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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민주」

[내가만난민주주의] ‘걔네들’ 갈 곳은 어디인지요?

기념사업회 2013. 8. 12. 17:33

[내가만난민주주의]

‘걔네들’ 갈 곳은 어디인지요?

 

김융희 서울 세현고 교사/ k4123@chol.com

 

 


‘걔네들’은 친해지면 안 되나요?

 

벌점 많거나 징계받은 학생들 중심으로 새내기 교사들과 함께 1박 2일 사제동행 농촌 봉사활동을 기획했다. 그런데 어느 중견 교사분이 “걔네들 붙여놓아 서로 친해지면, 각반 나다니며…… 걱정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단다. 새내기 교사는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들이 친해져서 힘이 더 세지고, 일탈적인 행위를 확산시키면 어떡해요?”
농촌 봉사활동이 의외의 장애물을 만난 것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걔네들’도 제자인데…….” 그리고 “‘걔네들’은 친해지면 안 되나요?” 하고 말았다.


돌아서는 마음이 씁쓸했다. 그 중견 교사분께 한 마디 하고 싶었다.
“당신의 일류대학 진학률 높이기 노력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공부 못하는 걔네들의 아픔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지요? ‘걔네들’ 갈 곳은 어디인지요?


당신을 생각하니, 귀족사회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이 떠오릅니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행복(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당신이 맹자의 뜻과 달리, ‘천하의 영재와 문제아들을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교사의 행복(得天下英才問題兒 而敎育之 敎師之樂也)이라고 받아들이신다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맹자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오히려 기뻐하고 고맙게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소위 ‘찐찌버거’와 학생인권조례

 

중2 때부터 이미 교과서는 덮어 버린 애들! 수업시간에 도덕을 <도적, 똥떡, 돈따먹기>, 국어를 <굶어, 죽어, 북어, 구워, 떡국먹어>, 국사를 <국수, 즉사>, 기술 가정을 <가출 과정, 술주정> 등으로 교과서를 튜닝(tuning)하면서 시간만 때우던 애들! 실업계 떨어지고 갈 데 없어, 인문계 와서는 졸업만 기다리는 애들이다. 그들은 한글 문맹은 벗어났지만, ‘수업내용 문맹’이다. 모르는 언어들의 홍수 속에서, 수업시간에 자거나 떠들거나 딴 짓으로 시간을 때운다. 어떤 학교에서는 책상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책상 안의 휴대폰을 보기도 한다. 일부 교사들에게 이들은 무척 괴로움을 준다. 엎드려 있어서 수업분위기를 해치며, 떠들어서 수업 진행을 어렵게 한다. 심지어는 그들이 ‘있어 보이려’ 혹은 ‘센 척(SC)’ 하기 위해 교권에 도전하기도 한다. 

 

 

지난 2010년 당시 진보교육감 예비후보들은 학생인권신장 정책협약 체결식을 통해 '학생인권조례'로 청소년의 인권 차별, 억압을 막아내자는 약속을 하였다.

 


일부 교사들에겐 이들이, 심하게 말하면, ‘없으면 좋을 애들’이다. 이들은 소중한 ‘제자’가 아니라, 순진하고 성실한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해치고, 도덕 생활을 오염시키는 그런 존재로 보일 때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애들은 ‘찐찌버거(찐따-찌질이-버러지-거지)’를 자칭하고, 스스로를 쓰레기(찌질이, 양아치 등)로 낙인찍기도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자, 이들과 일부 교사들 사이의 갈등과 파열음이 ‘학생인권조례 최전선’으로 부각되었다. 출결과 용의 복장, 수업시간에 기계처럼 앉아 있기 등 군대식 통제가 생활지도의 주요 업무였던 교사에게, 기꺼이 순응하지 않으며 딴지를 거는 그들의 행태는 용납할 수 없는 도전으로 다가왔다.


4월 말에 연두색으로 삐져나온 조그만 새싹이 한 달이면 무성한 잎으로 세상을 덮는다. 그런 폭발적인 생명력을 가진 청소년들이, 하루종일 입을 꿰맨 듯한 침묵과 본드에 붙은 것처럼 책상에 앉아 있기만 강요당하는 것이 어찌 고통이 아닐 수 있을까? ‘노는 애’들인 그들의 문화는, 학교 스트레스를 푸는 데서 자기존재감을 확인받는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다. 땡땡이 치기, 놀려 먹기, 심한 꾸밈이나 튀는 차림으로 존재 확인하기, 노래방, 피시방, 알바와 쇼핑, 함께 몰려 다니기, 오토바이의 스릴, 남녀관계, 폭력……. 그러한 그들의 학교생활 탈출 욕구와 학교생활 불성실에 대한 교사의 통제 노력과 훈계에, 그들이 냉담하거나 “짜증 나!”라는 식의 ‘싸가지 없는’ 행동으로 적대하면서, 교권침해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교사에게 덤비는 학생들의 소위 ‘싸가지 없는’ 짓거리 들이 메이저 언론에 도배되면서, 학생인권조례의 취지인 전체 학생들의 인권·민주 의식 향상과 공동체 문화 형성 그리고 교사와 학생 관계의 선진화는 관심에서 사라져 버렸다. 결국 소위 ‘싸가지 없는’ 요즘 애들과 학교폭력에 대한 통제책이 대세가 되고 만 것이다.
미국 생활기록부에서도 범죄기록은 학부모의 의견을 반영하여야 하고 상급학교 진학에 활용되지 않는데, 생활기록부에 반드시 기록하여 대학입시에 반영하도록 하고, 경찰의 적극적 관여 등 그들에 대한 강경 억압이 대책으로 제시된다. 그 근본 원인인 학교의 수업내용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학생들,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꾹꾹 참아야만 하는 학생들, 면학분위기를 저해하는 일종의 ‘공해물질’ 취급받는 학생들, 이런 소외되고 버림받은 수많은 학생들이 문제의 온상임은 도외시한 채.


