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희망이야기/풀뿌리 운동 현장을 가다 (66)
함께쓰는 민주주의
“무슨 시간이 제일 재미있니?” “노는 시간이요.” 사내 녀석이 짓궂게 답한다. “어떤 시간이 제일 즐거워?” “수화요.” “수학?” “아뇨, 수화요.”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중요한 건 어른의 잣대로 판단하는 짐작이 아니라 그 아이의 진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오늘은 수화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두 달 후에나 다시 수업을 한다고 하니 아이들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다. 수화 시간이 끝났음에도 선생님에게 자꾸 묻고 또 묻는다. “선생님, 그럼 두 달 후에 보는 거예요?” “응…….” 자원교사 선생님도 서운한지 아이들에게 눈웃음만 줄 뿐이다. 저소득층 가정에서의 여성과 아이 “동두천이라는 지역이 다른 지역하고는 좀 다른 특성이 있죠. 우선 잘 아시듯이 ‘미군기지’라는 이미지부터 다른 도시에..
세계감성지수가 필요하다 경계를 넘어 책임자인 미니(35세)를 만나기 위해 약간 복잡한 북아현동 골목길을 올라갔다. 신라수퍼를 지나고 은혜미용실을 지나자 오래된 골목들과 뒤섞여 있는 컴퓨터 크리닝 세탁소가 나왔다. 그 맞은편이 사무실이었다. 1층에 있는 사무실은 사방이 트인 조용한 공간이었다. “한국은 명백히 인종주의 사회입니다.” 미니는 제법 강한 톤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흑인 영어교사가 있나요? 대부분 백인뿐입니다. 흑인을 원하지 않는 거죠. 백인은 흑인보다 친절하고 성격도 좋고 영어를 잘 할 거라 생각해요. 골목을 가다가도 백인을 만나면 영어로 말 시킬까봐 피하죠. 독일 사람일 수도 있는데 말이죠. 흑인을 만나면 두려움과 불쾌감을 느낍니다.” 그는 한국사람 무의식 안에 깊게 박혀있는 인종..
생리대와 평화 걷고 싶은 거리 신촌 만남의 광장에 도착했을 때 잠시 혼란스러웠다. ‘일회용 생리대 20개를 대안 생리대 하나와 바꾸’는 행사를 한다고 피자매 연대에서 일하는 조약골(35) 씨에게 들었는데 그곳에는 생리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라크 평화를 위한 연대모임, 경계를 넘어, 전쟁없는 세상, 병역 거부자들의 모임 등 여러 사람들이 모여 ‘평화난장’을 벌이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순간 ‘평화 모임에 생리대라니, 생리대와 평화와는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행사가 다 끝나고 서대문에 있는 피자매연대 사무실에서 디온(28), 조약골과 마주 앉았을 때 해소되었다. 두 사람은 대안 생리대를 만들기 전에 이미 평화운동을 해온 ..
실상사에 도착한 건 점심 무렵이었다. 첫 만남에 염치없이 밥부터 얻어먹었다. 공양간. 식사시간이 끝날 무렵이어서인지 열개 남짓한 식탁은 거의 비어 있다. 공양간 한 켠에 마련된 개수대에서는 아이들이 늘어서서 왁자지껄 설거지가 한창이다.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는 게 원칙인가 보다. 지리산 봄나물에 쓱쓱 비빈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는 나도 따라 설거지를 한다. 이곳엔 남은 반찬을 버리는 잔반 그릇이 없다. 개수대에도 밥알 한 톨 없이 깨끗하다. 실상사 작은 학교는 정말 작다. 평평한 터에 컨테이너 교실이 서너 개, 교무실, 별실, 원두막, 그리고 자그마한 운동장이 전부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의 웅장한 산맥과 널찍하게 펼쳐진 텃밭들, 교실 옆 푸르른 대나무 숲이 아니었다면 너무 초라해 보일 터였다..
