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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세계 혁명과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29. 13:41
‘제 3세계주의’의 기원과 진화
 

‘제 3세계’는 지난 20세기 미국-소련 사이 동서 냉전구조가 고착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원래 제 1세계를 지칭하는 미국, 서유럽, 일본 등과 같은 선진자본주의 국가들도 아니고, 제 2세계를 지칭하는 옛 소련을 중심으로 한 바르샤바 조약기구(WTO)의 가맹국들도 아닌 제 3의 국가군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각에서는 제 2세계가 사실상 소멸된 현재와 같은 탈냉전 시기에 제 3세계라는 범주가 더 이상 유효한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제 3세계 개념은 국제사회에서 식민지 역사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근대화와 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는‘개발도상국’,‘ 후진국’,‘ 약소국’,‘ 빈국’등과 같은 의미로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제 3세계 국가들은 남반구에 해당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주로 집중되어 있어 북반구에 위치에 있는 서방선진국과 대비하여‘남’(南) 진영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특히 이들 중 일부 국가들은 여전히‘북’ 진영을 의식하여‘제 3세계주의’(Third Worldism)를 주창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 3세계의 화두는 반서방, 반자본 사회혁명을 통한 근대화였다. 1980년대부터는‘제 3의 물결’로 일컬어진 민주화의 도미노 현상과 함께‘인민의 의사’를 절차적 민주주의에 수렴해내면서 근대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제 3세계의 과제가 되었다. 물론 당시의 민주화 도미노 현상은 권위주의적 혹은 전체주의적 근대화 방식에 대한 시민사회의 도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때맞춰 라틴아메리카에서‘혁명’이 아닌‘개량’ 의 경로로 민선민간정권들이 수립되자 1960년대에 유행하던 혁명의 수사학을 민주주의의 수사학이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옛 소련이 이끌던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면서 제 3 세계 사회운동세력들에게‘혁명적 민주주의’의 매력이 급격히 쇠퇴하였다.
반면 우익 군부독재체제가 위기에 몰리게 되는 현상이 확산되자, 흥미롭게도 한때 제도의 창설자로서 군부 역할을 정당화했던 보수적 근대화론은 이를‘반공전사’를 자임하는 권위주의 세력이 역사적 임무를 끝내는 퇴장의 과정으로 정당화하였다. 나아가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좌파 독재’와‘우파 독재’의 붕괴가 보편적 이념에 해당하는 자유민주주의로 수렴되는 현상으로 해석하면서 이를‘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20세기 말 제 3세계에서는 이전처럼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와 같은 선언적 구호만으로는 생존할 수는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었다. 실제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길을 걸었거나 걷고 있는 제 3세계 국가들은 심각한 빈곤문제에 당면하면서 서방의 자본을 더 이상 수탈자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동맹운동(NAM) 위상을 재조정하고 유엔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기구의 민주화를 겨냥해야 하는 것이 현실에 기반한‘제 3세계주의’생존 전략이라는 시각이 제기되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 3세계의 화두는 반서방, 반자본 사회혁명을 통한 근대화였다.
1980년대부터는‘제 3의 물결’로 일컬어진 민주화의 도미노 현상과 함께‘인민의 의사’를 절차 적 민주주의에 수렴해내면서 근대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제 3세계의 과제가 되었다. 물론 의 민주화 도미노 현상은 권위주의적 혹은 전체주의적 근대화 방식에 대한 시민사회의 도전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제 3세계 사회주의와‘국가의 실패’

일찍이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자주독립의 과제를 안게 되었던 제 3세계는 제국주의로부터 강탈당했던 국가 주권을 되찾고 인민 주권의 원리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를 건설해야 했다. 특히 민족주의의 드센 파고 속에서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 각국의 독립, 특히 사회주의 해방을 성취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독립투쟁을 고무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실제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까지 아시아에서는 16개국, 아프리카에서는 23개국이 독립함으로써 전쟁 직후 세계 총면적의 33퍼센트를 차지했던 식민지가 1960년대에는 10퍼센트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주권 회복이 자연스레 인민주권의 제도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한때 비서구사회를 약탈하였던 서방 선진국들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제 3세계를 비난하는 역설이 있게 되었다. 특히‘제 3세계 어떤 독재라도 반미 내지는 공산독재보다는 낫다’라는 내용의 이른바‘커크패트릭 독트린’은 제 3세계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편향된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파 독재체제 내부에 균열이 생기고 독재 권력과 민주화세력 사이 힘의 균형이 바뀌면서 독재자를 묵인하던 미국이 민주화 세력의 지지자로 변신하였다. 이를테면 한때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의 존재를 용인하였던 미국이 1986년‘피플파워(People Power)’를 앞두고 마르코스를 포기하였던 사례를 들 수 있다. 특히 옛 소련이 이끌던 사회주의권이붕괴하면서그동안우파독재에대한미국의일방적지지가변화를보이기시작했다.
다른 한편 제 3세계에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다시 말해 혁명적 민주주의의 매력은 급격히 퇴조하였다. 심지어 사회주의 지향국으로 분류되던 제 3세계 국가들이 경쟁적 시장기제를 배제한 정치?경제발전 실험에 실패함에 따라 제 3세계에서의 사회주의적 발전 경로가 수정되고 그 역사적 의의가 저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1962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이래‘버마식 사회주의’를 내걸었던 버마 군부는 한때‘아시아의 선진국’으로 일컬어 졌던 버마를 최빈국으로 추락시켰다.
반면 미국의 안보우산 하에서 산업화에 성공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문턱을 순차적으로 넘는 행운을 얻게 됨에 따라‘주변부로부터의 오솔길’을 빠져나온제 3세계의 모범 사례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뒷마당으로 불린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우는 산업화의 성공에 따른 권위주의 체제의 위기, 다시 말해‘성공의 위기’를 경험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가들과는 달리 권위주의 체제의 산업화 실패에 따른 민주화, 즉‘실패의 위기’에 따른 민주화를 경험하였다.
한편 아프리카와 중동은 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보다 상대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에 대한적대감은 더 했지만 제국주의가 행한 분할지배의 유산으로 인해 국내 정치구조는 매우 복잡하고 갈등 정도도 심각하였다. 특히 중동과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은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실험이 실패로 끝나면서 빈곤문제와 더불어 부족, 종족, 종파 사이 불신과 갈등의 장벽을 허물어야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제국주의를 넘어 빈곤을 넘어
 
