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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민주」

[권두대담] 시민운동의 대전환을 위하여

기념사업회 2013. 7. 22. 18:40

 

[권두대담] 시민운동의 대전환을 위하여

 

신형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조정실장(사회)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임진철 청미래재단 이사장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부 교수

 

 

 

신형식          2008년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유럽의 경제위기로 확산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 전체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작년 총선과 대선, 두 번의 선거 이후 시민사회가 침잠기를 겪었지요. 각 기구나 단체별로 내부 토론회 등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이번 『계간 민주』의 권두 대담 주제는 ‘시민운동의 대전환을 위하여’입니다. 올해는 흥사단이 창립된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히 참여연대는 내년에 창립 20주년을 맞이해 새로운 조직으로의 전환, 변화의 방법론, 노선 정립 모색 등 내부적으로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물꼬를 터주시지요. 시민사회 흐름의 과거부터 현재, 당면한 문제들, 나아가 전환기를 맞은 시민운동의 변화 모색 사례를 언급해 주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태호          시민운동만 전환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 전체가 전환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시민운동이 있지요. 시민운동도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시대나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성장하고, 거기에서 역할하고, 역할이 전환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상 시민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 1990년대 급성장한 특정한 성격의 사회운동을 지칭합니다. 흔히 말하는 ‘87년 체제’를 말하지요. 형식적으로는 의회가 생겼고 대통령도 국민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민주주의가 충분히 개화되지 않은 시기입니다. 그러나 또 수십 년간 억눌려왔던 민주화나 사회개혁 욕구는 분출하던 시절였지요. 그런 시민들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해온 것이 시민운동입니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급성장한 시민운동은 시민들을 대변한다는 의미에서 대변형(代辯型) 운동이죠.
형식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는 도입되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그런 것을 해야 할 정치가 작용되지 않아 시민운동은 정치개혁 활동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분히 중앙권력에 대한 문제제기와, 대의제의 정상화 측면에서의 정치개혁 추구가 많았어요. 환경, 여성, 경제민주화, 권력 감시 등 다양한 분야의 시민운동이 활성화됐지만, 본질적으로 정치개혁 성격이 강했던 것은 이런 이유이지요. 2000년대 초반의 낙선운동도 그런 측면입니다.

 

 

 


민주화 이후 시민권리가 성장하고 대의제가 조금씩 정착하는 등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된 것 이면에는 냉전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의 부흥이 있죠. 한국사회에서도 시장화와 세계화의 신자유주의적 메커니즘 속에서 양극화가 가파르게 진행됐고요. 물론 분단이라는 상황적 이유가 크겠지만, 이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서의 노조는 약해요. 시민단체도 사회경제 문제에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고요. 시민운동이 심화됨과 동시에 양극화도 진행됐다는 것이 저로서는 굉장히 아픈 측면입니다.
이전까지 시민들이 시민단체를 통해서 의견개진을 했다면 2000년대를 지나면서부터는 스스로 활동하고,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합니다. 온라인 카페를 만들어 모이기도 하고, 정치 서포터즈를 만들어 선거에서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요. 특히 SNS가 활성화되면서 개개인이 미디어가 되고 운동주체로서 서게 되었지요. 시민운동의 설 자리가 상대적으로 좁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부정적인 현상이고 큰 위기라고 보지는 않아요. 오히려 시민사회가 풍성해지면서 주체가 다양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어쨌든 시민사회가 전체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소통수단이 발전하고 사회주체가 다양화되고 있기 때문에 시민사회나 정치문화가 성숙된 것이냐 하면 또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아요. 최근에 5·18광주민주화운동 왜곡 논란이 일고,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 일간지 1면을 장식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많이 놀랐어요. 특히 국정원 문제는요, 국정원이 선거를 비롯한 정치현안 모든 것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인데요. 그런 과정에서 ‘심리전’이라는 군사용어를 썼어요. 심리전이 뭡니까, 군사작전이잖아요. 국정원이 국민을 상대로 팀을 꾸려서 작전을 했다는 것이고,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는 거죠. 이런 것을 보며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연발생적으로 쭉쭉 성장하지는 않는다, 후퇴도 있다는 것을 새롭게 느껴요. ‘정치문화가 아직은 성숙되지 않아서’라는 주장도 맞지 않다고 봅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도 CIA가 국민정보를 수집해서 논란이 됐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오히려 정보기술이나 소통기술이 발전하면, 권력 통제수단도 함께 발전한다는 것을 보여준 겁니다. 미래를 묘사한 영화들을 보면 빅브라더 같은 디스토피아가 설정되잖아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직은 시민운동이 할 일이 많아요.

 