그 많던 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 조상들이 살던 마을 공동체에는 그들만의 신앙이 있었다.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신을 모셨던 서낭당이 있고 집안을 지켜주던 집신, 우물물이 마르지 않도록 지켜주던 우물신, 산을 지켜주던 산신, 땅을 지켜주는 지신(地神)……. 이처럼 옛 사람들은 그 많은 신들과 함께 살며, 신들이 마을 공동체를 지켜주고 그 땅에서 귀한 곡식을 거둬들일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농사를 시작하거나 추수가 끝나면 반드시 지성을 들여 감사의 제를 올렸다. 한 마을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것은 결국 모든 신들의 조화로움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살았다. “옛 사람들은 마을 공동체 안에서 여러 신들과 함께 모든 것을 영위하고 그 안에서 어우러져 살았기 때문에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있었습니..
매주 화요일 정오, 서울 종로 제일은행 건물 앞에서 ‘프리 버마 캠페인(Free Burma Champaign(Korea))’이 펼쳐진다. 현수막에는 ‘버마에 자유를, 버마에 민주주의를, 버마에 평화를’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이 캠페인은 군부독재 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버마의 실상을 한국 사회에 알리고 버마의 조속한 민주화와 한국 정부의 정책적 결단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버마행동 등 버마인 단체와 한국의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참여하고 있다. 영국과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겪었고, 독립 후 군사쿠데타로 군부정권이 수립된 나라. 1988년 8월 8일 대규모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발생했으나 군부의 무력진압으로 약 1만여 명의 국민이 살해..
199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한다. 소설가 황석영 씨가 북한을 다녀와서 쓴 『그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을 읽고 우리 민족의 반이 살고 있는 북한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며 보낸 적이 있었다. 우리네 교육이 얼마나 강건(?)한 ‘반공’의 기치를 올렸던지 그는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에 다녀온(물론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글을 쓰면서 책 제목을 ‘그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라고 했을까? 당시 그 책이 반가웠던 것은 북한의 모습을 알려줄 만한 자료가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기는 해도 남한 사람들이 북한의 금강산에 여행을 갈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문화체험을 통한 소통 새터민 청소년 대안학교 는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고 조심스럽게 취재를 해야 하는 건..
“아직도 활동을 해?” 이번 달 ‘그곳에 희망이 있다’ 취재처를 말하는 나에게 사무실 선배가 한 말이다. 이 선배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희망의 노래 ‘꽃·다·지’ 19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나에게 꽃다지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학생회방에서 밤늦게까지 대자보를 쓸 때 곁의 친구가 불러줬던 ‘전화카드 한 장’에 한 숨 돌리기도 했고, 술자리에서 선배가 나지막이 부르던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민들레처럼’ 등을 들으며 눈물짓기도 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고 투쟁의 현장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했던 꽃다지의 노래들. 그들이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곧 콘서트도 열고 새 음반도 낸다는 소식에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이번 호 취재대상으로 결정했다. ..
지난달 9일(월) 지하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는 북한의 발표가 있었다. 이후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 더욱 강력한 대북제재조치를 취해야 한다,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에 참여해야 한다, 심지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또다시 한반도를 긴장국면으로 몰아가고 있다. 1953년 6·25전쟁의 휴전 이후 한반도는 언제든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위협 속에 놓여 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주장이,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이 몇 년째 이어지고 있으나 좀처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변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평화란 무엇인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며,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화두를 들고 ..
초가을 비 굿은 날의 연속이라……. 토요일 낮 경기도 의정부 예술의 전당 광장에는 오페라 공연과 브레히트의 연극 공연, 모차르트를 위한 클래식 공연 등의 커다란 대형현수막 속에 요란하지 않은 작은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띈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위한, 그것도 의정부라는 지역에서 소수자들을 위한 문화제를 한다고 하니 선뜻 그 내용에 심적 동감이 갔다. 악기를 짊어 메고 가는 장애인의 모습도 보이고 민속의상을 입은 외국인 여성노동자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1년에 한 번, 이제 겨우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치루는 문화제인데 속절없게도 비가 내린다. 스스로 소수자가 되어 “비가 계속 와도 모든 행사는 실내에서 예정대로 진행할 겁니다. 문화제에 참석하는 이분들은 오늘을 위해 1년을 기다린 분들이거든요.” 행사를..