지난 20세기 중반에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면서 혁명적 민주주의를 실험하기 시작하였다. 혁명적 민주주의는 국내에서는 민주주의 기제를 운용하고 있지만 외부적으로는 식민주의를 확대하고자 한 서구 제국주의의 의도하지 않은 산물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의회민주주의가 부활하였는데도 베트남의 재식민화를 꾀하였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갖는다’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선언은 베트남, 알제리 등과 같은 프랑스 식민통치령의 인민들과는 무관하였다.
대부분의 혁명적 민주주의는 인민 개개인의 자유권, 사회권, 자결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제도화하기보다는‘포위된 혁명’을 구실로 오히려 이를 억압하였다. 그것은 인권을 침해하는‘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의 자기 정당화일 뿐이었다. 서방 선진국은‘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전체주의체제 혹은 권위주의체제로 규정하였다. 물론 자유민주주의를 통로로 해서 사회주의로 나아가고자 했던‘칠레의 길’과‘산디니스타실험’이 미국이 후원하는 군부 쿠데타 혹은 반군에게 좌절됨에 따라 제 3세계에서의 혁명적 민주주의의 진전 가능성은 그만큼 비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비교적‘진보적’이라고 불리던 미국의 케네디 민주당 정권도 베트남 민족해방 운동에 대한 적대적 무력 사용을 불사하였다. 물론 국내적으로 공화당과 민주당이 번갈아가며 정권을 장악해온 미국은 자신의‘뒷마당’이라고 생각하는 쿠바, 니카라과, 파나마,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과 아시아의 필리핀에서 제국으로 군림하였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라는 미국 건국 이념의 적용반경도 미국 영토안에 국한되었던 것이다. 당시 제 3세계 혁명세력들에게 미국 등 서구에서 보여주고 있는 민주주의는 비서구사회를 약탈하여 구축한 물질적 토대 위에서 벌이는 그들만의 축제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한때 제 3세계를 휩쓸었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의 물결은 국경 내부의 민주주의가 국경을 넘어서서는 폭력적 형태를 띠었던 서방 강대국들의 두 얼굴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식민지하에 있던 제 3세계권에서 반서방 민족주의의 파고가 드높았을 때 서구식 민주주의, 다시 말해 선거주의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제 3세계 내 급진주의자들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미국 식민지 하에 있었던 20세기 초 필리핀에서는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의회는 지주 계급에 의해 점령되었을 뿐이다. 그러기에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제 3세계 국가들은 제한적 다원주의와 국유화 노선을 핵심으로 하는 혁명적 민주주의로서의‘비자유주의 모델’(illiberal model)을 추구하였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비자유주의 모델의 추진 주체 중에 군부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집트의 낫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리비아의 가다피, 에디오피아의 멩기스투 등은 반미, 반서방, 반제국주의를 기치로 내 건 대표적인 군부 엘리트들이었다.
그렇지만 전후 반제국주의를 기치로 하였던 제 3세계의 혁명적 민주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의 가치와 경쟁적 시장을 수단으로 한 산업화를 외면하거나 폄하한‘국가의 실패’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 특히 기존 제 3세계의 반제국주의 노선은 국가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민주주의 학교’인 시민사회가 없이 진행되었을 때 어떠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듯이 국가주의 그 자체가 비효율과 부정의 근원은 아니다. 과두제와 시장 횡포에 맞섰던 혁명의 가치를 폄하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혁명 이후 국가주의가 힘을 얻게 된 원인을‘포위된 혁명’과‘약탈적 자유주의’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는 없다. 혁명적 민주주의의 문제는 통치기술의 부족에서 연유하기도 하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기인한 바가 컸다.
결국 자주독립국가의 건설로서의 정치 발전과 경제 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 용이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 20세기의 제 3세계였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사회주의 실험은 그 양상이 일률적이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서구와의 연결고리를 금기시하는 반제국주의를 공통분모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권 붕괴에서 비롯된 탈냉전과 함께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노선은 대폭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도이 모이’(쇄신)로 일컬어지는 사회주의 개혁 실험에 들어간 베트남과 같은 제 3세계 사회주의 국가를 보아도 이제 더이상 반제국주의가 반서방, 반자본이 아니었다. 지난 2000년 7월에 베트남은 미국과의 적대적 역사를 청산하는 차원에서 상호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제 3세계 자주독립국가 건설 과정에서의 제 3세계 혁명적 민주주의 실험은 서구 제국주의가 남겨놓은 비정상적인 경제?사회?정치구조를 정상화시킬 수 있는 국가와 시민사회, 국가와 시장 사이의 건설적인 상호작용과 긴장이 필요함을 보여주었다. 이제 제 3세계는 과거 혁명적 민주주의의 공과를 냉엄하게 평가하면서, 국가주의와 시장만능주의를 넘어선‘제 3세계주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때만이 희망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글 박은홍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자료사진 | 한국유니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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