임진철          저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쳐 참여연대 창립과정에 참여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동북아한민족네트워크를 만들고 백두산 기슭에 백만 평 규모의 생태문명촌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했어요.
국내에서 시민운동을 하다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지역에서 10년을 보내느라 공백은 있지만, 한국에 돌아와 보니 한국사회에 대해 새롭게 보이는 측면이 있더군요.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과와 한계, 오류가 있겠지만 우선 크나큰 성과로서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룩했다는 것과 그 성과로 인해서 대선국면에서 51:49의 게임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보수와 진보의 실질적 실력 차가 6:4 정도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시민사회의 지도층으로 자리매김한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이 과연 얼마나 제대로 일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특히 작년 총선과 대선을 보면서 ‘정치권에 들어간 기존 민주화 세력이 기득권화 됐구나’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느꼈죠. 시민운동의 실무자들은 생활상의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데 말이죠. 노동운동도 대기업노조와 공공노조, 전교조 중심이 되다 보니 비정규노동자세력과 프레카리아트(불안계층)화된 자영업자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 못하고 있고요. 대학사회의 진보적  교수들도 비정규직 교수 문제를 해결 하려고 하지 않거든요. 보수든 진보든 밥그릇 앞에선 ‘얄짤없다’는 거죠.
국정원 사건도 그래요. 이전 같으면 시민들이 분노해 시청광장에 나가거나 할 텐데, 그러지 않거든요. 주변의 소위 ‘깨인 시민들의 모임’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죽어라 싸우면 또 야권이나 진보세력들이 민주통합당 사태처럼 또 말아 먹을 텐데 뭐 하러 나서냐?”고 해요. 허무주의적 분노와 불신이 팽배합니다.
그러면 진보세력이 집권을 하면 많이 나아지겠느냐, 그럴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51:49 게임화 된 정치구조 하에서는 정권을 보수가 잡든 진보가 잡든 서로 발목을 잡기 때문에, 자잘한 문제 빼고 큰 문제에 있어서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지요. 그래서 이제는 보수 진보가 교집합을 만들어 함께 나아가는 선진화된 정치시스템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한국사회 갈등비용은 연간 300조원에 이르고 있는데, 이렇게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연간 GDP의 27%를 차지할 만큼 한국의 사회통합 문제는 시급한 과제입니다. 미래의 국가경쟁력은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고 창조적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갈등조정능력과 창조력이 선진국 진입의 필수조건이자 국가경쟁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 민주주의 정치시스템’을 구축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분단체제 속에서 살고 있고 외세에 의한 지정학적 원심력이 작용하기에 이와 연동된 좌우의 극단적 세력들의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앞으로 저성장과 양극화의 상황 때문에 여유가 없어져 진영논리와 좌우극단의 목소리가 더 커질 우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 극단적 세력과 ‘증오 상업주의’를 부추기는 세력들을 주변화시키고, 창조적 진보세력과 합리적 보수 세력들이 경쟁동맹을 통해 정치의 중심세력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가 몸통과 좌우의 날개로 앞을 향해 날 듯이”, 한 사회도 튼튼한 몸통가치인 근본가치에 대해서는 여야, 보수진보가 협력하고, 좌우의 날개가치에 대해서는 생산적 경쟁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몸통가치에는 공정, 공공성, 민생우선의 원칙,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 안전망, 공동선, 생명, 평화, 인권 등이 있습니다.

 

신형식          경제사학회 회장으로 계시며 건국대학교 교수이신 최배근 교수님께서는 최근에 낸 저서 『파국에서 레임체인지로』라는 저서에서 구체제를 해체하고 협력과 공유, 호혜성의 원리에 입각한 대안 경제로의 이행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새로운 대안 경제의 모색이라는 화두가 새로운 시민운동의 화두로 연결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설명을 부탁하고 전환기에서의 해외 시민운동의 사례도 함께 소개해 주면 좋겠습니다.

 

최배근          서구사회는 1960년대에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룩했습니다. 이때 산업화가 절정을 이뤘는데, 이로써 사회 전체적으로 파이가 급속도로 커지면서 계급적 타협이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복지사회의 기틀도 만들 수 있었지요. 그런데 60년대 말부터는 산업화가 일단락되면서 성장 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00여 년 동안 제조업을 가지고 좋은 일자리와 경제성장을 만들었는데, 제조업이 했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파이가 작아지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파이를 둘러싼 갈등이 금융화로 나타났고, 없는 사람들은 금융논리에 의해 약탈당합니다. 경제의 금융화와 사회의 금융화 진행됐습니다. 금융화가 추진한 세계화가 다시 금융화를 부추겼고요.

 

 

 