더 나쁜 존재

 

이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다고 교사들에게 돌 던지는 사람들이 있지만, 변명의 여지는 있다. 담임을 맡았을 때, 능력이 부족하다손 치더라도 학생들과 함께하며 대화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평균 하루 2시간은 더 근무했는데도 말이다. 많은 아이들을 제대로 한 30분 앉아서 눈맞추며 그 애의 속얘기를 들어보는 기회 한 번 갖지 못하고 진급시켰다. 수업과 담임 업무 포함하여 행정적으로 요구되는 많은 일들을 하다 보면, 그런 애들에 깊이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달래서 조용히 있기만을 바라고, 벌점 주어 나대지 않기만을 바라고, 너무 심한 경우 퇴학이나 전학시켜 반성과 새출발의 계기로 삼기를 바라게 되기 십상이다. 그러한 학생들이 다수 출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근본원인이나 학교시스템 문제에는 관심 없이, 위에서는 스트레스를 풀도록 방과후 체육클럽 활성화나 ‘학교폭력대책위원회’ 운영 등 사후처리 행정지침이나 내리면서, 모든 짐을 일선교사에게 떠넘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현교육체제는 1960~70년대 노동력의 양적 투입에 기반한 경제성장전략에 최적화되어 만들어진 체제다. 주입식 암기 위주 학습과 군대식 통제 위주 생활지도와 ‘선착순’식 치열한 성적경쟁 교육을 통해, 모든 것 참고 죽어라고 공부하도록 하여, 저임 혹사 노동을 기꺼이 감내할 산업역군을 육성하는 교육체제일 뿐이다.
그 시대에는 교사들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혹사노동하면서, 군대의 조교처럼 군대식 ‘선착순’ 논리로 학생을 몰아붙여, 세계가 놀라는 ‘하드워킹(hardworking)하는’ 노동력을 육성하였고, 그들이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다. 그런 성장전략이 소위 ‘IMF사태’로 인해 파탄나고, 창의적 노동력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학교붕괴 담론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큰 변화없이 아직도 그 체제로 그런 교육방식에 익숙한 교사들이 그대로 교육하고 있다. 국민소득 200불 시대 학생들에게 교육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후 난파선의 뗏목에서 육지로 연결된 동아줄 같은 존재, 온 가족의 생존과 출세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그러하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온갖 금욕과 인내와 군대식 통제를 기꺼이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민소득 2만 불 시대의 학생들은 다르다. 온갖 다양한 욕구와 삶의 방식과 그들만의 삶의 공간을 향유하고 그리고 매스컴을 통해 끊임없이 욕구 실현과 소비를 세뇌받는 요즘 학생들에게 그런 금욕과 지독한 인고, 군대식 통제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그들 말로 무척 ‘짜증 나는’ 상황일 것이다. 일부 교사들과의 마찰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체제에서 뒤처진 소위 ‘노는 애’들이 학교 변화를 요구하는 선봉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교육체제 속에서 ‘걔네들’을 위한 공간은 거의 없다. 대학입시에 생활기록부가 중요해지면서, 잘하는 애들을 위한 토론대회, 각종 경연대회, 명사 초청 강연회, 논술교육 등은 증가했다. 그러나 정작 걔네들을 위한 것은 그들을 순치시키기 위한, 상담사 배치 정도일 것이다. 보충수업인 ‘방과후 수업’도 그들과는 상관없다.


구청 등 지자체에서는 일류대학 진학률을 높여야 지자체의 가치가 올라가고, 지역 선호도가 개선되고, 주민만족도가 높아진다는 논리에 얽매여 학교지원용 예산을 쓰고 있다. 지자체별로 학교를 위해 몇백억 혹은 몇십억 예산을 시설이나 영어원어민 강사 채용, 논술 지도, 엘리트 육성용 지원비 등으로 쓰고 있음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교육청에서도 영어교육 등에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쓰면서, 걔네들을 위한 산업학교 입학생 증원, 기술교육 기회 확대, 단위 학교 보완교육기회 마련 등에는 그다지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교육부는 오히려 ‘경쟁력 있는 인재를 육성’한다는 명분으로, 자사고, 특목고, 국제고 등 엘리트교육 강화와 학교간 경쟁 강화를 부추긴다. 결과적으로 중·고등학교의 입시경쟁교육 강화를 통해 구체제를 더욱 강화시켜 왔다. 이는 ‘걔네들’을 버리는 정책에 다름 아니다.


예컨대 사회문제로 부각된 학교폭력 문제에 대해서도, 그 문제의 근원인 ‘걔네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지나친 일류대 진학 위주 경쟁교육체제 개혁을 통한 원인처방 노력보다는, 대대적으로 설문조사하고, 징계하고 격리하고 보고하고…… 행정조처를 취하는 것 중심의 대책이 일선학교로 내려온다. 그것도 여론이 일어나고 정치권에서 문제제기가 있어야 뒷북처방으로 해 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잘못된 생각일까?

현 교육체제에서 도대체 ‘걔네들’ 갈 곳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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