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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민주」

[삶과 문학] “80년 5월 광주서 ‘시민 자율성 짓밟는 국가’ 모티브 얻었어요”

기념사업회 2013. 7. 15. 18:36

정유정 작가 “80년 5월 광주서

‘시민 자율성 짓밟는 국가’ 모티브 얻었어요”

 

글 정여울 (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1. 소통불가능성과 싸우다


그녀는 싸운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여겨왔던 모든 굳건한 전제들과.
그녀는 반드시 저 우아한 순수문학의 철옹성 안으로 진입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이런 문학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기꺼이 인정해줄 수 있는,보다 자유로운 소통의 분위기를 꿈꾼다. 그녀는 ‘문단’이라는 집단적 주체에
호소하지 않는다. 문학상을 받은 경험은 있지만, 그러한 권위에 자신의 문학성을 의탁하지 않는다. 오직 독자와 작품으로 소통하는 길만이 그녀의 유일한 승부처다. 그래서 가끔 그녀는 외로워진다. 독자들이 늘 상냥하고 친절한 메시지만을 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녀의 의도를 곡해하고, 때로는 그녀의 글을 향해 ‘악성 리플’도 단다. 전자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작가들에게 글쓰기란 ‘모두가 평론가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그 모든 날카로운 웅성거림을 견뎌내는 뚝심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민주주의란 사방에서 쏟아지는 갑론을박을 온몸으로 껴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눈부신 축복인지도 모른다. 『7년의 밤』 이후 신작 『28』로 다시 돌아온 정유정 작가를 만났다.

 

 

 


 

정여울 신작 『28』을 쓰시는 동안 처음으로 심각한 슬럼프를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작품이나 인터뷰를 통해 알아온 작가님은 굉장히 대범하고 솔직하고 거침없는 분이라 사실 좀 놀랐습니다. 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하셨나요.


 

정유정 항상 제 원고를 가혹하게 평가해주는 멘토가 있어요.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안승환 씨에요. 『돌이킬 수 없는』 시나리오를 쓰신 분이지요. 제 오랜 친구이기도 하구요. 그분에게 제 소설 초고를 보여드렸더니, “철학이 하고 싶으면 공부를 해서 철학책을 쓰고, 의학 용어를 쓰고 싶으면 의대를 가시고, 언어 유희를 하시고 싶으면 시를 쓰세요. 이게 뭡니까.” 이러시는 거예요. 어찌나 두들겨 패는지(웃음).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걸 느꼈습니다. 그때까지 열심히 쓴 초고를 완전히 엎어 버리고 다시 썼어요. 이번에 출간된 『28』은 그분의 충고를 듣고 다시 쓴 결과지요. 처음으로 이번 소설 ‘잘 됐다.’고 말해 주더군요. 그분 덕분에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지요.


 

정여울 정말 멋진 멘토를 두셨네요. 글 쓰는 사람들에게 슬럼프란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이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작품세계를 뛰어 넘을 용기를 주는 기회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작가님은 멘토의 덕으로 돌리고 계시지만, 스스로 극복하려는 강력한 의지와 노력 없이는 사실 극복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일부 독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이나 오해 섞인 비판이 이번 슬럼프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지요.


정유정 저도 제가 그렇게 비판에 약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웃음). 정말 입에 담기도 힘든 악플들을 봤을 때, 그동안 스스로 ‘강하다’고 느꼈던 부분들이 소리 없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지요. 작가들이 사실 독자들의 비난에 굉장히 민감해요. 너무 속상해서 인터넷을 안 하려고 해도, 그것도 참 어렵더군요. 내 작품을 읽고 쓴 글에 대해서 작가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대부분은 사실 칭찬이나 호평이더라도, 극소수의 비난이나 오해가 작가들을 고통스럽게 하지요. 이번에 아주 호되게 슬럼프를 겪으면서 스스로 더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정여울 이런 문제를 단지 ‘개인의 성격’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이 사회의 소통 구조 자체가 커다란 문제를 갖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오프라인 상태에서 살아있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인터넷 상으로 ‘나’라는 타이틀을 지우고 익명의 소통을 하고 싶은 욕망 자체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는 대화 속에서 자기표현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간다면, 이 ‘악성 댓글 문화’의 잔혹한 공격에서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입말로 해결하고 지나쳐버려야 할 자잘한 수다들을 문자언어로 텍스트화해서, 게다가 인터넷을 통해 만천하에 공개해 버리니까, ‘아니, 이런 악성 댓글을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봤단 말이지?’하는 공포감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유정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악성댓글이나 작품에 대한 비판에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는 강심장을 아직은 가지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데 주변 작가들 중에 C라는 분은 정말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가혹한 비판을 해도 너무 평화로운 거예요. 그래서 제가 C작가에게 물어봤어요. 비결이 뭐냐고. 그랬더니 이렇게 말씀하세요. “난 그냥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한다. 나에 대해 칭찬하는 사람은 그냥 좋은 사람이고, 나를 욕하는 사람은 무조
건 나쁜 사람이다.” 이러시는 거예요. 정말 진정한 ‘멘탈 갑’이더라구요(웃음). 하지만 많은 작가들은 그런 강심장을 지니지 못했지요. 정말 우리 작가들은 비판적인 평론이나 리뷰에 대해 굉장히 예민합니다. 사실 『28』을 쓰
고 나서도, 이번엔 또 어떤 비판을 받을까 걱정되는 측면도 많습니다. 하지만 더 강하게 자신을 다잡으려고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작가가 자기만의 세계를 지켜낼 수 없으니까요.