이런 상황에서 1990년대에 전 지구적인 반동이 일어납니다. 특히 저는 유럽과 캐나다 지식인사회나 시민사회에서의 변화를 목격했습니다. 파편화된 시민사회를 복원하기 위해 ‘시민사회 재구축(Rebuilding Civil Society)’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60년대부터 보수와 진보가 이미 타협을 봤던 ‘① 경제에 있어서는 시장논리를 수용한다. ② 시장은 공정한 게임이 가능해야 하므로 적어도 기회의 평등을 제공해야 한다.③ 경쟁논리에는 패배자가 나올 수밖에 없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세 가지 원칙이 금융화로 부식되었고, 그 결과 위기에 놓인 시민사회를 복원시키자는 취지였습니다. 또 제조업 기반이 약화되면서 노조 조직력도 함께 약해졌는데, 이것도 복구하기 위해 애쓰더군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시민사회 재구축의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금융화에 따른 소득불평등 심화, 탈공업화에 따른 일자리 양극화 심화 등 금융과두정과 세계화에 시민사회와 노동운동은 무력감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제조업 종사자가 8~9%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금융위기를 겪고 난 후의 선진국들이 좀처럼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내상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타협과 양보의 문화가 발달했다고 알려진 미국 등 서구사회에서도 약자에 대한 배려와 커뮤니티 문화가 약화됐어요. 예를 들면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은 서로 양보 없는 벼랑 끝 전투를 하고 있지요. 금융위기 이후 자산가 계급이 상당히 많은 타격을 받았는데, 물론 금융위기에 대한 불공정한 정책 대응으로 많이 회복되었지만, 공화당은 이런 자산가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고, 민주당은 집권세력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사회적 타협을 못 만들고 있어요. 경제적 기반이 상처를 받으면서 야만성이 노출된 것이죠. 유럽의 경우도 개별국가 내의 편차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중심국가와 주변국가 간에 타협을 못 만들고 있거든요. 서구 민주주의가 전성기에 보여주었던 배려와 양보, 타협이 약화되면서 ‘2류 사회’로 전락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과거는 지나가고 있는데, 새로운 미래를 못 만들어내기 때문에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사회 시민운동은 선진국을 일정한 시차를 두고 답습해 왔고 수입해 왔습니다. 지식인이 ‘오퍼상’ 역할을 했고요. 산업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된 만큼 탈산업화도 굉장히 압축적으로 진행되어서 이제는 시차도 거의 좁혀졌어요. 외환위기 이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약탈이 가속화된 사례가 가계부채 문제입니다. 향후 장기 저성장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즉 사회 전체의 파이 증가가 약화된 상황에서는 있는 사람에 의한 없는 사람에 대한 약탈이 기본적인 배분방식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큽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진보와 보수 간 경쟁동맹 입지도 약화될 수밖에 없어요. 더 극단적 목소리가 힘을 갖게 되면 민주주의도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운동이 압축적으로 전개되면서 시민들의 요구 수준이 높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민주화의 성과를 시민들이 체득하다 보니 요구하는 기대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는 시민운동도 새판 짜기가 불가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임진철          우리는 지금 저성장, 제로성장으로 문명을 전환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약탈하는 방식으로 사회가 재조직되는 참으로 원치 않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일베 현상’을 넘어 파시즘까지 나타날 수도 있지요. 그러하기에 우리는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건강한 생각과 상식을 가진 보수와 진보가 소통하고 공감대를 넓히며 끊임없이 스킨십을 하며 교집합을 만들어나가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이념 지형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상황입니다.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시대정신’ 그룹조차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의 고무찬양죄를 없애야 한다.’고 공론화했다가 우파진영으로부터 “좌파의 트로이 목마 세력”이라고 융단폭격을 받는 상황이지요. 풀뿌리 운동을 깊고 넓게 하는 것만큼, 상층에서는 중도 보수와 중도 진보의 소통과 공감대 형성 그리고 경쟁동맹을 활착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상식이 있는 민주국가에서는 여와 야, 진보와 보수가 국가정책에 있어서 몸통가치 관련 사안을 중심으로 70%는 합의하고, 나머지 좌우 날개가치 관련사안 30%를 가지고 선거를 통해 생산적 정책경쟁으로 겨룹니다. 이러한 메커니즘으로 나아가야 국정이 안정되게 굴러가는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문제가 복잡하고 첨예하게 갈등한다고 하지만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수와 진보가 머리를 맞대면, 사안의 70%정도는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태호          몸통가치와 좌우 날개가치 이야기를 하셨는데, 말씀 그대로 진영화되고 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위기 전후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이전인 테러와의 전쟁 때부터 심해졌다고 봅니다. 90년대는 신자유주의가 확산된 위기이기도 했지만, 민주주의도 굉장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글로벌 거버넌스도 생겨나고 리우회의, 세계인권회의, 세계환경회의 등 다자간 체제도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민주적 견제장치의 성장을 따돌리기 위한 시도가 군사주의였던 것 같습니다. 네오콘, 즉 테러와의 전쟁의 논리는 ‘우리가 힘을 더 사용하는 게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라는 것이지요. 이는 사실은 약탈성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조차도 하다못해 자유무역의 질서는 지킵니다. 군사주의에 따라 네 편 내 편 가르고 극단적으로 진영화하니까 성찰의 기회를 제거한 거죠.
사회주의도 인민권력을 추구했지만 성찰하지 않아 망했는데, 자본주의도 군사주의로 흐르는 순간 망하는 거죠. 더구나 진영화된 사회를 통합할 가치가 아직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어려운 시점입니다.
그러나 진보적 요구는 많이 확대되었습니다. 몸통가치 자체가 좌우로 이동합니다. 작년 대선을 보세요. 누가 이겼느냐 하고는 관계없이 경제민주화, 복지, 노동권에 여야가 모두 관심을 갖게 됐지요. 오히려 이런 요구 변화가 오면서 진보적 가치를 현실적으로 대변했던 정치세력들은 다 위기를 맞았습니다. 정말로 진보 요구가 커지니, 진보적 요구를 대변할 준비 안 되어 있었던 정치세력이 위기를 맞은 겁니다. 진보라고 했지만 다분히 민족주의적이고 낡은 진보였던 통합진보당, 분배 분배 말만 했지, 한 번도 분배 생태 중심으로 자기 노선을 정리해본 적이 없었던 민주통합당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진보 정책이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세련된 “잘 살아보세” 정도의 구호였을 뿐, 여당보다 더 정책의 통합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비전을 말하기 전에 지금 상황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대선 때 ‘2013년 체제’라는 말을 썼죠. 이번 선거에서 야권이 이겨서 근본적인 변화를 해보자는 것이었지요. 특히 남북관계가 악화되어 있는데, 이것이 국내 정치를 악화시키는 악순환 구조를 선순환 구조로 만들어보려고 꺼낸 차원에서 던져진 다분히 정치적인 담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대선에서 힘을 합쳐 이겨보자는 것 말고도, 정말로 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사회 전체에 변화를 가져오고 싶다는 것에 동의해 2013년 체제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결국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럼 더 이상 2013년 체제가 아닐까요? 저는 이걸 묻고 싶어요.
아시다시피 87년 체제도 군부 출신이 집권하면서 시작됐어요. 2013년 체제도 여당이 재집권한 상황이라고 해서 안 될 이유가 없어요. 이미 대선에서의 쟁점인 경제민주화와 복지, 나아가 생태, 핵마피아, 국정원 사찰 등의 문제가 전반적으로 재검토되는 것이야 말로 87년 체제와 다른 식의 정치적 논쟁구조가 형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사회적 쟁점구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에 대해 여당이 선방해서 집권한 것 같지만 체제 위기나 사회적 논쟁구도의 변화를 여든 야든 시민단체든 다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요구에서 나오는 본격적인 논쟁이 이제 막 시작되는 새로운 스타트 라인이라고 봐야지, 누구한테 졌다 이겼다 하는 작은 셈으로 계산할 문제가 아닙니다. 참여연대도 잘 해야 될 텐데, 못 하면 저희도 망하겠죠(웃음).

