고 민주정치의 제도적 토대를 형성했다. 이 처럼 다른 계급적 기반을 가진 정치 세력이 합의를 거쳐 헌법을 제정하고 선거 결과에 승복하면서 민주정치는 안정적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민주화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의 종말과 민주화 과정은 매우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소련식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사회주의 경제를 그대로 이식한 동유럽의 정치체제는 소비에트체제가 아니라‘인민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이 체제에서는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다당제와 일부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허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체제 역시 공산당의 관료들이 철저히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인민’이 없는 정치체제였다. 누구도 이를 민주주의 체제로 부를 수 없을 것이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주장하며 소련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소련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한 고르바초프는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보리스 옐친과, 개혁을 거부하는 공산당 보수파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 심각한 어려움에 빠졌다.
결국 1991년 강경 보수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고 군부는 고르바초프를 연금하게 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시민과 함께 쿠데타에 저항한 옐친이 새로운 권력을 장악하고, 새로 탄생한‘러시아연방’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로서 소련 공산주의 체제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러시아와 동유럽의 민주화를 가로막을 아무런 세력도 존재할 수 없었다.
미국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은『제 3의 물결』에서 동유럽의 민주주의를‘제 3의 물결’이라고 보았다.‘ 제 2의 물결’이 이루어진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서는 미국에서‘이식된 민주화’ 가 일어난 반면, 동유럽, 라틴아메리카, 동아시아의 민주화는 자생적으로 조직화된 힘에 의해서 민주주의가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공산권의 붕괴와 민주화 과정은 매우 다양한 요소가 긴밀하게 연결된 매우 복잡한 정치적 과정이다. 무엇보다도 소련 고르바초프의 외교정책의 변화가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치의 변화 속에서 저항세력이 조직한 사회운동의 도전이 공산주의 정권의 정당성에 거세게 도전했다. 특히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반체제운동이 민주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과제
19세기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외면을 받았지만, 20세기에 민주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되었다. 1975년에민주주의국가는불과50여개국에불과했지만, 20세기후반에는거의 120여 개 국에서 민주화가 발생했다. 이러한 20세기 역사를 볼 때 민주주의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주요 조건으로 보통선거, 선거 규칙의 합의, 경제성장, 사회통합을 위한 정치적 조정능력 등 네가지요소를지적할수있다. 하지만자유민주주의정치체제도여러가지문제점이있다.
먼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의회와 입법부가 지나치게 중앙집중적인 관료기구와 정치기구를 강화하면서 민주주의의 대표성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 정부 역할이 비대해지는데 비해, 시민사회의 견제와 균형 역할은 충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다음으로 1980년대 이후 자유시장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면서 경제정책을 지도하는 국민정부의 역량이 감소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장기적인 구조적 실업과 사회적 배제가 야기하는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한 사회에서 경제적 부와 정치권력의 불평등이 악화된다면 경제적 불만은 커지고 주요 정치 조직들은 제대로 역할을 못하게 될 것이다. 좀 더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법의 지배, 법 앞의 평등, 시민적 권리의 보장, 경제적 효율성과 함께 사회적 형평성, 사회정의, 사회연대성을 강화하여 사회통합을 추진하는 노력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글 김윤태 |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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