 

 

#2. 소설 속의 인물을 통해 더 나은 소통을 꿈꾸다


정여울 아무리 악플이 나쁘다고 해도, 다양한 담론들이 풍요롭게 생성될 수 있는 환경이 바로 전자민주주의 시대의 이점이라는 측면까지 부정할 수는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 말만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고, 아름답고 바람직한 말들만 허용하는 것이 곧 좋은 민주주의도 아니니까요. 또한 모두가 똑같이 행복한 세상을 향한 획일적인 유토피아 또한 디스토피아만큼이나 위험한 것이지요.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소마’라는 기적의 약물만 먹으면 모든 걱정과 불안을 잊고 무조건 행복해지는 유토피아가 등장하지요.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분명 소마의 효과를 알고 있지만, 어느 순간 소마 먹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해요. 소마를 먹으면 뭔가 자신의 의식이 마비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죠. 자기 안의 창조적인 열정, 문학을 향한 갈망, 이런 것들이 전혀 주입되지 않았는데도, 그는 그러한 ‘머나먼 예술’에 대한 불가해한 갈망을 느낍니다. 약물을 통한 행복은 결국 ‘불행이나 불안을 느끼는 감각’을 마비시키는 체계적인 망각의 효과라는 것이지요. 주인공은 모두가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에서 홀로 ‘불행할 권리’를 찾기 위해 처절하게 분투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인간은 때로 나쁜 생각도 하고 사악한 행동도 하는데,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여기고 그런 감정의 출구도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정말 『지킬 앤 하이드』처럼 ‘욕망의 뒷문’에서만 마음껏 나쁜 짓을 저지르는 두 얼굴의 인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정유정 그렇지요. 인간의 나쁜 감정, 사악한 욕망을 거세시킨다고 해서 좋은 세상이 오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앤소니 버제스의 『시계 태엽 오렌지』를 봐도 그런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 수 있지요. 이 소설에서는 못된 짓을 하는 아이들 모아다가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정신적으로 거세를 시키지요. 나쁜 생각을 하면 고통스러운 자극이 오도록 하는 방식으로요. 고통에 대한 공포 때문에 억지로 착한 아이들이 되는 것이지요. 정말 끔찍한 방식으로 인간의 본성을 조작하는 것인데요. ‘정상적인 삶이라면, 나쁜 짓을 할 자유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쁜 것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이 곧 좋은 사회를 향한 대안은 아니라고 봐요. 저마다 여러 가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모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텐데요. 얼마 전에 저에게 충격적인 소포가 하나 왔어요. 헌법재판소에서 웬일로 우리 집에 소포를 보낸 거예요. 무슨 일인지 놀라서 뜯어보니까, ‘몇 동 몇 호에 성범죄자가 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어요. 정말 끔찍하지요. 그 사람 이름과 사진까지 다 나와 있었지요. 그러면 이 사람의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성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가족들 모두가 인권 침해를 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방법밖에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정말 괴롭더군요.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영원히 배제시키는 것이 공동체의 대안은 아니라고 봐요.