 

신형식          지난 20여 년간 한국의 시민운동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정부를 거치며 시민사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성장했으나, 현단계에서 살펴볼 때 시민운동이 일정한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간 시민운동에 대한 평가나 비판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첫째는, 일반 시민이나 활동가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담론이며 대체로 보수주의적 관점에 서 있는 ‘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진보진영이 비판하고 있는 이른바 토대 문제, 계급 계층의 이해관계 천착하지 못하고 있지 않냐 하는 ‘중산층 시민운동’의 담론입니다. 셋째는, 정책대응 능력, 전문성의 제고가 더욱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에 대한 소회를 먼저 말씀해 주시고, 최근 스마트폰 등장, SNS의 활성화 등으로 인해 시민운동의 패러다임 자체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참여연대나 다른 시민단체, 특히 중앙뿐 아니라 지역에서 고생하는 풀뿌리 시민단체의 새로운 활로 모색이나 비전을 고민과 함께 말해 주면 좋겠습니다.

 

이태호          시민 없는 시민운동 논의가 새삼스러운 논의가 아니어서 전환기 문제와 연관될 필요가 있나 싶어요. 사실 논의하기 싫습니다. 정말로 시민이 없었다면 보수단체에서 그렇게까지 긴장하지도 않았겠죠. 실제로 낙선운동 이후에는 “홍위병”이라는 소리까지 듣지 않았습니까. 시민에 대한 동원력이 강력했고, 시민이 나설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대변형 역할을 했기에 오히려 견제당해 온 측면도 있었어요. 물론 시민 참여의 국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시민이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SNS와 온라인 카페 등을 통해서 시민이 스스로를 조직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차이겠지요.
정책 대응 능력이나 전문성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정책 문제에 집중하는 곳은 시민단체밖에 없지 않나요? 작년 문재인, 안철수 대선 캠프 정책의 대부분도 시민단체 전문가들이 세우지 않았습니까. 경제민주화건 복지건 작년 대선 의제는 다 시민단체가 제기한 정책의제들이죠. 그 이전에도 실제 정책선거를 시작한 계기인 무상급식운동도 시민단체가 제기한 의제고, 사대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정책 대응하는 몇몇의 싱크탱크가 생겨났지만 순발력이 부족하고, 구성원들의 상근이 힘들어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삼성경제연구소 등 기업계 싱크탱크는 입지가 아주 크죠. 기업계나 보수에 비해 진보의 싱크탱크가 부족한 측면이 있지만, 정책대응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시민사회의 입지가 큽니다.
그런데 여전히 대변형 운동의 틀에 갇혀서 풀뿌리 성장이 뒤처지는 것은 문제입니다. 중앙집권적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큽니다. 지역경제가 없다는 것은 재벌 위주의 수출주도형 경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로 지역차원에서 시민들, 주부가 사용할 제도적 장치들이 많지 않습니다. 주민소송제, 소환제 등이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고, 예산이나 권한 문제는 여전히 중앙집권적입니다. 이를 분권화하기 위해서라도 중앙에서 뭔가 결론이 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특징적인 것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의 변화입니다. 촛불집회는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수입개방에 대해 반대하는 다분히 중앙정치적 사안의 운동이었고, 그래서 비판자들은 ‘반이명박 운동이지, 먹거리 안전이나 광우병 위협과는 아무 상관 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운동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2008년에는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먹거리와 관련된 조직이나 단체나 카페들이 엄청나게 발전합니다. 무상급식 운동도 그런 영향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친환경’ 무상급식 아닙니까. 2000년대 후반의 특징은 시민운동이 다분히 정치개혁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실제로는 의제별 운동들이 살아났다는 말이죠.
탈핵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나라의 시민운동에서 반핵운동은 가장 일반적이고 대중적입니다. 그리고 환경운동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에 비해 한국사회에서는 좀 약했어요. 그런데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 실제로 반핵운동의 대중화가 이뤄졌어요. 2011년 사태 직후 전국집회 참석자는 500명에 불과했는데, 그다음에 정확히 만 명이 모였고 이후에 모든 종교 종단이 반핵 의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SNS나 시민들과의 관계문제에 있어서는, 시민운동이 반드시 시민단체를  통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제를 대변하는 데 있어서 소셜테이너 한 사람이 시민단체보다 더 막강할 때가 있어요. 그들의 속보성, 인기, 말재간을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그렇다면 시민단체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시민사회가 강화되느냐 약화되느냐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시민단체 조차 점차 다양한 시민사회 중 N분의 1로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리고 오히려 소셜네트워크가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이라면, 시민단체는 안정적이거나 일관되거나 SNS에서 시민들이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를 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거지요. 정책적인 안정성을 가지고 정론을 펼치는 겁니다. 이명박 정부 5년을 다 검토하니 이런 패턴이 나타나더라 하는 식의 모니터운동 방식과, 시민들과 같이 일상적이고 대안적인 삶을 찾으며 공존하는 것이 앞으로의 방향이 될 수 있습니다.

 

최배근          제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현실을 설명하겠습니다. 90년대 후반 참여연대 연구소에 관여하다가 주거문제 때문에 경기도 하남시로 이주를 했습니다. 이후 시민운동, 청년운동 하던 분들이 같이 일하자고 요청을 해서 ‘하남민주연대’ 활동을 하게 됐어요. 
1999년 당시 ‘하남 국제환경박람회’가 열렸는데, 지자체들이 하는 이벤트성 사업이 다 그렇듯이 박람회장은 행사가 끝나고 나니 흉물처럼 나뒹굴더군요. 더구나 지역유지들과 유착되어 예산 낭비도 심했습니다. 그래서 지자체에 사업 내역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는데 꿈쩍도 안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언론을 활용해 보기로 했습니다. 당시 납세자 소송을 국내 최초로 제기해 언론의 주목을 끈 겁니다. 하승수 변호사에게 실무적 도움을 받고, ‘함께하는 시민행동’과도 협력해 하남시장에게 ‘제1회 밑빠진독상’을 주기도 했어요. 언론이 주목하자, 그제야 지역의 정치인과 공무원이 반응을 하더군요. 그때부터는 정보공개청구도 쉬웠고, 자료에 대한 접근도 가능해졌습니다. 지역개발사업과 관련하여 경기도 최초로 주민감사청구를 실시해, 감사원에서 198억 원 비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했어요.
또 하남시의회 선거에 회원들을 출마 시켜 평범한 주부들을 전략적으로 공천해 당선시키기도 했어요. 하남처럼 베드타운인 도시의 생활정치 주역은 주부일 수밖에 없지요. 이들이 시의회에 진출함으로써 시정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시민사회의 정책을 시정에 반영함으로써 지역의 자원을 주민들이 통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지요.
열악한 구시가지의 환경을 보완하고 구시가지의 아이들을 교육적으로 배려하고자, 민들레 대안학교도 세웠습니다. 참여연대의 살림을 맡다가 아름다운가게 사업을 하던 박원순 서울시장을 당시에 지역사회에 초청했는데 “지역에서 일해 보니 제 입장을 이해하시겠죠?”라고 하더군요. 재정 충당의 어려움을 말한 겁니다. 보람은 느꼈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저 스스로 ‘앵벌이’라 할 정도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으로 동분서주했어요.
이렇게 풀뿌리 정치를 경험하며 느낀 것이, 지방자치가 실현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앙정부 차원의 분권 자치는 사상누각이라는 것이었어요. 직접 목격한 풀뿌리 현실은 진짜 열악했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봤습니다. 당시 민노당 기관지 『이론과 실천』에서 요청받아 글도 썼지만, 지역에서 신뢰와 실력을 보여주고 중앙으로 확산하는 서구정치와 달리, 우리는  선거 때만 되면 중앙에서 인사를 다 내려 보내 출마시키지요. 이렇게 출마한 멀쩡하고 똑똑한 젊은이들은 소모품이 돼요. 처음 출마하면 신선하지만 두세 번 하면 기성 정치인과 별 차이 없이 정치꾼처럼 보이니까요. 지역에서 잘할 수 있는 시민운동 활동가들을 망치는 길이지요. 지역에서도 차근차근 우수한 인재를 키워 나가고, 지역의 정치역량을 강화해야 합니다.

 