정여울 그런 의미에서 『28』의 김윤주 기자는 희망적인 인물이지요. 김윤주는 원래 철저히 성과를 중시하고, 대놓고 이기적인 데다가, 다른 사람의 형편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일단 특종을 낚으려는 기자였지요. 그런데 서재형을 통해 김윤주는 서서히 변화하지요. 특종을 지향하는 속물적인 캐릭터였던 김윤주의 눈에 비친 서재형은 동물 보호의 탈을 쓴 ‘잔혹한 개 장수’였지만, 막상 가까이 가서 보니 서재형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윤리를 지키려는 사람이었지요.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초유의 재앙을 사회부 기사로 다루면서, 김윤주는 ‘사실’의 잣대로만 세상을 바라보려던 자신의 세계관을 뼈아프게 반성하게 되는데요. 이런 깨달음이 정말 김윤주를 역동적인 캐릭터로 만들어줌과 동시에, ‘인간은 타인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통해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정유정 작가님의 기존의 인물들하고는 굉장히 다른 특징들을 많이 보여주는 것 같아요. 게다가 ‘연애’라는 코드까지 등장하니까 훨씬 흥미롭던데요(웃음).


 

정유정 김윤주는 뻔뻔하고 저돌적인 불도저 같은 제 성격을 닮았어요(웃음). 겉으로 보기에는 지독해 보이지만,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단지 살아 남기 위해서 애쓰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이기도 하지요. 그런 김윤주가 사랑을 통해서, 서재형이라는 한 인간을 통해서 변화한다는 것은 기존의 제 소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일단 여성 주인공을 그리는 것도 기피했고, 본격적으로 로맨스를 다룬 적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아직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데 서툰 면이 있어요. 이 소설을 읽어 보신 분들이 윤주를 통해 일말의 희망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3. 목숨을 건 소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정여울 서재형은 작가의 이상을 가장 뚜렷하게 표현하는 주인공인데요. 사실 소설의 전개상 서재형의 비극적인 결말을 예상하면서도, 마지막 장면이 정말 안타깝고 슬펐습니다. 구제역 파동 때 셀 수 없이 많은 동물들을 ‘살처분’하는 동영상을 보시면서 이 작품을 구상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정말 인간과 동물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을 극복하는 방법은 때로는 서재형처럼 자신의 삶을 통째로, 아무런 은유나 상징 없이 정말 그 자체로 완전히 바치는 헌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윤주는 그런 서재형의 삶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구요.


 

정유정 서재형이 주인공이라면 김윤주는 ‘기록하는 자아’의 역할을 떠맡은 것이지요. 역사의 주역이 서재형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김윤주처럼 냉철하면서도 사실 뒤에 숨은 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실은 명료하지만 많은 진실을 감출수가 있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뻔해 보이는 사실도, 찬반을 명확하게 결정할 수 있는 사실도, 그 이면을 파헤쳐보면 정말 복잡한 진실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끈질기게 파헤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역사를 기록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윤주에게 그런 역할을 맡기고싶었어요. 인간과 동물이 공존하려면, 살처분 같은 끔찍한 결말을 피하려면, 인간이 먼저 손을 내밀어 동물을 구해야 하고,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서재형은 온몸으로 대변하지요. 자연에서 동물이 화를 당하면 인간도 화를 당하게 되어 있고 다 같이 공멸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동물들만을 ‘살처분’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정여울 개인적으로 『28』에서 간호사 수진이가 죽는 장면이 가장 안타까웠습니다. 전염병이라는 대재난 자체로 죽는 것이 아니라 전염병 이후의 대혼돈 속에서 윤간을 당하고 공수부대의 총에 맞는 수진의 모습이, 어쩐지 5·18
민주화운동에서 죄 없이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을 연상시켜서 더욱 가슴이 아팠는데요.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대재난이 일어났을 때 그 확산을 막는 방법이 도시의 전면봉쇄밖에 없는 것인지, 그렇게밖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치명적인 한계가 아닌가 싶어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도시 밖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공수부대까지 동원해서 잔인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단지 가상의 재앙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연상시켜서 읽기가 상당히 괴롭더군요. 전염병처럼 확산되는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가로막기 위해서 광주를 봉쇄했던 당시 상황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정유정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화양을 봉쇄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 저는 실제로 5·18민주화운동 때의 자료들을 철저하게 참고했습니다. 공권력이 한 도시를 봉쇄하는 장면을 리얼하게 담고 싶었고, 그 가장 처절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1980년 5월의 광주였지요. 저는 당시에 열다섯 살이었어요. 광주 시민들 사이에서는 약탈이나 폭력 행위 같은 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정말 조용했어요. 어떤 식으로 국가가 한 도시를 포위하고
봉쇄하고,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의 의지를 가로막는지,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5월 광주였지요. 실제로 어쩔 수 없이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희생될 때, 무사한 다수의 사람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존중감이나 배려가 전혀 없고 너무나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얼마 전에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기사를 봤는데,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이 가관이더군요. ‘너희들은 그냥 너희들끼리 섬에 갇혀 살아라, 정상인들이 있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라’라는 요지의 악성 댓글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어요. 바로 이런 잔인한 군중심리가 진정한 공존을 가로막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심각한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어쨌든 국가의 매뉴얼은 ‘봉쇄하라’거든요. 이럴 때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과학이나 정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와 존중이라는 것을, 서재형을 비롯한 수많은 약자들의 희생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정여울 인간의 위대함이란 정말 참혹한 순간, ‘여기가 끝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발휘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개를 죽인 기준을 서재형이 구해 주면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장면을 보면, 정말 위급한 순간에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을 완전히 던지는 사람들의 아름다움밖에는 대재앙 속의 구원이란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보면, 계급을 뛰어넘은 사랑이야기보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이었거든요. 『28』에서 모두가 도망친 병원에서 마지막까지 자원봉사를 하는 의료진들, 장의사, 악사들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었던 것이지요. 『28』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공존’, 그리고 더 나은 소통을 향한 제언 한 가지만 해주세요.