신형식          지금의 한국사회는 IMF 이후 명암의 단면이 뚜렷한 가운데 어두운 면이 점차로 확대되는 사회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노동에서의 차별에 기초하고 있을 텐데요.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준비가 미비한 가운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으로의 전환이 급격히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기층 민중의 삶의 피폐화가 더 깊게 진행 중입니다. 이렇게 밀려난 사람들이 자영업으로 대거 투입되면서 자영업 시장도 지금 전쟁 중입니다. 숱한 폐업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죠. 전사회적으로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사회의 불평등은 예비 사회인의 생활터전인 학교도 짓누릅니다. 학교는 지금 좌절한 청소년의 한숨이 넘쳐나요. 그 외에도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은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기술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도성장의 이면에서 더욱 불공정하고 불평등해진 삶을 살고 있는 한국의 시민들은 간절히 지원자, 대변인을 원합니다.
지금 한국의 시민운동은 바로 이런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강력한 지원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시민단체가 실질적인 민중들의 아픔에 조응하지 못하고 큰 거대담론 중심으로 이슈 파이팅을 해왔기 때문에, 중산층에서 해체된 하층 민중들에 대한 삶의 문제, 구체적인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소홀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받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태호          시민단체가 너무 정치개혁문제나 이런 데 집중하느라 시민들이 직접 겪고 있는 민생문제를 못 챙겼다, 너무 이념적이다, 실질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게 볼 여지도 있겠습니다만 거꾸로 보면 실사구시 이름으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데 소극적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죠. 오히려 시민단체들은 복지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국민생활최저선, 기초생활보장법, 국민연금제도, 최저임금 개선, 최저생계비, 여성문제 등 복지의 각론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또 복지나 이런 문제에 대해 반드시 이념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소액주주운동 같은 경우, 사실 기업측에서는 사회주의운동이라고 했지만 진보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보수쪽에서도 소액주주운동을 많이 지지 했죠. 참여연대, 경실련에서 한 운동 중에 보수가 ‘저건 정말 안 된다.’ 할 만한 내용은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정치개혁과 연관되기 때문에, 시민단체들이 각각 이런 문제를 다루면서 정치개혁을 추구한 것은 맞습니다. 정치개혁은 다분히 한국사회에서는 여냐 야냐 갈라져 싸우는 영역이어서 정치적으로 보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이라는 비판도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시민단체의 운동은 실사구시라는 이름으로 구조개혁을 하지 못한 게 오히려 잘못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민중단체나 진보단체는 오히려 이념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구조조정 반대, 정리해고 반대 등 운동을 펼쳤죠.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민중연대 등이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지고 존재했습니다. 참여연대도 2004년 10주년 평가를 보면 절차적 민주주의, 각론적 복지를 중시하다 보니 구조적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시작한 게 FTA 반대죠. 사실 FTA는 놀랍게도 노무현 정부가 하지 않았습니까. 꼭 먼저 할 필요는 없었던 거라고 보입니다만. 아무튼 그것 가지고는 시민사회 전체와 민주정부 간에 엄청나게 큰 갈등을 빚었죠. 새로운 진영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진영화되는 것이 추세라는 것이죠. 오히려 여든 야든 진영으로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 정책경쟁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내가 어느 편에 서 있었다는 것만으로 당연히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 상황이라는 거죠. 해법이 없는 상황에 모두가 직면하고 있고 그 점에서 자신들의 해법이 부족하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혁신을 빨리 하고 있는 쪽은 박근혜 정부와 여당 쪽인지도 몰라요. 그들에 대해 ‘저치들은 독재자 딸이고 유신 잔당이니까 복지나 경제민주화 문제 대응 못할 거다, 맞지 않다’고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몸통가치가 많이 이동하고 있거든요. 그걸 가지고 누가 어떻게 잘하는지 공방이 일어나는 것이지, 이 가치는 당연히 내 건데 쟤네는 못한다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잘할 것 같지만 막상 해법도 없잖아요.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진철          이 부분에 있어 오해하는 점이 있는데, 유럽에서 복지국가 이슈를 좌파가 제기한 줄 아는데 실제로 복지국가 패러다임은 우파가 제기한 거예요. 좌파가 사회변혁을 말하니까 우파는 그 대안으로 사회복지국가를 말한 것이고, 좌파도 고립될 것 같으니 실용적인 타협을 해나간 것이 오늘날 유럽 복지국가 모델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한국에서도 보수 여당이 사회복지정책을 더 잘할 수 있어요. 실제로 여당의 맞춤형 복지제도랄지 그런 아이디어가 일반 민중들한테 더 잘 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진보는 직시해야 합니다. 진보는 복지담론과 말의 성찬만 많지 실제로 실용적인 해법에서는 오히려 보수에게 밀리고 있는 것 아니냐는 평가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태호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것은 복지국가가 자원위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든 야든 대안이 없어요. 제 생각이 조금 더 급진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여든 야든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진보 정치세력이든 생태적 가치도 포함한 대안을 못 내놓으면 끝입니다. 그러니 서로 위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형식          지식PD씽크넷 대표와 청미래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임진철 이사장은 최근 대한민국 민회 운동을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정책민회와 지역민회 운동과 향후 시민운동의 전망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소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임진철          민회가 태동된 문제의식을 이야기하면 전망까지 나올 것 같습니다. 한국의 사회정치운동은 ‘국민을 위한’, ‘국민의’ 대의민주주의 헌법체제에서 온-오프 직접-숙의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가 융합된 ‘국민에 의한’ 시민민주주의와 시민헌법체제로의 이행기적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7년 6월 민주화를 위한 시민항쟁 이후 지금까지 한국은 다섯 번의 대통령선거와 여섯번의 총선 등을 통해 대의제 간접민주주의(선거민주주의)를 잘 실현해 왔으나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극심해지고, 국민들의 정치 불신과 정치 혐오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대의민주주의 정치제도는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의사와 괴리되는 것을 넘어서서 소수 정치 엘리트들의 독과점 시스템으로 굳어 버렸습니다.
‘왜 우리는 투표를 하고 나서 항상 후회하게 되는가?’, ‘아무리 신중하게 뽑고 열심히 차악과 차선을 택해도, 우리 정치판은 결국 그 밥에 그 나물이 되고 마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과 해결대안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죠.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는 지금의 제도, 대의제 선거민주주의가 지니는 근본적인 제도적 허약성과 한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미 정치사상가 루소는 ‘대의제 하의 국민은 대표자를 선출할 때만 자유로울 뿐, 선거가 끝나면 곧바로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럼 민회(民會)운동은 무엇이냐? 대한민국 국회는 대의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국가기구 즉 내셔널 어셈블리(National Assembly)죠. 민회는 가장 작은 단위인 시빌 아고라(Civil Agora)부터 시빌 어셈블리(Civil Assembly)까지 가겠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과정에 만민공동회, 원탁회의, 마을 민회, 지역 민회, 통일 민회, 갈등조정형 민회 등 다종 다양한 형태들이 나타날 겁니다. 그걸 어떻게 잘 네트워킹해서 형해화한 대의민주주의를 시민 주도의 시민민주주의운동으로 진화, 발전시켜 나가면서 시민헌법체제를 만드는 동력으로 만들까 하는 실천적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길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여럿이 함께 어깨동무하고 길을 가다 보면 등 뒤에 길이 생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신발끈을 조여매고 걷기 시작한 것이죠.
민회(民會)는 플랫폼 조직을 지향합니다. 포털 시스템 같은 정당보다는 취산(聚散)이 자유로운 비(非)정당적 ‘people to people’ 시민정치 플랫폼을 선호합니다.
조직의 형태를 H2O에 비유할 때, 얼음 덩어리와 같은 조직은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결사조직), 흐르는 물과 같은 조직은 플랫폼, 수증기 같은 조직은 네트워크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70~80년대의 민중운동 조직은 전형적인 어소시에이션 조직입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 시민운동은 대중과 함께하는 어소시에이션 조직 형태를 가졌지요. 2000년대 중반 이후 풀뿌리 지역과 부문에서 생긴 생명평화운동은 어소시에이션과 플랫폼의 혼합형을 띠고 있습니다. 촛불시위 같은 경우는 철저히 온-오프 네트워크 조직이 주도한 것인데, 이 네트워크 조직은 책임성과 지속가능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지요.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가는 조직은 네트워크, 플랫폼, 어소시에이션조직이 함께 굴러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자유로우면서도 일정한 책임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려면 네트워크, 플랫폼, 어소시에이션 조직이 함께 굴러 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소시에이션 조직이 만든 정책을 플랫폼에 얹어서 소통과 토론을 만개시키고 네트워크가 퍼나르는 것입니다. 민회(民會)운동은 이러한 소통과 토론을 통한 직접-숙의 민주주의의 유통 고속도로를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대의민주주의 헌법체제에서 직접-숙의-대의민주주의가 융합되는 명실상부한 시민민주주의와 시민헌법체제를 만들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해보고자 합니다.