 

정유정 구제역 파동 때 죄 없는 동물들을 집단 살처분하는 동영상을 보고 느꼈던 충격이 『28』이라는 소설을 쓰게 만들었지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게 정말 부끄러운 순간이었어요. 그 동물들이 인간에게 잡아 먹히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니잖아요. 동물의 고기를 먹더라도 그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면서 먹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요. 알래스카의 어부들은 고래를 잡으면 살을 다 취하고 뼈를 바다에 돌려 주면서 ‘내년에 또 오거라!’하고 감사를 표현한다고 합니다. 고래의 뼈를 향해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이지요. 나를 살려 주는 존재에 대한 존중감.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정여울 소설의 창작하고 유통하고 감상하는 우리의 독서문화 속에서도 ‘더나은 소통’을 향해 우리가 저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정유정 등단을 해야만 문단에서 인정을 받는 분위기, 뭔가 대단한 상을 받거나 평론가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좋은 작가로 인정을 받는 분위기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반드시 어떤 시험을 통과해야 ‘본격문학’으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참 작가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측면이 많지요. 예술을 위한 예술만 환영할 것이 아니라, 즐기는 문학과 엔터테인먼트로서의 문학에 대해서 좀 더 열린 시각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엔터테인먼트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데도, 엔터테인먼트는 ‘쌈마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문단에 만연해 있지요. 저는 소설이 주는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는 무척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소설이 주는 강렬한 정서와 의미가 융합되면서 오는 감동과 희열로 가슴이 터질 듯한 새벽을 맞이할 때 그것이 바로 소설의 엔터테인먼트가 아닐까요.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소설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길 고양이들의 친구다. 광주광역시에 사는 작가 정유정은 매일 산책을 나가 곳곳에 흩어진 길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준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통조림과 사료를 산책로 곳곳에 놓아 주면서 ‘대장’하고 부르면, 그녀와 6년 넘게 친구로 지낸 길 고양이들의 우두머리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녀가 지금 키우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도 아기 때부터 직접 젖병을 물려가며 키워온 길 고양이들의 새끼들이었다고 한다. ‘고양이들이 우리 배추밭을 망쳐 놓았다.’면서 먹이에 농약이나 쥐약을 몰래 섞어 놓는 사람들 때문에, 고양이들이 죽은 모습까지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인간은 왜 이토록 잔인할까.


그녀는 『동물의 역습』을 쓴 철학자 마크 롤랜즈와 『이기적 유전자』로 잘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통해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물의 역습』은 인간이 버리고, 짓밟고, 학살
한 동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은 동물과 똑같이 유전자의 지배를 받으며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우리는 ‘남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이 세상은 불평등과 죄악과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자신은 죽어 가는 동물들의 목소리에,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수많은 이웃들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는 머나먼 유토피아의 전망만은 아니다. 나보다 더 아프고, 나보다 더 약한 존재들의 사라져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거기서부터 더 나은 소통은, 더 밝은 민주주의 미래는 시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작가 정유정
1966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광주기독간호대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일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사직으로 근무했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5천만 원 고료 2007년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고 『내 심장을 쏴라』로 1억 원 고료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들로부터 강렬한 주제의식과 탁월한 구성,
스토리를 관통하는 유머와 반전이 빼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수상 이후 일체의 작품 발표 없이 장편소설 『7년의 밤』집필에만 몰두하여 2011년 출간하였다. 그 외 저서로는 『열한살 정은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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