 

신형식          시민운동이 이제는 중앙보다 지역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중앙의 사무국 중심이 아니라 풀뿌리 현장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풀뿌리운동 활동가의 지향성과 지역 민회의 구체적 모습이나 사례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임진철          지난날을 복기해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NGO계의 주요 인사들의 출로가 대략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한 갈래는 현실정치권으로의 진입이고, 다른 갈래는 풀뿌리 공동체운동으로의 천착과 NPO운동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양분화되면서 나타나는 문제는 정치와 사회경제, 생태평화 및 통일 의제를 공론화·이슈화하며 사회변혁과 시민정치를 견인하던 NGO 역할의 축소 및 공백현상입니다. 즉 지역과 시민에 기초한 민의 수렴과 의제설정 그리고 이를 공론화해 나갈 ‘시민정치’세력이 없어지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민회운동은 기존의 의제설정형 NGO들이 감당했던 시민정치 역할을 복원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고 선진화된 시민주도의 정치시스템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전망을 갖습니다.
실질적인 민주주의 정치시스템은 대의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 그리고 직접민주주의 시스템의 융합적 최적합화를 작동시키는 것이죠. 그러므로 탑다운(Top down)과 보텀업(Bottom up)을 매개·융합하며 최적의 공론을 만들어내고 이를 집행하고 올바로 평가해내는 미들업(Middle up)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문명 전환기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실질적 민주주의의 구현과 한반도 미래공동체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정파이념과 세대, 지역을 넘어서 문제해결의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시민 공론 네트워크 플랫폼이 절실합니다.
원주와 홍성 같은 지역에서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일정한 독립성을 가지고 이미 이러한 시스템을 운용해오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김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도 이러한 지역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유러피안 드림’조차도 뛰어넘는 문명의 맹아들을 생성해내고 있다며 연구가치가 매우 높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최배근          선진국은 지난 30~40년 동안 탈산업화라는 대변환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지난 20년 동안 마찬가지 현상을 겪고 있고요. 탈산업화는 금융화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탈구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속에서 한편으로는 일자리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중산층의 해체와 빈곤층의 퇴적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탈산업화로 산업사회의 주요 시스템의 순기능이 약화되고 있듯이, 마찬가지로 산업사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시민운동 역시 그 역할과 입지가 도전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운동의 전통적 역할만으로 낡은 질서의 해체 속에서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는 대다수 서민들이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해 1차 민회에 참석했던 지역운동가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문제로 재벌개혁보다 일자리 문제를 일순위로 꼽은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시민단체는 여전히 소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위협받고 있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 소셜미디어(SNS)의 등장과 확대 속에서 시민들이 자기조직화하는 온라인 시민운동의 가능성을 지적하지만 비정형성을 특성으로 하는 SNS가 시민단체를 대체하기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초국가 협력이 증가되는 상황에서 국가들도 잘 못하는 글로벌 거버넌스를 만드는 일을 유일하게 하고 있는 것이 NGO입니다.
이런 대변환기 시대에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의 확산은 중산층이 해체되면서 살길을 찾는 풀뿌리의 자연스러운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 상처받은 사람이 협력과 공유 그리고 호혜성에 기초해 시장 밖 영역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협동조합이든 사회적 기업이든 간에 한편으로는 풀뿌리 자치 역량의 강화 차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추세는 시민사회의 분권화와 자율성 강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시민사회에서 중앙의 종합 NGO 비중이 컸지만 앞으로는 작아질 수밖에 없지요. 물론, 이것을 두고 시민단체의 영향력 축소나 역할 약화로 연결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90년대와 완전히 달라진 상황 속에서 협력의 필요성이 증대되는 것뿐이지, 시민단체가 위기를 맞은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 사회에서처럼 시민단체의 재정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탈공업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을 어떻게 끌어내고, 자신의 역할을 자리매김할지가 과제이긴 하겠습니다. 민회가 추구하는 부분도 우리 사회 구조개혁의 방향과 내용에 대한 인식의 공유를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큰 흐름은 자율과 협력이고, 이것이 핵심 과제가 될 것입니다. 거기에 많은 풀뿌리 운동과 전통적 시민운동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형식          임 이사장님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숙의민주주의 결합한 민회운동을 말씀하셨는데 거기에도 시민들의 학습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방금 최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시피 시민사회의 재생산, 활동가와 간부 재생산, 새로운 주체로서의 시민들의 재생산 문제에 있어서도 시민학습과 시민교육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최근 5·18민주화운동 왜곡 논란과 관련해 역사 교육 문제가 대두됐는데, 역사 교육 문제도 중요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서울시 모든 공무원이 의무적으로 1년에 2~4시간 인권교육을 받아야 한다더군요. 2만 5천 명의 공무원이 대상인데, 교육시킬 강사진이나 단체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시민사회 내 재생산 구조의 확보랄지 새로운 주체 형성, 깨어 있는 시민을 양성해 내기 위해서는 시민교육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발전과 정치 발전을 동시에 이룩한 유일무이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에도 등급이 있으며, 아무리 경제가 발전한다고 해도 그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민주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지식과 정보, 시민들이 함께 형성하고 향유해야 할 민주주의의 가치와 태도, 민주적으로 자신의 삶과 시민사회를 가꾸어 가는 시민적 역량과 기술을 함양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 민주 시민교육의 종착점은 복합적 위기, 문명사적 위기에 대처하는 깨어있는 지구시민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봅니다. 시민교육에 대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이태호          교육이란 표현은 좋아하지 않고 학습, 스스로 학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다행히 인터넷 등 환경적 요소가 그런 것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사람들은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담론이 팽배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위기를 맞았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대면하고 협력하고 공감하느냐가 실제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치와 방향에 대한 논의와 그것을 위한 협력이 필요합니다. 시민단체도 누군가를 가르칠 수 없습니다. 놀이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임진철          먹여주기식 교육방법론은 더 이상 통용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온-오프 상에서 쌍방향학습시대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는 5년 전부터 ‘지식PD씽크넷’이라는 ‘온-오프 쌍방향학습 및 프로젝트 플랫폼’을 만들어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느끼는 것은 소수지만 사람들이 문명 전환의 트렌드를 읽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라이프스타일을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 시대의 자원 수탈형 고도성장 문명에서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대별시키면서 “잘 살아 보세!”가 시대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부동산 투기하면서, 석유를 펑펑 써대면서 잘 살던 시대인데, 이제는 그런 시대의 ‘잔치의 신화’는 끝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죠. 제로성장시대가 도래하는 상황에서 자원순환형 적정성장문명을 추구해야 할 때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제는 ‘잘 살아 보세’와 ‘따로 살기’에서 ‘제대로 살아보세’와 ‘더불어 함께 살기’로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의 전환을 이루어 내지 않으면 우울증이나 암에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언제까지 마른 행주 쥐어짜기식 경영문화와 성과지상주의적 피로사회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요즘 젊은이들 중에 현실을 직시하고 ‘제대로 살아 보세’와 ‘더불어 함께 살기’ 가치관으로 살아 가려는 똑똑한 젊은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삼포세대’라고도 말하지만, 맞벌이 젊은 부부가 부모님과 함께 살기 시작한 겁니다. 부부가 합쳐 3백만원만 벌어도 육아분업도 되니 좋고, 괜히 집 마련하는 데 인생 저당 잡히며 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적게 벌어도 집 마련하느라 인생 저당 잡히는 ‘쪼다짓’ 안 하며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겠다는 겁니다.

 

최배근          저도 교육보다는 학습이란 용어를 선호합니다. 88만원 세대는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적 욕구는 높아요. 부모 세대가 만들어 놓은 2만 달러 시대에서 성장했지만 우리 사회의 높은 평등의식으로 선진국의 시민욕구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시민운동이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협력을 끌어내기 이전에 이들에게 삶의 질을 높이는 이익을 제공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키고 협력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삶의 질을 높이는 새로운 문화적 기풍과 작업들이 풀뿌리나 시민운동 진영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신형식          한국의 시민사회는 민주화를 가능케 한 동력이었으며, 또한 민주화에 의해 새롭게 새롭게 형성된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주화 이후’ 사회 구성원이 민주주의 가치와 이념을 깊이 내면화하지 않으면 정치경제적 위기가 도래할 때 지속가능한 사회 발전은 위기에 처한다고 봅니다.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여 시민사회 내부를 민주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주체를 양성하고 민주적 생활 문화를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에 뿌리내려야 우리사회의 실직적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민사회의 토대가 침식되고 전환기의 위기에 처해있는 현단계에서 시민운동이 새로운 혁신을 이룰 수 있다면, 시민운동도 여전히 민주주의 심화발전의 동력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전환기에서의 복합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활공간에서 갊의 주체로 활동하고 있는 ‘시민’들과의 소통과 협력, 공유와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봅니다. 긴 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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